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26: 각성
휴대전화 화면에 선명하게 박힌 '유태경'이라는 세 글자.
그 이름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뇌수가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충격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어딘가에 머리를 아주 세게 부딪힌 듯,
세상이 통째로 기울어지는 아득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유물을 가져간 게 유태경이라고?
그리고 자신이 원래 이 유물들의 주인이라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현실에,
머리는 멍해지고 심장은 제자리에서 엇 박자로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유태경이 코끼리 바위의 위치를 알아냈으며,
그 좁은 통로를 통해 유물을 빼내 갈 수 있었는지,
수많은 물음표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폭주하는 듯했다.
옆자리의 기철이도 휴대전화 화면과 나를 번갈아 보며
"아니, 도대체 어떻게… 아니, 왜…"
라는 말을 헛바람처럼 내뱉을 뿐이었다.
둘은 그렇게 얼이 빠진 상태로,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차 안을 감싸고,
어둠이 서서히 걷히며 으스름한 빛이 창문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빛은 마치 우리가 처한 상황의 부조리함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듯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기철이었다.
그는 굳게 닫혔던 입술을 겨우 떼어내며 마른침을 삼키고는,
떨리는 손으로 차의 시동을 걸었다.
시동이 걸리며 차체가 미세하게 쿨럭 거리는 순간,
내 엉덩이 아래에서 무언가 딱딱하고 둥근 것이 걸리적거리는 이질적인 감촉을 느꼈다.
무심코 손을 넣어 더듬어보니,
손가락 끝에 잡힌 것은 작고 동그란 물체였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빨간 불빛을 끈질기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 섬뜩한 불빛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을 때,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수많은 물음표 중 하나가 사라지는 대신,
거대한 공포와 함께 모든 퍼즐 조각이 잔인하게 맞춰지는 듯했다.
나는 그 작고 동그란 물체를 기철이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기철이의 얼굴에서는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는,
마치 참을 수 없는 압력에 짓눌린 듯,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나왔다.
마치 썩은 실이 풀리듯,
그의 고백은 잔인한 진실을 한 꺼풀 씩 벗겨냈다.
"젠장… 그래 알았어, 다 말할게.
네가 있는 곳을 알려준 건 태경이었어.
내가 널 납치하던 그날,
녀석이 직접 전화해서 네 위치를 알려 줬어.
태경이가 널 납치하도록 유인한 거야.
노도술 영감을 다시 찾아낸 얘기도,
그리고 그 영감에게 코끼리 바위 이야기를 들은 것도…
사실 전부 태경이가 해준 이야기였어.
태경이가 나를 찾아온 날,
자기 만난 사실을 절대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했어.
난 그저 코끼리 바위에 숨겨져 있는 무언가가
일확천금을 벌어줄 거라는 말만 믿고…
돈에 눈이 멀어서 그 자식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 것뿐이야.
이 GPS 발신기는 아마 그 녀석이 찾아온 날,
몰래 조수석 틈바구니에 숨겨둔 것 같아.
그리고 좀 전에 우리가 싸우는 사이 튀어나온 거겠지."
기철이의 고백이 끝나자,
내 안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원망보다 더 깊은, 차가운 배신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했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태경.
유태경.
그 이름 석 자가 뇌리에서 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하게 짜인 그의 연극이었다니.
나는 그저 그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어리석은 꼭두각시였을 뿐이었다.
모멸감, 분노, 그리고 지독한 증오가 뒤섞여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주먹을 쥐자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고,
이빨을 악물자 턱 근육이 경련하듯 떨렸다.
내 안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뜨거운 용암이 심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억눌렸던 야수가 포효하 듯 깨어났다.
지난 시간 동안 태경이 에게 가졌던 한 조각의 미안함이나 희미한 그리움마저도,
그 순간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마치 억지로 덮어두었던 지독한 악몽이 현실로 튀어나온 듯,
내 안의 모든 것이 뒤틀렸다.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고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내 안의 이성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한 가지, 날것 그대로의 분노였다.
복수.
그를 찾아내, 그가 내게 안겨준
이 모든 배신감과 모멸감의 고통을 똑같이 되갚아 주리라.
보육원을 나온 이후 겹겹이 봉인해 두었던
야생의 무언가가 내 속에서 포효하며 깨어났다.
끓어오르는 증오가 전신을 지배했다.
마치 굶주린 맹수가 이빨을 드러내듯,
차갑고 단단한 결의가 내 전신을 지배했다.
기철이 또한 배신감과 미안함에 내 손에서 휴대전화를 낚아채
연신 통화 버튼을 눌러 댔지만 받을 리 만무했다.
"유태경…! 이대로는… 이대로는 끝내지 않아!
네놈이 안겨준 고통, 내가 똑같이 되갚아줄 테니…
두고 봐라!"
내 조용한 외침이 아닌,
억눌렸던 야수가 터져 나오듯 찢어지는 듯한 절규에
기철이는 흠칫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불편한 분위기를 풀려는 듯 내게 말했다.
그의 눈빛에도 이제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돌아왔구나, 깡다구.
그래, 우리가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