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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청계산 산행

by 신피질

(몇 년 전 쓴 글인데 연재에 포함하려고, 다시 올립니다.)


침묵을 찾으러 청계산을 왔다. 방학이라 강의가 없어 회사에 가는 월요일과 수요일을 제외한 대부분은 청계산과 관악산을 찾는다. 요즘은 관악산을 자주 가는 편이지만 오늘은 청계산이다.

산행 후 서초동 쪽으로 진입하는 원터골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순두부나 비빔밥을 먹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등산로 입구에 들어오자 가는 눈이 날린다. 주말 청계산은 등산객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지만, 평일 청계산은 사람이 많지 않다. 그래서 주말에는 그것을 피해 한적한 관악산 능선을 탄다.

오늘은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 등산객이 많지 않아 침묵 찾기에 적합한 분위기다.

등산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청량한 공기가 내 몸을 통과한다. 마치 반도체 공장의 클린룸처럼 밀가루 같은 흰 눈이 청량한 바람을 타고 내 몸을 깨끗하게 샤워시키며 몸속에 있는 기운을 정화시킨다.

윈터골 등산로는 한동안 계곡과 같이 이어진다. 계곡은 얼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얼음 밑에서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또렷이 들린다.

침묵의 정의를 새롭게 새겨서인지,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시원한 물이 내 귀를 통과해서 심장에 들어오고 또 혈관을 통해 내 몸에 구석구석 전달된 듯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무슨 대화를 저렇게 재미있게 하는지 리듬과 박자와 톤을 세밀하게 들어보고, 하얀 눈이 떨어지는 소리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서 이명 소리가 들린다.

한동안 잊고 있던 날카로운 기계음 같은 이명 소리가 들린다. 몇 년 전 이명을 고치려고 이비인후과에서 검사하고 치료를 받았으나 별 소용없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다행히 무시하고 사니 이명이 별로 심하지 않아 이제는 아주 조용할 때 아니면 이명을 의식하지 못한다.

신의 음성과 같은 완벽한 침묵을 찾고 있는데, 하필이면 이명이 들린다.

하지만, 생각을 바꿨다. ‘이명은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긍정의 시그널이다’라고! 생각을 바꾸니 이명에 대한 관찰도 함께 시작된다.

이명은 우리 몸이 기계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명이란 신이 만든 인간 기계의 작동 소리가 침묵의 순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아직은 건재하다는 시그널 같다.

약수터 쉼터에 도달하자, 밀가루처럼 가늘게 내리는 눈이 나무줄기와 가지에 흰 페인트를 덧칠한 것처럼 하얗게 옷을 입힌다. 등산로 계단과 바람에 날려 수북이 쌓여 있는 갈참나무 낙엽 위에 밀가루를 쏟은 듯 흰 눈이 자리를 잡았다.




한낮인데도 나풀거리는 흰 눈에 가려져 해는 보름달처럼 희미하게 빛난다. 눈이 해를 보름달로 만들고, 길고 긴 하늘 여행에서 녹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 하늘의 조화가 남아있는 겨울의 땅 찌꺼기를 덮고 침묵으로 가득 찬 신의 세계를 만든다.

청계산 정상 매봉으로 가는 등산로는 나무 계단의 연속이다.

나는 그 계단을 조금 빠르게 오른다. 두 계단을 한 번에 오르기도 하고, 가끔 뛰어오른다. 경사가 급한 계단을 오를 때면 숨을 관찰하며 고르게 쉬려고 호흡 통제를 시도한다.


또 정상 부근에 있는 돌문 바위를 돌면서 소원을 빈다. 청계산 기를 받아 가라고 적힌 안내문 뒤에 성인 한 명이 통과할 정도의 작은 바위 문이 있고, 그 바위 문을 세 바퀴 돌면서 소원을 빈다.

나도 꼭 세 바퀴를 돌며 간절히 소원을 빈다. 때때로 소원을 비는 재미로 청계산을 오르기도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청계산 남쪽 이수봉으로 갔으나, 소원을 비는 쏠쏠한 재미를 안 뒤부터는 이 코스를 자주 오는 편이다.

나만의 방식으로 소원을 빈다.

먼저 돌문 바위 오기 전까지 절대로 소원을 미리 생각하지 않는다. 돌문 바위 돌기 직전 하늘을 향해 경건하게 기도한다.

하늘이여! 나는 소원을 생각하지 않을 테니, 직접 내게 소원을 내려주세요라고 기도한 후 세 개의 소원을 건진다. 한 번 돌 때 하나씩 건진다. 소원을 안 주면 천천히 돌아서라도 기어이 소원을 받아낸다. 물론 내가 생각한 것이겠지만 마치 하늘이 나에게 준 것 같다

.

최근 하늘이 준 돌문 바위 소원을 적어 본다. 소원이라고 하는 데, 직위나 돈, 명예는 별로 없으니 세간에서 말하는 출세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태양이 내 온몸에 스며들어 따뜻한 마음을 지니게 하소서.

-인생의 어떤 순간에도 도전과 모험을 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하소서.

-하늘과 바다와 같은 넓고 깊은 존재 의식이 생각과 감정과 행위를 지켜보게 하소서.

소원을 받은 후 다시 매봉을 향하여 몇 발자국을 뗀 후 나는 눈앞의 아름다운 풍광에 한동안 호흡을 멈추고 침묵의 상태에서 신의 붓질 하나하나에 세심하게 눈길을 줬다.

검은 소나무, 하얗게 눈이 덮인 타원형 암석, 가늘게 떨어지는 눈의 풍경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온화한 행복감이 스며오고, 단순한 흑백 풍경이 화려한 색깔보다 더 깊은 내면의 울림을 준다.

청계산에서 최고의 조망 장소는 매 바위이다.

나는 청계산에 올 때마다 매 바위에서 멀리 서울과 인근 성남을 조망하고 간다. 또 매 바위 바로 옆, 청계산을 온 가지로 덮어 버릴 기세로 솔가지를 넓게 펼치고 솔잎이 무성하게 우거진 배짱 좋은 소나무를 진지하게 바라본다.

매봉 정상 석 뒤에는 유치환의 시가 있다. 단순함에도 울림을 주는 좋은 시다. ‘푸른 하늘이 있어 행복하다.’ 누가 그랬던가? 단순함이 최고다.


나무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살아 있는 나무도 상처투성이다. 상처가 없는 나무는 없을 정도로 벼락에 맞았거나, 병에 걸렸거나, 바람에 찢겨 나간 흔적들로 누더기가 된 나무가 대부분이다. 그 상처를 가까이 들여다보니 애처로움이 인다.


하산 길은 수행 길이다. 생각을 멈추지 않고 딴 데 정신 팔리면 사고가 날 수 있다. 만약 천천히 멈추듯 내려오면 올라올 때 열린 땀구멍으로 자연의 신비를 맘껏 볼 수 있다. 자연을 하나하나 관찰하면 시선 가는 곳마다 아름답고 경이롭다.

하얗게 떨어지는 눈 꽃가루, 아무리 봐도 늠름하고 멋진 금강송, 겨울에 숨어버린 곤충을 찾느라 분주한 딱따구리 나무 쪼는 소리, 매서운 공기가 도는 겨울 하늘을 자유롭게 타며 시끄럽게 우는 까마귀, 소복이 눈이 쌓인 경사진 바위.

몸 세포가 활발하게 활동하니 모든 감각 기관이 제 기능을 완벽하게 작동하여 자연과 소통을 원활하게 한다. 소통이 잘되면 자아가 사라지며 자연에 몰입된다. 내가 자연이 된다.

자아는 생각에 안주하고 세포는 자연과 활동을 찾는다. 자아를 따르면 망상의 노예가 되어, 갈수록 불행한 상태가 되지만 세포가 좋아하는 자연과 함께하는 활동은 행복의 세계를 연다. 자아의 재잘거림이 없는 자연과 교감은 침묵의 세계, 행복의 세계이다.

오늘 청계산 산행에서 찾던 침묵은 설악산 산행에서 던졌던 화두와 연결된다.

설악산 산행에서 화두로 던졌던 ‘나도 없고 세상도 없다.’라는 해답은 아무나 찾을 수 없다. 그것은 깨달은 사람이 갈 수 있는 세계이다.

자아를 무너뜨린 사람, 나라는 인식을 산산이 깨버린 경지에 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세계인 듯하다. 온전히 침묵할 수 있는 사람, 자아의 소음을 철저히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다.

하지만, 나같이 보통 사람도 자연에서 때때로 이 세계를 넘나 든다.

침묵은 수동적 상태가 아닌 적극적 기도이다. 완벽한 침묵은 자아를 멸하고 신의 세계로 들어선다. 그래서 인간이 인식하는 세상이 사라지고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가장 적극적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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