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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픈 순간 시작된, 어른 수업

희로애락과 함께 살아가는 삶

by 가은이 아빠

'생명 - 안구 - 시력'의 우선순위로 진행된 9개월간의 치료를 거쳐, 우린 이렇게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아직 유지 치료 및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고, 재발의 가능성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해서, 솔직히 앞으로 우리 가족에게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모르겠다.


그리고 나의 모든 생각들을 글로 다 남기지는 못하겠다. 여전히 내가 아빠로서 걱정하고 있는 부분들을 글로 썼을 때 혹시라도 그게 현실이 될까 봐 두렵다. 마치 ‘말이 씨가 된다’는 말처럼. 근데 이제는 이 감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 나는 큰 결심을 하나 했다.


내가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지만,

가은이의 삶이 ‘눈 하나에 좌지우지되지 않게’ 하겠다고!


그러려면 내가 이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야만 할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살아온 삶 속 부족했던 부분들에 대해 나 자신부터 솔직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너무 이상적인 세상만을 꿈꾸며 고집한 탓에, 너무나도 많이 돌아왔다.

그래서 내 삶에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이 쌓여 꽤나 많이 지쳐 있었다.

하지만, 내 상처와 탈진감을 느낄 때 삶의 방향을 점검하기보다

사회가 알려주는 기준에 맞추어 나를 채찍질하기 바빴고,

결국 쓰러지기 일보직전의 상태까지 와 있었다.


그래서 사실, 가은이가 태어났을 때 육아휴직을 통해 잠깐 나를 재정비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40대 남자가 육아휴직을 통해 멈춤을 선택했을 때 주위에서 바라볼 시선이 두려웠다. 마치 사회 속 낙오자로 낙인 될까 봐 나는 멈춤을 도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허우적 되다 쓰러질 수밖에 없는 아빠의 미래를, 우리 가은이가 예견했던 걸까?


아빠 자신을 한번 돌아봐요.
조금 쉬어가도 괜찮아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이쁜 공주님이 고민만 하던 아빠를 멈춰 설 수 있게 해 줬다. 그리고 비로소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심도 있게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가 하루하루 지내는 일상은 생명을 다투는 그 누군가에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고, 우리 머릿속에 항상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돈과 명예도 생명이라는 고귀한 단어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이렇게 가은이의 암 확진 후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니, 그렇게 허우적 되던 아빠도 이제는 제법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딸이 이 세상을 따뜻한 곳으로 인식하며 본인 인생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찾고, 그 인생을 즐길 수 있게 아빠가 옆에서 도와주고 싶다. 물론 무수한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가은이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옆에서 든든히 함께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9개월간 가은이가 치료받는 기간 동안, 나는 내 인생을 정말 많이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돌이켜 보니 예전에 나는 너무 복잡한 세상의 중심에서, 길을 잃은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쓸려 무작정 앞으로만 나아가려 했던 것 같다.


사회가 알려준 ‘중요한 것’과 내가 진심으로 '지키고 싶은 가치들' 사이에서 끝없는 내적갈등을 반복했고, 결국 고민의 결론을 맺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아직 준비가 되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보다, 자신의 능력보다 과다하게 그 역할들을 수행하려 했다. 그것도 너무나 잘하려고만 하면서.


가장, 남편, 아빠, 아들, 장남, 장손, 사위, 친구, 동생, 팀원, 선배, 후배, 예비 주재원, 대출자, 청렴 시민


어른이 되며 마구마구 붙어진 위 이름들을 온전히 다 소화하기에는 솔직히 내 능력으로 벅찼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이름 사이에서 나는 괜찮은 척하며 겨우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역할들의 진짜 의미도 모른 채 처리하기 바쁜 시간 속에 진짜 '나'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 당시 '무작정 버티며 살다 보면 해결되겠지'라며 나를 다독였던 마음들은, 그 순간을 해결할 자신이 없어 회피했던 기술이었음을 이제 안다.


내가 어렸을 때 받았던 교육과 현재와는 엄청난 가치의 간극들이 있다. 어렸을 때는 유교사상에 입각해 예의가 중요했고 남아선호사상이 지배했다. 지금은 다양성을 중시하며 각자의 개성이 중요하며, 아들 가진 부모가 딸을 부러워하는 시대다.


그뿐이랴, 구슬치기 하며 놀던 나의 초등학교 시절과 핸드폰과 패드가 일상이 된 지금의 초등학교 시절은 비교할 수가 없다. 과거 내가 살아온 속도와 현재 내가 살아야 하는 속도의 엄청난 차이에 적응하면서도, 내 삶의 의미를 찾아내야 했지만 결국 난 이 세상의 맹목적인 소리들에만 귀를 기울였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무조건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좋은 직장에 입사해서 좋은 배우자 만나 아기 놓고 잘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사회가 정해놓은 행복을 쫓아 미친 듯이 경쟁하며 살아온 이들의 아픔과 고뇌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특히,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30~40대들이 그 누구보다 더 혼란스럽고, 그만큼 더 절박하게 행복을 찾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항상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점점 지치고 속상한 이 세상의 수많은 아빠, 엄마,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가은이 투병기를 통해 얘기해 주고 싶다.


생명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너무 작아지는 것들에 우리가 맹목적으로 목메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혹시 당신이 막 부모가 되었다면, 부모와 아이가 함께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는 잠깐 자신을 돌아보기를 더 추천하고 싶다.


삶에서 멈춤이 단지 우리의 삶을 접고 마냥 쉰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너무나 바쁘게 살아온 우리에게 각자가 살아온 방향과 의미를 이해하고,
주체적인 자신의 삶을 해석할 수도 있는 기회 같아요.

솔직히, 전 진급과 커리어의 욕심 때문에 멈출 수는 없었어요. 회사에서 육아휴직을 쓰면, 커리어를 포기한다라고 느껴졌거든요.

근데 가은이가 아프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휴직을 하고 나니 보이는 게 있더라고요.

잠시 멈춰지면 모든 걸 잃어버릴 것 같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삶에서 소중한 것도 가르쳐 주었어요.

그래서, 앞만 보며 달려가며 너무나 힘들어했던 제 자신에게 미안하고
그 시절이 한편으로는 후회가 돼요.

너무 큰 방황을 너무나 오래 하고 있었기에..
결국 전 어떻게든 먼저 나를 돌아보고 삶의 방향을 잡아야만 했어야 했습니다.

돌이켜 보니 더 큰 진전을 위해 미리 용기 내지 못 했던 게 많이 후회됩니다.
하지만 이 시련을 통해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너무 다행입니다.

당신에게
'당신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혹시라도 지금 당신이 멈추고 싶은 순간을 살아가는 중이라면, 잘 한번 고민해 보세요.

그 방법이 꼭 저처럼 휴직일 필요는 없겠지요. 다 각자의 상황 속에 최선의 방법들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온전히 당신에게 연결된 역할과 의무감을 끊고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방황하고 있는 당신에게 작은 쉼이자 용기가 되길,
그리고 당신도 그 휴식을 통해 얼른 웃으며 다시 출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제 휴직을 끝내고 마침내 일상으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시련을 통해 얻은 깨달음과 지혜를 통해, 우리 가족을 보살피고 그리고 저 자신도 보살필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에서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걸 알아내고, 그 삶의 의미를 부여하며 지키는 일. 이제는 방황했던 한 청년이 비로소 어른이 되어, 제 삶을 즐기며 우리 가족에게 그 에너지를 전달해 보려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하루를 감사히 여기며, 마음껏 웃으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같이 응원하겠습니다!


우리 가은이와 저희 가족이 더 힘낼 수 있게 따듯하게 응원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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