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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 사라진 직장, 왜 계속 다녀야 하지?

3-2. 배움이 멈춘 순간, 일은 “존버”가 된다

by 일이사구

또다시, 아침 7시. 첫 알람이 울린다.


5분 간격으로 다시 울리지만, 눈꺼풀은 납덩이처럼 무겁다.


단추구멍만큼 뜬 눈은 금세 닫힌다.


그냥 이 하루가 시작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강한 커피 한 잔으로 정신을 깨우고,

밤사이 비벼진 머리를 감고

고양이처럼 정밀하게 세수를 한다.


같은 버스, 같은 지하철, 같은 자리.

엘리베이터는 늘 만원이다.


<출근하는 모습, 진짜 저 아니에요- AI 생성 이미지>


문이 열리면, 초등학생이 PC방 들어가듯

물밀듯이 사무실로 들어간다.


“좋은 아침입니다.”


누군가 건넨 말에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답한다.


그런데 속으로는 묻는다.


뭐가 좋은 아침인가?


진짜 좋은 아침이냐고, 농담처럼 물어본 적 있다.

그 선배는 잠시 웃더니 말했다.


“아니.”


거짓말로 시작되는 하루.

그도 자신만의 루틴을 타고 있었다.


모니터를 켜면, 늘 하던 업무가 기다리고 있다.

회의 내용도, 메일 제목도, 심지어 점심 메뉴마저 비슷하다.

하루가 통째로 붙여 넣기된 느낌.


그 순간, 스치듯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이 회사에서 뭘 배우고 있지?”


회사는 돈을 버는 곳이지만,

동시에 배우는 곳이기도 하다.

배움이 멈추면 성장도 멈춘다.


언젠가부터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는 감각이 사라졌다.

공장의 부속품처럼 제자리에 머무는 느낌.


특히,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

그 느낌은 확신으로 굳어진다.


퇴근 5분 전, 다리는 예열을 시작한다.

속으로는 나만의 카운트다운을 센다.


정각이 되면, 날쌘 고양이처럼

은밀하고 기민하게 움직인다.


끝내 오지 않는 엘리베이터.

“도대체 누가 이렇게 설계한 거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강한 날에는 계단을 찾는다.

몇 층이든 상관없다.


심지어 계단을 내려가다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의지와는 상관없이 끝까지 질주한 적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멈출 수 없는 해방감을 맛봤다.


움직이는 그 순간, 나는 자유를 느낀다.

별다른 약속이 없어도,

퇴근이라는 행위 자체가 즐겁다.


금요일과 연휴 전날엔 그 기쁨이 절정에 이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세상은 아름답고, 삶은 즐겁다.


그러나, 출근 전날 밤이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내일은 또, '좋은 아침입니다' 로 하루가 시작될 테니까…


예전에 과장이었을 때,

반짝이던 눈빛과 열정이 넘치는 신입사원을 배속받았다.


1년쯤 지나, 그는 피곤한 눈으로 물었다.

“선배님… 이렇게 사는 길밖에는 없는 걸까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나도 몰라. 나도 이렇게 살고 있으니까…”


익숙해진다는 건, 지쳐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배운다는 건 단순히 기술이나 정보를 익히는 게 아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는 걸 느끼는 일이다.


예전엔 고객의 욕구를 읽지 못했지만,

본질을 보려 노력하자 설득에 많은 말이 필요 없어졌다.

판단도 빨라졌다.


그때 느꼈다.

“조금은 성장했구나.”


반면 반복되는 일은 많고, 새로운 시도는 없다.

실수는 줄었지만, 기대도 줄었다.

성과는 나쁘지 않지만, 피드백은 없다.

하루하루가 복사된 것처럼 흘러간다.


이 조직에서 더는 배울 게 없다고 느끼는 순간,

남아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일은, 나를 확장하는 경험이어야 한다.

"돈 벌려고 일하는 거지"라는 말은 절반만 맞다.


정말 그렇다면,

이미 돈이 많은 사람들은 왜 계속 일할까?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면,

당신의 일은 단지 생계일 뿐이다.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는 “존버”만 남는다.

그게 승리처럼 보일지 몰라도,

어쩌면 체념에 붙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체념이 일상이 된 어느 날,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도대체 나는 왜 아직 여기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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