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나잇값'을 거부할까?

중년의 유치함과 무의식적 저항

by 홍종민

우리는 왜 어른스러움을 강요받을까?


48세 김진호 씨가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최신 게임기가 들려 있었다.

"선생님, 이거 아세요? 요즘 이 게임이 대세예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중년의 게임을 미성숙함이나 현실 도피로 본다. '철이 안 들었다', '나이에 맞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완전히 다른 그림이 나타난다. 이것은 강요된 성숙함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유희 충동(play drive)'이 있다고 했다. 이는 나이와 무관하게 지속되는 근본 욕동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사회는 중년의 놀이를 금기시하는가?


세 남자의 비밀: 숨겨진 놀이터


사례 1: 박준서 씨 (46세, 금융권 임원)

"제가 레고를 모은다는 걸 아내는 모릅니다. 회사 창고에 숨겨두죠."

박준서 씨는 매달 수십만 원을 레고에 쓴다. 하지만 집에서는 비밀이다.

"작년에 들켰어요. 아내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초등학생도 아니고, 부끄럽지도 않아? 체면이 있지...' 그날 이후로 숨기게 됐죠."

그의 꿈이 흥미롭다:

"꿈에서 저는 거대한 레고 성을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나타나서 '어른답게 행동해!'라고 소리치더니 성을 부숴버렸어요. 저는 울면서 조각들을 주워 담았죠."

이 꿈은 그의 내적 갈등을 보여준다. 창조적 욕구(레고 성)와 초자아의 명령(아내의 목소리) 사이의 충돌.


사례 2: 정민석 씨 (45세, 대기업 부장)

"저는 매주 PC방에서 온라인 포커를 합니다. 아내는 '그 나이에 뭐하는 짓이냐'고 타박하죠. '어른답게, 품위 있게 살라'고요."

정민석 씨가 게임을 시작한 계기가 의미심장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였어요. 장례식장에서 모두가 '이제 네가 가장이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했죠. 그날 밤, 저는 처음으로 온라인 게임을 했어요."

상실과 놀이의 연관성. 프로이트의 손자가 실패 놀이(fort-da)를 통해 어머니의 부재를 극복했듯, 정민석 씨는 게임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처리한다.


사례 3: 이상훈 씨 (49세, 자영업)

"저는 프라모델을 만듭니다. 아내는 '유아적이다', '철좀 들어라'고 하죠."

이상훈 씨의 유년기 기억:

"열 살 때 아버지가 제 장난감을 모두 버리셨어요. '이제 어른이 될 때가 됐다'면서요. 그때 느낀 상실감이... 지금도 생생해요."

40년 후, 그는 그때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있다.


'나잇값'의 정신분석: 사회적 초자아의 억압


"어른답게 행동해라", "나잇값을 해라", "철좀 들어라"

이런 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캉의 용어로 이는 '대타자(the Other)'의 명령이다. 사회가 규정한 '중년다움'이라는 상징 질서. 그런데 이 질서는 누가 만들었는가?

박준서 씨의 통찰:

"생각해보면 아무도 '어른다움'이 뭔지 정확히 말하지 못해요. 그냥 '하지 말아야 할 것'만 있죠. 게임 하지 마라, 만화 보지 마라, 장난감 갖고 놀지 마라..."

어른다움은 부정의 목록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나열. 그것은 욕망의 거세다.


유희와 창조성: 위니컷의 관점


도널드 위니컷은 "놀이는 창조성의 원천"이라고 했다. 놀이하는 능력을 잃으면 창조성도 사라진다.

정민석 씨의 변화:

"게임을 끊으려고 했어요. '어른답게' 살려고. 그런데 이상하게 우울해지더라고요. 일도 재미없고, 삶이 무의미했어요."

놀이의 상실은 생명력의 상실이다.


퇴행 vs 진정한 자아: 놀이의 이중성


프로이트는 '퇴행(regression)'을 방어기제로 봤다. 하지만 현대 정신분석은 다르게 본다.

이상훈 씨의 깨달음:

"프라모델을 만들 때 저는 가장 진짜 저예요. 집중하고, 창조하고, 성취감을 느끼죠. 이게 퇴행인가요? 아니면 진정한 나를 찾는 건가요?"

퇴행이 아니라 'regression in service of the ego' - 자아를 위한 건강한 후퇴다.


부부 관계의 역학: 놀이를 금지하는 배우자


왜 아내들은 남편의 놀이를 비난할까?

박준서 씨 아내와의 상담:

"남편이 레고나 하고 있으면... 제가 혼자 어른 역할을 다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놀고 싶은데, 누군가는 어른이어야 하잖아요."

투사와 질투. 자신의 억압된 놀이 욕구를 남편에게 투사하고 금지하는 것.

정민석 씨의 아내:

"솔직히 부러워요. 저는 그런 걸 할 엄두도 못 내는데...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것 같아요."


세대적 외상: 놀이를 빼앗긴 세대


한국의 40-50대는 특별한 세대다. 산업화 시대, "놀면 안 된다"는 강박 속에서 자랐다.

이상훈 씨의 회상:

"우리 때는 '놀면 망한다'고 배웠어요. 공부, 일, 성공... 그것만 있었죠. 놀이는 죄악이었어요."

집단적 외상. 놀이를 죄악시하는 문화적 초자아.


중년의 놀이터: 은밀한 저항의 공간


PC방, 프라모델 가게, 보드게임 카페. 이곳들은 단순한 오락 공간이 아니다. 중년들의 '비밀 저항 기지'다.

박준서 씨가 자주 가는 레고 카페:

"거기 가면 저 같은 아저씨들이 많아요. 다들 조용히 레고를 만들죠. 아무도 '나잇값'을 묻지 않아요."

안전한 퇴행 공간. 판단받지 않는 놀이터.


승화와 통합: 놀이하는 어른의 가능성


최근 박준서 씨에게 변화가 생겼다:

"아내에게 털어놨어요. 그리고 함께 레고를 만들기 시작했죠. 놀랍게도 아내가 더 빠져들더라고요."

놀이의 공유. 부부가 함께 '어른다움'의 가면을 벗는 순간.

정민석 씨는 더 나아갔다:

"회사에서 '게임화(gamification)' 프로젝트를 시작했어요. 제 게임 경험이 도움이 되더라고요."

놀이와 일의 통합. 창조적 승화.

새로운 성숙함: 놀이하는 어른

진정한 성숙함은 무엇인가?

이상훈 씨의 정의:

"어른다움은 놀이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놀이와 책임의 균형을 찾는 거예요."

위니컷은 말했다: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은 진지함과 놀이를 오갈 수 있는 사람이다."


결론: 나잇값이 아닌 나다움


"나잇값 좀 해라"는 말은 실은 "너답게 살지 마라"는 말이다.

박준서 씨의 최근 일기:

"오늘도 레고를 만들었다. 46살 중년이 레고를 만든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레고를 만드는 46살이다. 이것이 나의 나잇값이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정신분석의 목표는 히스테리적 불행을 일상적 불행으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정신분석은 더 나아간다: 강요된 성숙함의 불행을 자유로운 놀이의 기쁨으로 바꾸는 것.

당신의 숨겨진 장난감은 무엇인가? 그것을 꺼내는 것이 퇴행이 아니라 해방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정민석 씨가 아내에게 한 말:

"당신도 놀아요. 나잇값 말고, 당신값을 하세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어른 놀이터'가 아닐까. 판단받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그저 놀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어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놀이를 잃지 않은 어른. 그것이 진짜 성숙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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