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궤도를 도는 두 별
퇴근 후 단골 술집에서 대학 동기들과 만났던 어느 금요일 밤, 선배 한 명이 던진 말이 내 결혼관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결혼 25년차인 그는 아내와 일주일에 서너 번은 각자의 방에서 잔다고 했다.
"처음엔 내 코골이 때문이었어. 새벽 4시에 출근 준비하느라 일어나는데, 아내까지 깨우는 게 미안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먼저 서재에서 자겠다고 했지. 아내는 처음엔 서운해했어. '우리가 벌써 각방 쓸 나이냐'면서."
선배는 소주잔을 돌리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 아침마다 서재에서 나온 나와 안방에서 나온 아내가 부엌에서 만나는데, 그 순간이 묘하게 설레더라고. '잘 잤어?'라고 인사하며 커피 내려주는 아내가 새삼 예뻐 보이고. 신혼 때보다 더 설렐 때도 있어."
동기들은 "그게 말이 되냐"며 웃었지만, 나는 선배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부부는 반드시 한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얼마나 우리를 옥죄고 있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회사 후배가 최근 집을 리모델링했다며 자랑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지하실을 자신만의 작업실로, 아내는 다락방을 서재로 꾸몄다고 했다.
"형, 퇴근하고 집에 가면 일단 각자 공간으로 가요. 저는 지하실에서 프라모델 만들거나 게임하고, 아내는 다락방에서 책 읽거나 요가해요. 그러다가 저녁 9시쯤 거실에서 만나 맥주 마시며 하루 있었던 일 얘기하죠."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부부가 왜 따로 노는가? 하지만 후배는 자신들을 '독립적인 두 개의 원이 교집합을 이루는 관계'라고 표현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예전에 읽었던 천문학 책의 쌍성(雙星) 시스템이 떠올랐다.
쌍성은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공통 질량 중심 주위를 도는 두 개의 별이다. 너무 가까우면 충돌하고, 너무 멀면 궤도를 이탈한다. 그 절묘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수십억 년 동안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비밀이다.
문득 아내와 나의 관계를 돌아보게 됐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 붙어있으려고만 했던 건 아닐까?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향한 끈을 놓지 않는 것, 그게 진짜 건강한 부부 관계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골프장에서 만난 거래처 사장님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60대 중반인 그는 정년퇴직 후 아내와의 관계가 오히려 어색해졌다고 했다.
"40년 가까이 함께 살았는데도 하루 종일 집에 같이 있으니까 서로 불편하더군. 아내는 내가 거실에 있으면 청소하기 불편하다고 하고, 나는 아내가 TV 보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신문도 제대로 못 읽겠고."
그의 해결책은 독특했다. 집 안에서도 '출퇴근'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아침 9시에 서재로 '출근'하고,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만나 함께 식사한 후 다시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오후 5시가 되면 '퇴근'하여 거실에서 만난다.
"우스워 보일지 모르지만, 이렇게 하니까 오히려 사이가 좋아졌어. 저녁에 만나면 할 얘기도 많고, 서로가 더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달았다. '거리가 만드는 그리움'의 가치를. 너무 가까우면 숨이 막히고, 적당히 떨어져 있어야 서로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을.
군대 동기 중에 주말부부로 사는 친구가 있다. 지방 발령을 받았는데, 아이들 학교 문제로 아내는 서울에 남았다. 처음엔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지금은 이 방식에 만족한다고 했다.
"금요일 저녁에 집에 들어가는 순간이 매번 설레. 일주일 동안 못 본 아내와 아이들이 반겨주는데,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야. 월요일 새벽에 다시 내려올 때는 아쉽지만, 그 아쉬움이 다음 주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더라."
그는 매주 금요일마다 가족들을 위한 작은 선물을 준비한다. 아내가 좋아하는 지방 특산물,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 함께 볼 영화 DVD... 아내도 그가 좋아하는 반찬을 일주일 치 만들어 보내준다.
"매일 만나는 부부들보다 우리가 더 많이 노력하는 것 같아. 당연한 게 없으니까. 모든 만남이 소중하고, 함께하는 시간 하나하나가 선물 같아."
그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우리는 너무 자주 가까이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잊고 산다. 매일 보는 아내의 얼굴, 매일 듣는 아내의 목소리를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거리를 두고 사는 이들은 매 순간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감사한다.
회사 선배 중에 독특한 부부가 있다. 둘 다 대기업 임원인데, 안식년을 각자 다른 나라에서 보내기로 했다. 선배는 미국 실리콘밸리로, 아내는 싱가포르로 1년간 연수를 떠났다.
"처음엔 이사회에서도 반대가 심했어. 부부가 1년을 떨어져 지내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고.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커리어를 응원하고 싶었어. 각자가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 화상통화를 하며 서로의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공유했다. 때로는 비즈니스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타국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1년 후 한국에서 재회한 그들은 이전보다 더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고 한다.
"각자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니 첫 만남 같은 설렘이 있었어. 서로에 대한 존경심도 커졌고. 우리가 단순히 부부가 아니라 독립적인 프로페셔널이라는 걸 다시 확인한 시간이었지."
그들의 경험은 '함께 성장하기'의 진정한 의미를 보여준다. 많은 부부가 '함께'에만 집중하다가 '성장'을 놓친다. 하지만 진정한 동반자는 서로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하는 관계가 아닐까.
술자리에서만 나오는 남자들의 속마음이 있다. "사실 나도 가끔 혼자 있고 싶어." "아내랑 대화가 줄어든 지 오래야." "각방 쓰고 싶은데 아내가 서운해할까 봐 말을 못 하겠어."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도 혼자만의 동굴이 필요해.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릴 수 있는 공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만의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시간. 그게 있어야 다시 가족에게 돌아갈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아."
또 다른 친구는 차고를 자신만의 공간으로 개조했다. 작은 냉장고와 TV, 낡은 소파를 놓고 '남자의 성'을 만들었다. 주말 오후,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스포츠 중계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했다.
"아내는 처음엔 불만이었어. 주말에도 나랑 안 놀아주냐고. 하지만 내가 그 시간을 보내고 나면 더 상냥해지고 가족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오히려 그 시간을 지켜주더라."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깨달았다. 남자든 여자든, 우리 모두는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남편이나 아버지가 아닌, 그냥 '나'로서 숨 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최근 통계를 보니 한국의 '각방 부부' 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50대 이상 부부의 경우 3쌍 중 1쌍이 각방을 사용한다. 이를 '위기'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진화'라고 보고 싶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가장'이라는 무게를 짊어지고 살았다.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현모양처'라는 틀 안에 자신을 가두고 살았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다르다. 남자도 약할 수 있고, 여자도 강할 수 있다. 부부는 상하 관계가 아닌 동등한 파트너다.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함께 성장하는 관계.
이는 사랑의 퇴보가 아니라 진화다. 소유와 집착에서 존중과 신뢰로. 의존에서 상호보완으로. 닫힌 관계에서 열린 관계로.
이 모든 이야기와 고민 끝에, 나는 아내와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거실에 앉아 위스키를 한 잔씩 따르고, 평소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꺼냈다.
"나도 가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달까."
아내도 의외로 공감했다. "사실 나도 그래. 항상 누군가의 아내, 엄마로만 사는 게 가끔은 숨막혀. 나도 그냥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 필요해."
우리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서재는 내 공간으로, 드레스룸 옆 작은 방은 아내의 공간으로. 일주일에 하루는 각자의 저녁을. 한 달에 한 번은 각자만의 여행을.
신기한 변화가 일어났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생기자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해졌다. 각자의 이야기가 생기자 대화가 풍성해졌다. 서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되자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부부란 서로를 완성하는 퍼즐 조각이 아니다. 각자 완전한 그림이되, 함께 있을 때 더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관계다. 때로는 나란히, 때로는 따로, 하지만 결국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걷는 것.
우주의 쌍성처럼, 각자의 빛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궤도에 머무는 것. 그것이 내가 찾은, 우리 부부만의 방식이다.
당신의 부부는 어떤 모습인가? 정답은 없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궤도를 그리며 살아가면 된다. 중요한 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계속해서 서로를 선택한다는 것.
오늘도 나는 서재에서 이 글을 쓰고, 아내는 자신의 방에서 책을 읽는다. 조금 있으면 거실에서 만나 와인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할 것이다. 떨어져 있지만 연결되어 있는, 우리만의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