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내 놀이터
가은이의 항암 치료를 처음으로 중단하고 드디어 다시 찾은 병원. 오늘은 안구 정밀 검사를 진행해 종양의 상태를 점검한다. 과연 오늘 우리는 어떤 결과를 듣게 되는 걸까? 검사에 앞서 가슴이 먼저 콩닥콩닥 거린다. 지난 9개월 동안, 가은이 눈에 약물이 들어가지 않은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약물 투여를 기반으로 암과의 싸움에서 잘 이겨내고 있었는데, 과연 약물의 도움 없이도 우리 가은이가 한 달 동안 잘 견뎌내고 있었을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이런 걱정과 고민은 평생동안 하겠구나! 답도 없는 고민을 최소화하는 것은 나의 숙제요, 그리고 그 숙제를 아예 시작하지도 않는 것도 모두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 쉽지는 않겠지만 앞으로의 끊임없는 변수를 대처하기 위해, 더 많은 지혜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 강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이대로 약물 투여를 중단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시 치료를 더 해야 하는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 의사 선생님의 판단 없이도 침착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 경지는 좀 도달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저 좋은 소식 있겠지를 10번 외치고 나니 좀 진정되었고, 우린 다음날 검사를 맞이했다.
휠체어에 앉아 가은이를 안고 수술방으로 들어갈 때의 묘한 느낌. 복도 안의 수많은 사람들이 가은이와 우리를 쳐다보며 보내는 의아한 눈빛들. 처음엔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이제 우리도 꽤 익숙하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압도되기보다, 정말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가은이의 수면 마취가 진행되고 보호자는 밖에서 대기하며 결과를 기다려야 하는 그 초조한 시간이 왔다. 15분 정도 지났을 무렵, 가은이의 보호자를 찾는다. 항상 그렇듯 너무나 침착한 의사 선생님을 보고 우리는 더 초조하게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가은이 이제 항암치료 중단하고
경과를 한번 지켜봐 보시죠.
우리를 짓눌렀던 무게감이 내려앉으며 묘하게 풀리는 긴장감. 가은이의 종양은 안정화 상태에 도달했고, 이 종양이 계속 유지되는지를 한 달에 한 번씩 보는 것으로 마침내 결정되었다.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순간. 그간 많이 울어서 그런지 다행히 그날은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딸이 너무 대견해서 고마웠고, 잘 견뎌낸 나와 와이프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어 주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바로 가은이의 기쁜 소식을 알렸다. 가족, 친구, 회사 선후배까지 모두 자기 일처럼 기쁘게 축하해 주었다. 9개월간 치료를 받으며 항상 치료결과를 알려줄 수 없어 답답했던 우리, 오늘만큼은 맘껏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렸다.
다음날 새벽, 알 수 없는 흥분감에 평소보다 좀 더 빨리 일어났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 이 꿈같은 순간과 함께, 일상으로 돌아갈 시점도 계획해야만 하는 현실이 같이 다가왔다.
이제 종양이 안정화되었으니 바로 회사로 복귀할까?
아니다, 이제 막 안정화 되었을 뿐 가은이 옆에는 엄마와 아빠가 계속 필요하다
근데 현실적으로 계속 휴직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무엇이 우리 가족을 위한 길일까? 우선순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내 회사와 가은엄마의 학교, 그리고 가은이 어린이집 적응이라는 3가지 요소가 같이 맞물려 있다 보니 꽤나 어려운 결정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젠 복잡한 순간이 오면 나에게도 무기가 있다.
의사결정을 최대한 단순화시킬 수 있는 나만의 경험과 인사이트. 그리고 가은이 투병과 함께 시작한 휴직기간 동안, 그간 밀린 감정 공부와 다양한 인생의 지혜를 내재화했으니 이제는 충분히 합리적으로 잘 결정할 수 있다.
가은이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적응시간을 8주로 잡고, 아빠인 내가 먼저 복직한 뒤 어린이집 적응이 마무리될 무렵 엄마도 복직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했다. 솔직히 재발이라는 것이 무섭긴 한데, 그것을 계속 가정하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보였다. 항상 가은이를 최우선 순위로 두되, 가족 전체가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한다면 그것이 곧 우리에게 최선이자 최고의 결정이 아닐까?
또한 앞으로의 일어날 변수를 막연히 걱정하기보다, 하루하루 즐겁게 지내면 그게 곧 좋은 날이니까! 그래서 이제 나는 나의 복직에 초점을 맞춰보기로 했다.
휴직 기간을 통해 조금은 성숙한 것 같은 나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이제까지 살면서 언제가 제일 즐거웠어? 그 답은 꽤나 심플하게 당장 나왔다.
실패 따윈 두려워하지 않고
그까짓 거 얼마나 아픈지
마음껏 부딪혀 봤을 때
경남 거창이라는 한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자라, 대학을 서울로 왔을 때 처음엔 참 적응하기 힘들었었다. 하지만 촌놈도 결국 도시남이 되어갔고, 군대에서 도를 닦으며 내공이 점점 쌓이자 전역과 동시에 난 내 길을 멈춤 없이 찾아 나섰다. 마치 온 세상이 내 놀이터인 것처럼!
첫 배낭여행으로 인도를 가서 그 이국적인 세상과 글로벌한 문화를 맛보며 현지인과 크로킷 하며 놀았고
영어가 배워보고 싶어 무작정 호주로 워킹할러데이를 떠나, 바디랭귀지 기반 쌸라쌸라 생존 영어를 터득했다
조금 영어가 되니 전공 공부도 영어로 해보고 싶어 스웨덴 교환학생을 지원했고, 일주일에 2일만 학교에 가고 나머지 5일은 미친 듯이 홈파티하고 Pub에 가서 놀았다
그리고 영어로 공부까지 해 봤다고 이젠 예비 경험도 할 겸, 미국인턴에 지원하여 뉴욕 타임스퀘어를 놀이터 삼고 실컷 메이저리그도 관람하고 왔다.
대한민국 시골마을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우리 가족에게 돈이 차고 넘치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는 누구보다 전폭적으로 나를 지지해 주는 따듯한 부모님과 누나가 있었다. 넘어져도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게 손을 잡아주는 나의 하나뿐인 가족.
그래서 20대의 나는 거침이 없었다. 하고 싶은 걸 찾으면 바로 도전했고, 실패하면 내 경험에서 지혜를 찾아 기꺼이 다시 도전해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덧 30대가 되자, 그간은 많은 시행착오의 문턱에서 꽤나 위축돼 있었다. 근데 그 위축되어 있던 나도, 다음 도약을 위해 필요했던 단계였음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련들이 우리 가은이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인생의 다양한 맛을 경험하며, 이 아리따운 공주님을 리딩할 수 있게 인사이트를 제공해 주는 나의 과거 자산들.
앞으로 내 경험에서 지혜는 얻되, 더 이상 쓸데없이 위축되지는 않으련다. 위기의 순간, 나보다 더 씩씩한 한 여자아이를 발견했고 그녀가 바로 내 딸이니까. 그렇게 난 나의 호기롭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제 복직하려 한다. 그리고 더 큰 물에서 놀 수 있는, 더 크고 따듯한 어른이 되기 위해 외쳐본다.
우리 모두 그런 시절이 있지 않은가?
청춘이란 이름 아래,
세상이 무섭지 않고 만만했던 시절
무서워진 세상에 내 날개가
잠깐 꺾여도 천천히 다시 펼쳐보자
그 날갯짓이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는
마법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