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1 : 뜻밖의 만남
한초희는 무언가 결정적인 단서로 이 명함을 남겼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빳빳한 종이 조각에서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유태경이 '야나기 케이'라는 일본 이름을 가졌다는 것뿐이었다.
기철이는 분명 이 명함에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며,
한낮의 햇빛에도 비춰보고,
입김을 불어 습기를 묻혀보고,
심지어는 혀끝으로 표면을 핥아 보기까지 했다.
그의 필사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명함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했다.
손에 잡힌 실마리는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자물쇠를 여는 열쇠인지 알 수 없는 막막함이 우리를 짓눌렀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에덴 솔루션'을 찾았다.
지난번 방문 때는 태경이의 흔적을 좇는 막연한 발걸음이었지만,
이번에는 '야나기 케이'라는 이름이 던진 물음표를 해독하기 위한,
보다 명확한 목적이 있었다.
유태경이 왜 굳이 일본 이름을 사용했을까.
그 이름 뒤에 숨겨진 의미는 무엇일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에덴 솔루션 건물로 들어서자,
경비원이 우리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며칠 전의 작은 뇌물이 그의 기억 속에 긍정적으로 각인된 듯했다.
우리는 혹시나 문전박대당할까 걱정해서 준비해 간 음료수 박스를 건넸다.
경비원은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박스를 받아 들고는,
임시 방문증을 건네며 조용히 회사 구경만 하고 얼른 나오라고 당부했다.
그의 눈빛에는 작은 호의와 함께,
더 큰 문제를 만들지 말라는 암묵적인 경고가 담겨 있었다.
회사 내부는 세련되고 깨끗했다.
차가운 금속과 유리, 그리고 무채색의 벽면이 어우러져
군더더기 없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듯했다.
마치 유태경이라는 인물을 건물로 빚어놓은 것처럼,
모든 것이 빈틈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사원들은 각자의 모니터 앞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키보드 소리만이 규칙적인 리듬처럼 공간을 채웠다.
그들은 제 일에 몰두하느라 우리에게는 단 한 번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우리는 건물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일본과 관련된 무엇이라도 찾으려고 애썼다.
갤러리처럼 꾸며진 복도,
회의실 유리 벽에 붙은 복잡한 도표들,
그 어디에도 우리가 원하는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태경이의 완벽한 가면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내 옆을 걷던 기철이가 갑자기 멈칫하며
"어! 어!" 하고 얼어붙었다.
그의 시선은 한 지점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기철이의 시선이 멈춘 곳을 응시했다.
분명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큰 덩치에, 굵은 뿔테 안경을 쓴 남자.
그는 벽에 걸린 대형 모니터 앞에서 무언가를 조작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사원증에는
'에덴클린 과장 조용주'
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저절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용주 형!"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외침은 고요한 사무실의 정적을 산산조각 냈다.
주변 사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로 향했다.
용주 형의 넓은 어깨가 움찔 떨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기철이는 재빨리 나와 용주 형을 사람들이 없는 비상계단 쪽으로 이끌었다.
닫힌 비상계단 문 안쪽, 우리는 숨을 헐떡이며 용주 형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과 함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삶의 깊이가 새겨져 있었다.
"형이 왜 여기에 있어?
그 불구덩이에서 어떻게 살아 나온 거야?
그리고 이제… 앞을 볼 수 있는 거야?"
쏟아지는 나의 질문 세례는 마치 봇물 터지듯 거침이 없었다.
용주 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신 나와 기철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함께 희미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너… 도꾸?
그리고 넌 최기철?
너희가 왜 여기 있어?
설마 나를 찾아온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형, 이야기가 길어서 지금 여기서 다 할 수는 없어.
괜찮으면 저녁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용주 형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렇게 용주 형의 근무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형, 이제 앞은 볼 수 있게 된 거야?"
나는 다시금 그의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용주 형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알 수 없는 회한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응, 다행히 10년 전에 각막 이식 수술을 받아서
이제 또렷하지는 않지만 일상생활은 가능해."
그의 목소리에는 기적 같은 회복에 대한 담담한 감회가 묻어났다.
우리는 한초희를 놓친 쓰라린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했다.
경비원에게 정문 말고 또 다른 밖으로 통하는 출입문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정문 입구에서 경비원의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들어주며,
마치 오랜 친구처럼 그의 옆에 서서 용주 형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