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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어른이 되어, 그 웃음과 온기를 세상에 나눠줄래

by 가은이 아빠


가은이 면역력이 회복될 때쯤이면 기가 막히게 다가오는 항암 치료. 아마도 환자가 쓰러지지 않고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치료 강도와 요양기간을 병원에서 최적화시켜 놓은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참 감사하고 어떻게 보면 참 잔인한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는 안다. 가은이 잘 치료될 수 있게 진행되는 감사한 일임을!


8번째 항암 치료에 앞서 병원에서 해준 말이 있다. 현재 가은이 종양은 거의 90%는 치료가 되었고, 종양의 석회화 및 미세 파종의 확장성 방지를 위해 나머지 2회의 치료를 더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매번 안구 내 주사라는 병행치료를 고려하고 있었지만 가은이는 치료 경과가 좋아 보류한다는 말은 했었도, 의사가 이렇게 수치를 직접 언급한 건 지난 7개월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참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90%나 치료가 되었으니, 가은이에게 더 이상의 약물을 투여하고 싶지 않다. 당연히 안 되겠지만, 이제 약물치료를 그만 중단하면 안 되나?

너무 배부른 소리 같다는 생각과 함께 반대 생각도 든다. 100%로 치료가 된다 해도 종양은 함께 하는데, 과연 우리 가은이는 건강을 회복하는 건가?

만약 암이 재발하게 된다면, 생각도 하기 싫지만 지금까지의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는 건가?

역시 생각에 생각이 얻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다. 그간의 경험이 있기에, 망상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전에 씩 웃으며 그만 생각을 멈췄다. 치료 경과가 좋고, 이제 약물투여 중단 시기를 검토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하다.




병원에 도착하여 8번째 항암을 시작하기 전에 가은이를 데리고 본관 정원 쪽을 다녀왔다. 항암이 시작되면 12층 병동에 갇혀 있을 모습이 안쓰러워 바람 쐬러 온 건데, 우리 가은이가 밝게 웃으며 이쁜 짓을 한다. 보조개는 없지만 활짝 웃는 모습이 어찌나 이쁜지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항암치료도 꺽지 못한 가은이의 미소>


이 아이의 천사 같은 미소를 보니, 지금 우리 가족이 그토록 바라는 '흔한 일상' 속에서 이제까지 얼마나 즐겁게 생활했는지 반문하게 된다. 만약 평생을 우리 가은이처럼 웃으며 살 수 있다면 그건 참 복 받은 일일 것 같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나도 활짝 웃으며 살아야지라며, 40대 아저씨의 아름다운 미소 찾기라는 원대한 목표도 세워본다. (타이틀은 좀 우습지만)


그렇게 우린 다시 병동으로 돌아가, 예정된 치료 스케줄을 소화했다. 그 과정은 항상 고단하지만 가은이가 다시 한번 잘 견뎌 주었다. 이번 치료도 너무 잘 견뎌주었다며 가은이를 격려해 주는 선생님의 인사에, 밝은 미소로 답하며 우리 가족의 따듯한 집으로 돌아와 다시 며칠간의 회복과정을 가졌다.




이번 치료를 받으며 희망의 끈을 발견해서 그런지 우리 부부에게 더 큰 힘이 난다. 그리고 지난 7개월의 과정 동안 우리 가족이 받았던, 수많은 응원과 격려의 순간들이 스쳐간다. 내가 정말 힘들 때 받은 도움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순간까지 올 수 있었고, 돌아보니 그 추억의 순간들은 정말 따듯했다. 그 당시에 경황이 없어 내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 그 포근했던 기운들이 모여 우리 가족을 보호하고 지탱해 준 것 같다.


가은이 확진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와 준 가족들

가정에 찾아온 위기의 순간, 회사차원에서 해 준 배려

가장의 무게를 공감하되, 피하지 말고 맞설 용기를 준 내 친구들

근데 또 한 가지 신기한 건, 지금까지 나와 전혀 연관이 없던 이 세상의 건너편에서 받은 사랑과 지지도 있었다.


소아암 확진자에게 즉각적으로 필요한 것들만 모아 신속 지원 해주는 입원키트(소아암 협회/재단)

암, 중증질환 등 진료비 부담이 큰 질환에 대해 치료비 혜택을 주는 산정특례(국민건강보험제도)

병원에서 치료받는 아이들이 견딜 수 있게 미술 치료를 해주는 병원학교

크리스마스, 어린이날에 맞춰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선물 박스


나는 이제까지 들어 본 수많은 협회와 재단이 왜 존재하는지 몰랐다. 그리고 내가 납부하는 세금은 내 월급 중 일부를 국가에서 뺏어가는 것으로 인식했고, 투병의 고충을 전혀 몰랐기에 병원학교와 선물 박스의 의미도 몰랐다.


하지만, 전혀 관련이 없는 우리에게 '암확진'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지원을 받고 보니 이 힘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생각보다 따듯한 곳이었고, 이 따듯한 세상은 그 누군가의 의자와 도움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단지 내가 무지하여 모르고 있었을 뿐.


내가 그 혜택을 받고, 그 효과를 체감하고 보니 너무나도 고맙다.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알기 때문에 이제 조금 힘을 내며 정신을 차린 나도, 이 세상에게 무엇이라도 되돌려 주고 싶다.




그날밤 우연히 가은 엄마가 내게 물어봤다.


가은이 치료 잘 받으면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 홈페이지에 메인모델로 지원해 볼까?


초반에는 자책 및 울음으로 일관하던 가은엄마도 변하고 있었다. 가은이가 잘 치료받고 건강을 회복하여 아픈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상상. 이건 7개월 전에는 절대 사고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암이 줄 수 있는 다양한 온도를 경험해보고 있는 지금, 일상에서 느낄 수 없었던 다양한 생각들이 든다.


우리 가족에게는 불행만이 닥친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불행이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을 견뎌보니 꼭 불행이라고만 얘기할 부분은 아닌 것 같다.


그 불행 안에서도 따듯함을 알게 되었고, 그 따듯함이 희망이 된 현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경험을 자산으로 바꾸면 그 불행도 행복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지난 시간들이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올 시간들이 결코 쉽지만은 않겠지만 이제는 괜찮다.


그래서 나도 이제는 이 세상에 무언가 보답하고 싶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조금씩 해 볼 용기와 의지가 나에게 생겨난다. 누군가 알아줬으면 하는 그런 욕구 말고, 아무도 모르더라도 누군가 도움이 절실한 이들에게 나의 도움이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


나에게 이런 감정과 의지가 생겨나는 게 정말 신기하다. 머릿속에 하나씩 아이디어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소아암 투병기와 우리 가족이야기를 책으로 써서 인세 전액을, 가은이 이름으로 소아암 협회에 기부하기(텀블벅을 통한 크라우드 펀딩 활용)

암확진자 모임에 참여해서, 소아암 부모님들을 위로하며 우리 가은이 치료 후기로 희망주기

훗날 가은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매주 아빠와 함께 봉사활동 하러 가서 몸이 불편한 분들 도와드리기

회사 사회공헌활동과 소아암 치료를 연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 제안하기

가은이 완치를 가정한 먼 이야기 일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아빠가 가은이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그 무엇보다 큰 선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난 가은이에게 '이 세상은 정말 따듯한 곳이구나'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병원은 고통을 주는 차가운 곳이 아닌 가은이에게 건강함을 선물해 주는 따듯한 곳이고

가은이가 경험한 너무나 큰 아픔과 고통은 가슴 아프지만, 그 경험이 곧 이 세상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이해하고 진심을 다해 도와줄 수 있는 자산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부모의 역할이 정말 중요할 것 같다. 따듯한 세상에서 뜨겁게 살아가며, 지금처럼 환하게 웃으며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 그 삶의 바운더리에 가은이가 들어갈 수 있게 아빠가 먼저 실천하며 보여주고 싶어 외쳐본다.


아빠가 먼저 따듯한 어른이 되어,
웃음과 온기를 이 세상에 나눠줄래



[P.S]

혹시 이 글을 보시고, 가은이가 이 세상을 더 따듯하게 느낄 수 있는 아이디어가 떠 오르시면 같이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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