챕터 27: 새로운 단서
다음 날, 나는 지체 없이 학교에 휴직계를 제출했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발걸음은 마치 늪에 빠진 듯 무거웠지만,
내 안의 분노는 그 모든 것을 짓누르고 있었다.
안 선생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냐며 끈질기게 물었다.
그녀의 눈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겨 있었지만,
나는 그저 몸이 좋지 않아 좀 쉬어야 할 것 같다고 얼버무렸다.
그녀는 내게 많이 아픈 거냐며 병문안을 꼭 가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녀의 따뜻한 시선이 오히려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이제 내게는 평범한 일상도, 따뜻한 관심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오직 태경이를 찾아내 그에게 모든 것을 되갚아주는 것만이
내 존재의 이유가 된 듯했다.
하지만 혼자만의 복수는 쉽지 않았다.
기철이는 내가 태경이 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다짐하는 것을 듣고는,
자신도 그에게 속아 넘어간 피해자라며 끈질기게 내 집에 찾아왔다.
그는 유물도 찾아오고, 복수도 함께 하자며 나를 설득했다.
그의 끈질김은 때로는 피곤했지만,
이 막막한 상황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작은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몇 번이고 태경이의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처음 며칠은 신호가 가더니, 이내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이 반복되었다.
자취를 감춘 것이 분명했다.
작정하고 숨어버린 녀석을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그렇게 별다른 진전 없이 몇 주가 흘러갔다.
시간은 무심하게 흐르고,
내 안의 분노는 속절없이 쌓여만 갔다.
어느 날 저녁,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기철이와 방에 나란히 누워
옛 에덴 보육원 시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눅진한 짜장면 냄새가 방 안을 채웠고,
우리는 천장을 응시한 채 보육원에서의 배고팠던 기억들을 더듬었다.
"세상이 참 편해졌다. 그지?"
기철이가 뱉은 말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감회가 섞여 있었다.
"집에서 전화만 하면 먹을 것도 다 가져다주고.
보육원 시절 생각하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
그때는 먹을 게 없어서 봄이면 뒷산에 올라가서
찔레며, 참꽃이며 막 뜯어먹고 그랬는데 말이야.
그리고 어쩌다 토끼굴이라도 찾는 날이면, 그날은 정말 횡재한 날이었지."
그 순간이었다.
기철이의 '토끼굴'이라는 단어가 내 뇌리에 번개처럼 스쳤다.
그래, 토끼굴!
무언가 잊고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섬광이 머리를 관통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내 방으로 뛰어가
주머니 속에서 태경이가 주었던 명함을 꺼냈다.
까만 바탕에 금색 글씨가 새겨진 바로 그 명함이었다.
"야, 보나 마나 이것도 가짜일걸."
기철이가 내 손에 들린 명함을 보며 코웃음 쳤다.
“봐, 이름도 유태경이 아니라 유택영이잖아.”
그는 명함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버리려는 시늉까지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나는 기철이의 손을 뿌리치고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혹시나 하는 희망과 아니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뒤섞여 심장을 조여왔다.
수화기 너머로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에덴 솔루션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놀라서 휴대전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쳤다.
나는 겨우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거기 혹시 유택영 씨라고 계신가요?"
"아, 유 대표님 이요? 한 달 전에 퇴사하셨습니다."
담담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혹시 사는 곳 이라던지, 개인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나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는 심정으로 다급하게 물었다.
"개인 정보라 알려드릴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아쉬움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동시에 뜻밖의 성과에 눈곱만큼의 희망이 피어올랐다.
일단 현재로서는 그 녀석이 대표로 있었던 회사 밖에는 단서가 없으니,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다음 날, 우리는 유태경이 대표로 있었던 '에덴 솔루션'을 찾아갔다.
건물은 제법 그럴듯했고, 유리 외벽은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로비로 들어서자 깔끔한 정장 차림의 직원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꽤 규모 있는 회사인 듯했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발을 들였지만,
곧 경비원의 제지를 받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경비원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기철이는 이때다 싶었는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아이고, 경비 선생님! 저희가 말이죠,
아주 중요한 분을 뵙고자 왔는데,
잠깐만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는 말을 이어가며 주머니에서 몇만 원의 지폐를 꺼내
슬쩍 경비원의 손에 쥐여주었다.
경비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풀렸다.
"유택영 대표님에 대해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경비원은 돈을 받은 덕분인지,
전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로 태경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유 대표님은… 참 좋은 분이셨죠.
회사의 모든 사람들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하고, 늘 친절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좋아하고 따랐죠.
하지만… 절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본인의 사생활을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면이 있었습니다.
쉽게 다가가기 힘든 성격 이랄까요.
그래서 유 대표님에 대해 깊이 아는 인물은 잘 없을 겁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덧붙였다.
"유 대표님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유 대표님의 비서로 꽤 오래 근무했던 아가씨가 있습니다.
요 앞에서 카페를 하고 있으니,
거기 가서 물어보시면 뭔가 들을 수 있을 겁니다."
기철이와 나는 경비원이 말한 카페로 곧장 향했다.
대로변에서 한 블록 안쪽에 자리 잡은,
종업원 없이 혼자서 운영하는 듯한 아주 자그마한 카페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아담하고 아늑해 보였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