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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련이, 어른의 상처도 치유해 주네

강제 성숙 패키지 - 관계 편

by 가은이 아빠

이제 병원에서 제시한 마지막 항암, 아홉 번째 치료다. 마지막이 맞냐라고 묻는 내 질문엔 "일단 항암치료 한 후에 종양의 상태를 확인해 봐야죠"라고 의사가 말했지만, 우리 부부는 이번 9차 항암이 꼭 마지막 치료일 거라 믿으며 정해진 치료 스케줄을 가은이와 함께 소화했다.


이 치료가 마지막이길 너무 바래서 그런 걸까? 솔직히 이번 입원은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리고 지난 8개월 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던 기간 동안, 병원에서 맺은 수많은 인연들도 조심스레 물어본다.


가은이 이제 마지막 항암이에요?


어느 순간 우리 가은이가 치료 막바지에 와 있었고, 다른 환아와 부모들이 이 순간을 응원해 준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감사하다. 그 긴 시간들을 꾸역꾸역 버텨냈기에 이 순간들이 있는 것 같고, 병원에서 밤을 지새우며 정말 많은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신기하게도, 인생에서 내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며 애지중지한 것일수록 생명 앞에서는 마구마구 작아져 버렸던 것 같다. 돈, 커리어, 사랑, 관계, 그리고 내 삶의 의미. 예전과는 다르게 넓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니, 그 안에서 내가 몰랐던 많은 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가은이의 암 확진이라는 고통과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이 쓰라린 시련을 견디다 보니, 어느새 나에게도 인생의 무게를 버텨내는 힘이 생긴 것 같다.


가은이가 잠들고 나면 너무나 고요해지는 병실에서의 시간 동안, 나는 언제부터인가 용기 내어 내 마음속에 난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게 어른이 되어 생긴, 하지만 그 아픔이 아직도 너무 쓰라려 내 마음속 철창 안에 가두어 놓은 그 어두운 기억.


사실 나에게는 30대에 생긴 정말 크나큰 상처가 하나 있다. 노래로만 알고 있던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스토리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




열심히 회사 다니며, 가끔씩 했던 소개팅. 어느 날 회사 선배가 지인과의 만남을 주선했고, 모르는 사람보단 아는 사람 소개받는 게 편해 수락했던 그 만남. 사진 속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시원시원한 인상이었고 몇 번의 만남 끝에 우린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녀가 학벌에 대해 유독 조심스러워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겉으로는 당당했지만, 내면에선 ‘학벌’이 깊은 콤플렉스 같아 보였다. 난 서로의 깊은 마음속까지 공유하길 원했는데 이런 류의 솔직한 대화는 시작과 동시에 흐지부지 마무리되기 일쑤였다. 실망감이 커져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그녀가 직장을 다니며 대학원을 병행하는 이유가 단순히 자기 계발이 아닌 무언가를 덮기 위한 선택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번 생긴 불편한 느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진솔한 대화와 당당하게 부딪히고 이겨내려는 모습 대신, 무언가를 계속 감추려는 그녀의 태도에 내 마음도 점점 멀어졌다. 연애는 끝났고, 난 다시 자유로운 싱글남으로 돌아왔다. 그 정도면 그냥 흔한 이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예전 여자친구를 친구들 모임에 데려갔던 날, 내 친구 민성이가 유난히 반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던 걸 기억한다. 난 이미 마음을 완전히 정리한 상태였기에, 농담처럼 말했었다.


야, 너 관심 있으면 한번 만나봐


근데 쿨한 척 던진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사건이 될 줄은 몰랐다. 한 2달 정도 되었을까? 민성이에게 소주 한잔 하자는 연락이 왔다. 술을 못 마시는 내가 듣기엔, 그건 ‘할 얘기 있다’는 신호였다. 민성이가 아주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연찮게 내 예전 연인과 밥을 먹었고 내 직감처럼 감정이 생겼다는 고백이었다. 하지만 우리 둘을 둘러싼 친구들의 반응은 엇갈렸고, 본인도 고민스럽다고 했다.


근데 나는 솔직히 기뻤다. 사랑을 찾아 방황한 지구별 여행자의 삶을 알기에, 민성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진심으로 축하했고, 셋이서 같이 보자며 웃으며 축배까지 제안했다. 하지만 그 진심은 오래가지 못했고, 이상한 기류까지 느껴졌다.

공식적으로 교제를 시작한 것 같은데 나에게 아무 말도 없었고, 10명의 친구가 모인 단톡방에서는 왠지 알맹이가 빠진 소리만 울려 되었다. 그리고 전혀 변화가 없었던 민성이의 카톡 프로필과 달리, 내가 안 하는 인스타에서는 커플 사진이 계속 업데이트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엄청난 배신감에 난 온갖 비난을 단톡방에 투척하며 난 그 사이버공간에서 나왔다.


하지만 청춘을 함께한 우리들의 우정을 한 번에 접기에는, 지난 추억이 너무 강했다. 민성이는 그냥 인스타에만 사진을 업로드하게 된 거라며, 얼른 3명이서 같이 보자며 사과했다. 그렇게 나는 해프닝이라 여기며 단톡방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서야 다른 모든 친구들과 함께 그 커플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근데 참 가관인 게, 나만 빼고 친구들은 이미 그 둘과 다 만나고 있었다. 이야기 끝에 슬쩍 흘러나온 말들 속에서, 예전 남자친구인 나는 어느새 모두에게 불편한 존재가 되어있음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세상 쿨 한 척 옛 연인과 내 친구와의 만남을 진심으로 축복했건만, 여긴 아메리카가 아니라 한국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 무리 속 불편한 존재가 되어버린 내가 너무 처량했다. 난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버렸다. 그렇게 그때가 결혼까지 골인한 그 커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게 된 날이었다. 음악 속, 영화 속에서만 알고 있던 얘기가 나한테도 일어났다. 이렇게 이 일이 끝이었다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아니었다. 우정도 함께 무너졌다.




나와 민성이 사이에 있던 또 다른 친구인 주환. 민성이와 나에게 둘 다 가장 가까운 친구로 지냈기 때문에 누구보다 중립을 잘 지키며 대화할 수 있던 그 주환이가, 이상하게 이번 사건에는 너무나도 무관심했다. 나는 평소 '진짜 친구는 진짜 힘들 때 도와주는 게 친구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살았고 그렇게 주환이에게 실천해 왔었다.


근데 주환이는 내가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봤으면서도 내 기대와 달리 너무 소극적이었다. 마치 이 상황을 전혀 못 본 것처럼. 지난 25년간의 우정을 생각해 봤을 때, 그의 행동과 반응을 보고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느낌 배신감과 분노는 정말 용암보다 뜨거웠지만, 그 당시 내 마음이 너무 아파 차마 외치지는 못했다.


네가 울며 힘들어할 때
내가 옆에서 진심으로 도와줬잖아.

근데 어떻게 나한테 말 한마디
안 할 수 있어 이 자식아!


나의 예전 인연과 내 친구가 만난다는 게 내 우정과 관계를 송두리째 흔들 줄은 몰랐다. 결국 사랑의 상처보다 인간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커서, 나는 이후 그 누구와도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난 인생에서 인간관계가 다인줄 알았는데, 그 소중하게 여기던 우정은 하루아침에 박살 났다.


인생이 너무 허무했고, 그렇게 10명의 카톡방에 있던 친구들을 하나씩 다 차단해 버렸다. 관계에 대한 내 극단적인 회의감 때문에 이제는 회사 선후배도, 대학교 친구들도, 동호회 사람까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결국 사랑, 우정, 신뢰라는 단어는 내게 한없이 두려운 단어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 후로, 나는 사람 앞에 진심을 꺼내는 걸 꽤 오랫동안 멈춰왔다.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을 꿈꿔 왔기에, 나는 왜 잘살고 있던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냐며 항상 원망하곤 했다. 근데 인간사회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걸까? 그리고 난 그것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걸까?


세상에 일어나는 일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단지 내가 그 구조를 다 읽지 못하고, 나의 Side만 바라보며 내 감정에 휩싸일 뿐. 근데, 그런 나의 무지를 놔두고 남만 증오하고 원망한들 무엇이 바뀌리오. 그래, 세상일엔 다 일어난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가은이가 아픈 후 보니, 이런 케케묵은 감정들보다 세상에는 훨씬 중요한 것들이 많았다. 내 자식이 아픈 걸 바라보는 고통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고 나서야, 내가 아프다고 했던 고통이 얼마나 별거 아닌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인생에서 상처를 받지 않는 것보다, 내가 받은 상처를 통해 좌절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아 소화한다는 게 정말 멋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하나의 여정을 소화하다 보면, 결국 또 다른 삶의 여정이 우리를 맞이해 주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너무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다.


이 관점으로 바라보면 결국 내 친구 민성이와 주환이도, 내가 몰랐던 그들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최선의 선택을 내렸을 것이다. 단지 그게 나의 기대치와 다르다고 해서, 그리고 그 결과를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도 내 감정을 최우선으로 내세워 남을 비방할 이유는 없다. 이 사건이 안 일어났으면 좋았겠지만, 이 사건을 통해 마침내 나도 배운 게 있다. 그래서 이 복잡한 감정들을 이제는 그만 보내주고 싶다.


나의 소중한 인연들과 나누었던
아름다운 추억들을 외면하지 말되

그들에게 상처받고 너무나 아팠던
내 마음도 부정하지 않은 채.


이렇게 내 마음속 트라우마가 이제라도 정리가 되니, 한때 사랑했지만 그렇게 증오했던 나의 소중했던 인연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뀐다.


그리고 가은이 아빠가 마음속에 불구덩이를 파 놓고 살면, 이게 내 딸에게 무슨 도움이 되리오. 그래서 이제라도 그들의 인생을 축복해 주며 내 마음속 응어리를 이만 놓아줘야겠다.


내가 그동안 너무 미워했지?

우리 서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
응원할게~ 건강하게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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