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자주 찾는 구룡산 산책길.
예전에는 나무 사이사이에 반짝이며 햇빛을 받던 거미줄이 눈에 띄곤 했는데, 올해는 이상하게도 그런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침 햇살에 무지개처럼 빛나던 거미줄이 사라진 듯하다. 기온이 높아져서일까, 아니면 내가 산책하는 시간대가 달라진 탓일까.
그러다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등산용 지팡이로 장난 삼아 거미줄을 툭 치며, 그 속에서 놀라 달아나던 거미를 무심히 바라보던 순간. 그땐 별생각 없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괜히 미안하다. 거미에게 거미줄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생존을 건 삶의 무대였으니까.
곤충이 아닌, 절지동물 거미
우리는 습관적으로 거미를 곤충이라 부른다. 하지만 사실 거미는 곤충이 아니다. 곤충은 몸이 머리·가슴·배 세 부분으로 나뉘고 다리가 여섯 개인 반면, 거미는 머리와 배 두 부분, 그리고 여덟 개의 다리를 지닌다. 계통적으로는 곤충보다 가재나 게에 더 가까운 친척이다.
지구의 오래된 생존자
거미의 역사는 상상보다 오래되었다. 화석 기록에 따르면 거미는 약 3억 8천만 년 전, 데본기 말기에 처음 지구에 등장했다. 공룡보다도 오래 산 존재인 셈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거미 종은 5만 종 이상, 실제로는 10만 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구 어딜 가도, 극지방을 제외하고는 거미가 산다. 개체수로만 보면 수 수 조 마리 이상으로 추산된다.
개미와 비교하면 어떨까? 개미는 약 1만 4천 종, 총 개체수는 1경 마리 이상으로 추정된다.
개체수는 개미가 앞서지만, 거미 역시 그에 못지않은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개미가 ‘군집의 힘’으로 살아남았다면, 거미는 철저히 ‘고독한 전략’으로 지구를 지배해 왔다.
거미의 식성과 생존 전략
거미는 기본적으로 육식성 포식자다. 모기, 파리, 나방 같은 곤충을 주 먹이로 삼는다. 입 구조상 단단한 식물 조직을 씹을 수 없기 때문에, 먹잇감의 체액을 녹여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영양을 섭취한다.
그런데 최근 연구는 흥미로운 예외를 보여준다.
중남미에서 발견된 **점프거미의 한 종(Bagheera kiplingi)**은 아카시아 나무에서 제공하는 꽃꿀과 영양 조직을 주로 먹으며 살아간다. 또 일부 거미는 꽃가루나 꿀을 보조적인 먹이로 섭취하는 경우도 있다.
즉, 거미는 본질적으로는 육식성이지만, 일부 종은 기회적으로 식물성 먹이도 먹는 다채로운 생존 방식을 지녔다.
줄을 치는 거미, 줄 없는 거미
사람들은 흔히 거미 하면 ‘그물’을 떠올린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체 거미의 절반 이상은 거미줄 없이 사냥한다.
- 그물 거미(호랑거미, 집거미 등): 정교한 원형 그물을 치고 매복.
- 점프거미: 카메라 같은 시력을 가진 거미. 먹이를 발견하면 안전줄 하나만 연결해 두고 강력한 뒷다리로 뛰 어올라 덮친다.
- 늑대거미: 땅 위를 달리며 먹이를 추적. 빠른 다리와 민첩함이 무기다.
- 꽃거미(게거미): 꽃잎 색에 맞춰 몸 색을 바꾸고, 벌이나 나비를 기습.
- 타란툴라: 땅굴 속에 숨어 있다가 먹이가 지나가면 달려 나와 덮친다.
( 타란 툴라 )
줄 없는 사냥꾼들도 거미줄을 아예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동할 때 안전줄을 치거나, 알을 보호하는 알주머니를 만들거나, 은신처를 보강할 때는 꼭 거미줄을 활용한다.
다만 사냥에는 줄을 거의 쓰지 않는 것이다.
번식과 알주머니
거미는 한 번에 수십 개에서 수천 개의 알을 낳는다. 알은 거미줄로 싸여 알주머니(egg sac) 속에서 보호된다. 어떤 암컷은 알주머니를 둥지 속에 숨기고 떠나기도 하지만, 늑대거미처럼 알주머니를 배에 달고 다니며 끝까지 지키는 종도 있다.
( 알주머니 달고 다니는 거미 )
부화한 새끼 거미들은 알주머니 안에서 잠시 머물다가 밖으로 나온다. 일부는 어미 등에 올라타 보호받
기도 하고, 많은 종은 바람을 타고 흩어져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수백, 수천 개의 알 중 성체까지 살아남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거미는 짧은 생애 속에서 “많이 낳고, 일부만 살아남는” 다산 전략을 택한 것이다.
( 부화한 거미 새끼들 )
겨울의 생존법
거미는 대부분 겨울을 넘기지 못한다.
- 많은 종은 가을에 번식한 뒤 죽고, 알주머니가 겨울을 난다. 이 알들이 이듬해 봄에 부화해 새로운 세대를 이룬다.
- 일부 종은 성체로 겨울을 나기도 한다. 집거미는 사람들의 집안에서 따뜻하게 지내고, 늑대거미나 땅거미는 낙엽 밑이나 땅굴 속에서 버틴다.
- 그러나 대체로 거미는 겨울 전 사망 → 알이 이어받는 전략을 따른다.
짧은 수명 속에서 거미는 계절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종족을 이어가는 본능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고독의 철학
거미를 바라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흔히 고독을 외로움으로만 여기지만, 거미에게 고독은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고, 전략이
며, 자유다.
개미처럼 집단의 힘을 빌려 살아가는 것도 하나의 길이지만, 거미처럼 혼자서도 끝내 살아남는 길도 있다. 고독 속에서 거미는 자유롭고, 치열하고, 강하다.
아마도 우리가 배워야 할 건, 바로 이 고독의 지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