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수박장수, 우주박사가 되다: 믿기 힘든 실화
충북 영동의 수박밭에서 모스크바까지
1992년 여름, 충북 영동군의 한 수박밭.
22살 청년 공근식은 새벽부터 밭에 나와 있었다. 이슬에 젖은 수박잎들을 헤치며 열매를 확인했다. 올해는 작황이 좋았다. 특히 밭 한가운데 자리 잡은 녀석은 유난히 컸다.
"이거 상 받겠는데?"
혼잣말을 하며 수박을 들어 올렸다. 묵직한 무게가 손에 전해졌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하고 수박 농사를 시작한 지 5년째. 이제는 제법 농사꾼 티가 났다.
그해 가을, 충북 농업기술원에서 주최한 품평회에서 그의 수박은 우수상을 받았다. 지역 농업 잡지 『충북농업』에 사진도 실렸다. 커다란 수박을 들고 환하게 웃는 청년. 구릿빛 피부와 튼튼한 체격이 건강미를 자랑했다.
"근식이가 장하네. 이 나이에 벌써 수박 명인이야."
동네 어른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하지만 청년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던 소년
공근식은 어릴 때부터 수학과 물리를 좋아했다.
중학교 때 수학 선생님은 "너는 이과 쪽으로 가면 잘할 것 같다"고 했다. 물리 시간에 배운 뉴턴의 운동 법칙이나 에너지 보존 법칙 같은 개념들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다른 과목들이 문제였다. 국어, 영어, 사회... 암기 과목들은 도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성적표는 수학 물리만 90점대, 나머지는 간신히 낙제를 면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학을 가겠나?"
담임 선생님의 한숨 섞인 말에 부모님도 걱정이 많았다. 결국 고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자퇴를 결정했다.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농사도 훌륭한 일이야."
아버지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특히 밤하늘의 별을 볼 때면 묘한 그리움이 일었다. 저 별들은 어떻게 빛나는 걸까? 우주는 얼마나 넓을까?
28세, 운명의 순간
1998년 봄, 대전역.
수박 모종을 사러 대전에 갔다가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 대합실 게시판에 붙은 전단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전 시민 야간학교 개강 안내」
중·고등학교 과정
수업료 무료
저녁 7시~10시
멍하니 전단지를 보다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집에 가려면 6시 기차를 타야 했다. 하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가보기만 하자.'
주소를 보니 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배낭을 메고 야간학교를 찾아갔다.
낡은 건물 2층. '희망을 심는 교실'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떻게 오셨어요?"
사무실에서 나온 중년 여성이 물었다.
"저... 공부하고 싶어서요."
"몇 살이신데요?"
"스물여덟입니다."
"아, 그럼 고등학교 과정 들으시면 되겠네요. 오늘부터 바로 시작하실 수 있어요."
그렇게 충동적으로 등록을 했다. 그날 저녁, 10년 만에 다시 교실에 앉았다. 칠판에 쓰인 수학 공식들이 반갑게 느껴졌다.
기차 타고 다닌 3년
매일이 전쟁이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수박밭으로 갔다. 물 주고, 잡초 뽑고, 병충해 확인하고. 오후 4시쯤 일을 마치면 급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또 대전 가니?"
어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공부하러요."
"너무 무리하지 마라."
집에서 대전까지는 기차로 1시간. 졸면서 가다가 역에 도착하면 뛰어서 학교로 갔다. 7시 수업에 겨우 맞춰 도착하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수업은 3시간. 수학, 물리, 화학을 집중적으로 들었다. 특히 물리 시간이 즐거웠다.
"오늘은 상대성 이론에 대해 배워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칠판에 E=mc²을 쓰자 가슴이 뛰었다.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 빛의 속도... 어릴 때 과학책에서 읽었던 내용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밤 10시 수업이 끝나면 다시 역으로 달렸다. 막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자정이 가까웠다. 피곤했지만 행복했다. 10년 만에 다시 찾은 공부가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다.
수능, 그리고 좌절
3년 후인 2001년,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했다.
시험장은 31살 농부에게는 낯선 공간이었다. 주변은 모두 10대 학생들. 교복을 입은 그들 사이에서 작업복 차림의 자신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수학과 과학 영역 문제를 풀 때는 자신감이 있었다. 특히 물리 문제들은 술술 풀렸다.
결과는 반반이었다. 수학과 과학은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언어와 외국어 영역이 발목을 잡았다. 원하는 대학의 물리학과는 갈 수 없는 성적이었다.
"다시 해보지 뭐."
스스로를 위로하며 다음 해를 준비했다. 하지만 농사와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수박은 봄부터 가을까지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다. 농번기에는 공부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결국 대학 진학은 포기했다. 다시 수박밭으로 돌아갔다.
평범한 농부의 10년
2001년부터 2010년까지, 공근식은 평범한 수박 농부로 살았다.
충북 영동은 수박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많아 당도 높은 수박이 생산된다. 공근식의 수박도 품질을 인정받아 서울 가락시장에서 좋은 값을 받았다.
"공근식 수박"이라는 브랜드도 만들었다. 직거래 고객들이 늘어나면서 수입도 안정적이었다. 35살에는 결혼도 했다. 아내는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당신 책 읽는 거 좋아하죠? 농사일 끝나면 편하게 읽어요."
아내의 배려로 저녁에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주로 과학 교양서적들이었다. 『코스모스』, 『엘러건트 유니버스』, 『평행우주』 같은 책들을 읽으며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달랬다.
가끔 깊은 밤, 밭에 나가 별을 보곤 했다. 시골의 밤하늘은 도시와는 달랐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저 별빛이 여기까지 오는 데 몇 년이 걸렸을까?"
혼잣말을 하며 우주의 광대함에 압도되곤 했다.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
운명의 날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2010년 9월 2일,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충북 영동도 직격탄을 맞았다. 하룻밤 사이에 20년간 가꾼 수박밭이 초토화됐다.
다음날 아침, 공근식은 망연자실하여 밭에 서 있었다. 비닐하우스는 찢어지고, 수박들은 물에 잠기거나 바람에 떨어져 터져 있었다.
"이게 끝인가..."
40살. 인생의 절반을 수박 농사에 바쳤는데, 하룻밤에 모든 게 사라졌다.
폐허가 된 밭에 주저앉아 한참을 있었다. 그때 문득 10년 전 수능 시험장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리 문제를 풀며 느꼈던 그 희열. 우주의 비밀을 푸는 듯한 그 전율.
'이제라도 늦지 않았을까?'
미친 생각이었다. 40살에 다시 공부를? 그것도 물리학을?
하지만 태풍이 모든 것을 쓸어간 지금, 잃을 것도 없었다.
한국에서 러시아로
복구할 엄두가 나지 않는 밭을 보며 결심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40대가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한국 대학들은 나이 제한이나 입학 조건이 까다로웠다.
그러다가 흥미로운 정보를 발견했다. 러시아의 일부 대학들은 나이 제한이 없고, 입학시험만 통과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모스크바 물리기술원(MIPT)이 눈에 들어왔다. 구소련 시절 설립된 이 대학은 노벨상 수상자를 10명 이상 배출한 명문이었다. 무엇보다 순수 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유명했다.
"러시아로 가보는 게 어때?"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러시아요? 말도 안 통하는데?"
"배우면 되지. 물리학 공식은 세계 공통이잖아."
아내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행복한 게 제일 중요해요. 해보세요."
2012년, 42살의 나이에 공근식은 러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모스크바의 첫 겨울
모스크바 공항에 내렸을 때, 10월인데도 칼바람이 불었다.
미리 연락해둔 한인 민박집을 찾아갔다. 좁은 방 하나를 얻어 짐을 풀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모스크바의 회색빛 건물들이 낯설었다.
다음날부터 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러시아어는 알파벳부터 달랐다. 키릴 문자를 익히는 데만 한 달이 걸렸다.
"Здравствуйте(즈드라스트부이쩨, 안녕하세요)."
혀가 꼬이는 러시아어 발음을 하루 종일 연습했다.
6개월 후, 기초 회화가 가능해졌을 때 MIPT 입학시험에 도전했다. 수학과 물리 시험이었다. 언어는 서툴렀지만 수식은 자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준비가 부족했다.
"역시 무리였나..."
민박집 방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며 좌절했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재도전, 그리고 합격
1년을 더 준비했다.
러시아어 실력을 높이고, 수학과 물리를 러시아 교재로 다시 공부했다. 모스크바 시립도서관에서 하루 10시간씩 공부했다.
도서관 사서 마리나는 처음에는 이상하게 봤다.
"아저씨는 왜 매일 여기 와요?"
"공부하려고요. 대학 가고 싶어서."
"몇 살인데요?"
"마흔셋이요."
마리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곧 미소를 지었다.
"우와, 대단해요. 응원할게요!"
2013년, 두 번째 도전에서 합격했다.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 눈물이 났다. 23년 만에 다시 대학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MIPT에서의 첫 학기
2013년 9월, 첫 수업.
계단식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강의실에는 대부분 18~20살 학생들이었다. 그들에게 43살 동양인 아저씨는 신기한 존재였다.
첫 수업은 일반물리학이었다. 교수가 러시아어로 빠르게 설명했다.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필기도 제대로 못했다.
"이거 녹음해도 될까?"
옆자리 학생에게 물었다.
"당연하죠. 근데 아저씨는... 학생이에요?"
"응. 1학년이야."
학생들은 놀라워하면서도 친절했다. 노트를 빌려주고, 모르는 것을 물으면 설명해줬다.
하지만 첫 학기는 재앙이었다. 중간고사에서 대부분의 과목이 낙제점이었다. 특히 컴퓨터 과목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수박밭에서는 컴퓨터를 쓸 일이 없었으니까.
퇴학, 그리고 재입학
학기말, 퇴학 통보를 받았다.
학사경고 누적으로 퇴학이었다. 단, 양자역학 과목만 B학점을 받았다. 교수가 놀라워했다.
"다른 과목은 다 F인데 양자역학은 어떻게 B를 받았습니까?"
"모르겠어요. 그냥... 재미있어서 열심히 했어요."
"흠,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아깝네요."
그 교수의 추천으로 1년 후 재입학 기회를 얻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1년 동안 부족한 과목들을 보충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극한의 1년
2014년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해였다.
아침 4시 기상. 찬물로 세수하고 바로 책상에 앉았다.
아침 식사는 빵과 우유로 간단히. 5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다시 공부.
점심은 거르기로 했다. 식곤증 때문에 오후 공부에 지장이 있었다. 대신 물을 많이 마셨다.
저녁 6시에 라면으로 하루 한 끼를 해결했다. 그리고 새벽 1시까지 공부. 하루 3시간만 잤다.
이런 생활을 1년간 지속했다. 체중이 15kg 빠졌다. 치아 두 개가 빠졌다. 영양실조 증상도 나타났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여기서 포기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한국에 있는 아내와의 통화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몸은 괜찮아요?"
"응, 괜찮아."
"거짓말하지 마요. 목소리가 안 좋아요."
"조금만 더 하면 돼. 재입학하면 수월해질 거야."
기적의 재입학
2015년, 재입학 시험을 봤다.
1년간의 지옥 같은 준비가 빛을 발했다. 모든 과목에서 합격점을 받았다. 특히 물리와 수학은 거의 만점이었다.
다시 MIPT의 학생이 되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기초가 탄탄해진 상태였다.
수업을 따라가는 것이 수월해졌다. 특히 물리 과목들은 즐거웠다. 양자역학, 통계물리학, 전자기학... 어릴 때부터 궁금했던 우주의 비밀들이 하나씩 풀려갔다.
"공근식, 이 문제 어떻게 풀었어요?"
이제는 러시아 학생들이 먼저 물어왔다. 나이 든 한국인 학생은 어느새 '물리 고수'로 통했다.
극초음속의 세계로
3학년이 되면서 전공을 정해야 했다.
여러 분야 중에서 극초음속(Hypersonic) 물리학을 선택했다. 마하 5 이상의 속도에서 일어나는 물리 현상을 연구하는 분야였다.
"왜 극초음속이에요?"
지도교수가 물었다.
"빠른 게 좋아요. 수박도 빨리 자라는 품종이 좋거든요."
농담 같은 대답에 교수가 웃었다.
"재미있는 관점이네요. 좋아요, 함께 연구해봅시다."
극초음속 분야는 주로 군사 기술과 우주 기술에 응용된다. 대기권 재진입체, 극초음속 미사일, 스크램제트 엔진 등이 주요 연구 대상이었다.
밤새 풀던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연구는 더욱 깊어졌다.
극초음속 유동을 설명하는 나비에-스토크스 방정식은 악명 높은 난제였다. 비선형 편미분 방정식으로, 일반적인 해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거 못 풀면 졸업 못 해요."
동료 대학원생의 농담 섞인 말에도 진담이 섞여 있었다.
밤새 계산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슈퍼컴퓨터 앞에서 결과를 기다리며 졸기도 했다.
어느 날 새벽, 드디어 의미 있는 결과가 나왔다. 특정 조건에서 극초음속 유동의 불안정성을 예측하는 새로운 모델이었다.
"이거다!"
혼자 연구실에서 소리쳤다. 50살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첫 논문을 쓰는 순간이었다.
2017년, 러시아 언론의 주목
"한국 전직 농부, MIPT에서 극초음속 연구"
2017년 러시아 지역 신문에 실린 기사 제목이었다. 기자가 우연히 공근식의 이야기를 듣고 취재를 요청했다.
"왜 이 나이에 물리학을 공부하시나요?"
"어릴 때부터 궁금했어요. 별은 왜 빛날까, 로켓은 어떻게 날까. 이제야 답을 찾고 있어요."
기사가 나간 후 작은 화제가 됐다. MIPT 내에서도 '수박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공근식은 관심에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연구였다.
논문, 논문, 논문
박사과정은 논문과의 전쟁이었다.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해야 졸업이 가능했다.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첫 번째 투고는 거절당했다.
"영어가 너무 서툽니다. 내용은 흥미롭지만..."
두 번째도 거절.
"실험 데이터가 부족합니다."
세 번째 도전에서 드디어 억셉트(accept)를 받았다.
"Hypersonic Flow Instability in High-Enthalpy Conditions"
극초음속 유동의 불안정성에 관한 논문이 『Journal of Fluid Mechanics』에 게재됐다.
52세, 박사가 되다
2022년 6월, 논문 심사가 있었다.
5명의 교수 앞에서 10년간의 연구를 발표했다. 러시아어로 2시간 동안 설명하고 질문에 답했다.
"수박 농부에서 어떻게 이런 수준의 연구를 하게 됐습니까?"
심사위원장의 질문에 답했다.
"농부도 자연을 연구합니다. 언제 비가 올지, 온도가 어떻게 변할지. 저는 그저 대상을 수박에서 극초음속 유동으로 바꿨을 뿐입니다."
심사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는 만장일치 통과였다.
52세의 나이에 물리학 박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2023년, 귀국
박사 학위를 받고 1년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10년 만의 귀국이었다. 인천공항에 마중 나온 아내가 많이 늙어 보였다. 자신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고생 많았어요."
"당신도 고생했어."
포옹하며 눈물이 났다.
충북 영동의 집으로 돌아왔다. 수박밭은 이미 다른 사람이 경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이제는 새로운 밭을 일굴 차례였다.
성균관대 강단에 서다
귀국 후 여러 대학에 이력서를 넣었다.
52세 신입 박사. 특이한 이력 때문인지 대부분 거절당했다. 하지만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에서 연락이 왔다.
"양자역학 강의를 맡아주실 수 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2024년 3월, 첫 강의.
대학원생들 앞에 섰다. 칠판에 슈뢰딩거 방정식을 쓰며 말했다.
"여러분, 저는 25년간 수박을 키웠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물리학적 사고를 키우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웃었다.
강의는 성공적이었다. 농부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양자역학은 신선했다.
"파동함수의 붕괴는 수박이 익는 것과 비슷합니다. 관측하기 전까지는 덜 익었는지 잘 익었는지 모르죠."
이런 비유들이 학생들의 이해를 도왔다.
아직도 새벽 4시에 일어난다
54세가 된 지금도 새벽 4시에 일어난다.
농부의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밭이 아니라 서재로 간다는 것.
책상에는 읽어야 할 논문들이 쌓여 있다. 물리학은 빠르게 발전한다.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뒤처진다.
"아직도 그렇게 일찍 일어나요?"
가끔 사람들이 묻는다.
"네. 새벽이 가장 머리가 맑아요. 농사할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강연 요청이 쏟아진다
공근식 박사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각종 강연 요청이 들어왔다.
대학, 고등학교, 기업, 시민단체... 모두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포기하지 마세요. 저도 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 진정성이 있었다.
특히 만학도들에게는 희망의 아이콘이 됐다.
"저도 40대인데 늦지 않았겠죠?"
"50대인데 대학원 가도 될까요?"
이런 질문들에 그는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씨를 뿌리면 언젠가는 열매를 맺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겁니다."
새로운 연구: 우주 농업
최근 공근식 박사는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다.
우주 농업. 달이나 화성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기술이다. 극초음속 전공과는 다르지만, 농부 출신 물리학자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우주에서도 수박을 키울 수 있을까요?"
학생이 농담처럼 물었다.
"왜 안 되겠어요? 중력과 대기 조건만 맞춰주면 가능합니다."
실제로 그는 저중력 환경에서의 식물 성장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NASA와의 공동 연구도 논의되고 있다.
농부의 철학은 계속된다
매주 금요일 오후, 공근식 박사는 특별한 세미나를 연다.
'농부의 물리학'이라는 제목의 이 세미나는 일반인도 참석할 수 있다. 복잡한 물리 개념을 농사에 빗대어 설명한다.
"엔트로피 증가 법칙을 아시나요? 밭을 가만 놔두면 잡초가 무성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질서를 유지하려면 계속 에너지를 투입해야 해요."
이런 설명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어려운 물리학이 갑자기 친근해진다.
인터뷰에서 밝힌 미래 계획
최근 한 인터뷰에서 향후 계획을 물었다.
"은퇴는 생각 안 하시나요? 이미 충분히 하셨는데."
공근식 박사가 웃었다.
"은퇴요? 농부는 은퇴가 없어요. 땅이 있는 한 계속 씨를 뿌립니다. 저한테는 물리학이 새로운 땅입니다."
"앞으로의 꿈은요?"
"한국에서 노벨상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제가 받는 게 아니라, 제 학생 중에서요. 그게 진짜 수확이죠."
메시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공근식 박사는 항상 이 말로 강연을 마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40세에 시작해서 52세에 박사가 됐다. 누군가는 12년이 길다고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12년 후에는 누구나 12살 더 먹습니다. 공부를 하든 안 하든. 그럼 하는 게 낫지 않나요?"
수박밭의 농부는 이제 우주를 꿈꾸는 과학자가 됐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성실함, 끈기, 그리고 겸손.
"저는 여전히 농부입니다. 다만 밭이 바뀌었을 뿐이에요."
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새벽 4시, 오늘도 그는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다.
뿌린 대로 거둔다.
농부의 철학은 우주에서도 통한다.
*나는 기사를 다 읽고 나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정신분석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나도 오늘 씨를 뿌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라캉의 책을 다시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