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 말보다, 미워한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샌드백을 무자비하게 차던 형준이, 한 템포를 쉬며 말했다.
“하여튼… 정예린, 또 입 못 다물고 이상한 소리 했구먼.
여길 찾아오다니… 참나.”
정연은 숨을 고르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화났어? 진짜 진짜… 많이 난 거 같은데…”
형준은 샌드백에서 고개만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너한텐 안 화나. 진심으로. 그러니까 신경 꺼도 돼.
최수빈이랑… 잘 지내달라고 하러 온 거면 돌아가.
정말 다 잊고 용서하라고 하러 온 거면… 마찬가지로 돌아가.
그건 절대 안 되니까. 너, 나 잘 알잖아.”
그리고 다시, 샌드백을 후려친다.
주먹과 발이 번갈아가며 박힌다. 속도는 더 빨라졌다.
정연은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쉰다.
그리고 다시 말을 꺼낸다.
“그냥… 그 소원, 못 들어준다고 하지 그랬어…
이렇게까지 차가워질 거면… 그냥 안 들어주는 게 나았잖아…”
형준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야. 첫 소원인데, 내가 무효로 할 순 없잖아.
그래서 잊으려고 노력했어. 근데 솔직히… 다 못 잊었어.
하지만 앞으로 잘 지낼 생각은 없어. 난 쟤가 싫어. 그게 이유야.”
형준의 발차기에 나뭇가지가 부르르 떨렸다.
“학교는… 나한텐 너랑 웃고 장난치는 공간이었는데,
그 애가 자꾸 끼어들어. 성질나게 만들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서 더 화나는 거야.”
형준은 샌드백을 멈추고,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멘다.
뒤도 안 보고 말한다.
“집에 가자. 너 데려다주고, 나 체육관 가야 돼.
지금 열받은 건 맞는데, 너한텐 화난 거 전혀 없어. 걱정 마.”
집으로 가는 길.
정연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쑥 내뱉었다.
“변했어…
예전엔 나한텐 절대 이렇게 안 했는데…
아무리 화가 나도… 항상 나한텐 따뜻했는데… 변했어, 너.”
형준은 바로 받아친다.
“내가 변한 게 아니라, 상황이 변한 거지.
내 성격 알면서…
계속 그러는 너도 이제 좀… 미워.”
그 말에 정연의 눈이 흔들렸다.
눈물이 찼다.
그리고 정연은 소리쳤다.
“맨날 이쁘다, 공주님 어쩌고 하더니! 이제는 밉다고?
최소한 ‘이러이러해서 속상해’ 정도는 말해줄 수 있잖아!!
왜 이렇게 차갑게 말해서, 속상하게 만들어!?”
형준은 흔들리지 않았다.
되려 더 차분한 목소리였다.
“소원 들어준 건 좋아. 괜찮아.
근데 내가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같이 마주 앉아서 밥 먹게 만든 거.
그건 네가 허락한 거잖아.
그게 너무 화가 나.
그리고 네가… 내 마음을 몰라준 거 같아서… 그게 제일 서운해.”
형준은 고개를 돌린다.
“말했지? 됐지? 이제 앞으로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정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섰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말라갔다.
“… 너무해… 진짜… 정말… 변했어.
뭐가… 널 이렇게 만든 거야…”
그 순간.
학교 교문 앞.
지수, 태연, 민지, 그리고 수빈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수빈이 제일 먼저 달려온다.
“정연아!! 왜 울어!! 너희 둘이 싸운 거야!?”
수빈은 형준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친다.
“별이니 뭐니 하더니, 결국 펑펑 울리는 나쁜 놈!!”
그 순간이었다.
형준의 눈이 한 번 뒤집힌다.
정연이 숨을 멈췄다.
지수가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형준은,
세상에서 가장 살벌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야. 선 지켜라.
한 번만 더 손가락질하거나 눈앞에서 얼쩡거리면,
관절 하나하나 다 분질러서 이나래처럼 반 병신 만들어버릴 거야. 내 말이 장난 같냐? 한 번 더 해봐.
씨발… 진짜 학교를 옮겨야 하나 싶다.
엿같아서 못 다니겠네.”
형준은 그대로 교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정연은 무너진 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수가 따라가려는 찰나,
예린이 나타나 지수의 팔을 잡았다.
“지수. 너 착한 거 알아.
근데 이번엔… 내가 나설 차례인 것 같아.”
예린은 조용히 말했다.
“지금 저 상태에서, 형준이랑 말 되는 사람은…
나뿐이잖아.”
지수는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예린은 마지막으로 수빈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너. 진짜 적당히 해.
방금… 너 진짜 죽을 뻔한 거야.
눈 돌아가려다 멈춘 거 보니까…
말이랑 행동은 저래도,
정연이… 진짜 많이 좋아하긴 하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