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웃음이 나오다가도 곧 씁쓸해지는 대목이 있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컴퓨터게임을 즐기고, 인터넷 고스톱도 하는 그에게 아내는 유치하다며 핀잔을 준다. '나잇값 좀 하라'고 하면서."
처음엔 정말 웃겼다. 중년 남자가 게임하는 모습을 못마땅해하는 아내의 잔소리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어서.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 나이에 무슨 게임이야", "애들도 다 컸는데 철 좀 들어라", "남들 보기 창피하다" 같은 말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 '나잇값'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틀인지를.
나이가 들면 반드시 무겁고 진중해야 하고, 취미조차도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강박. 골프나 등산, 낚시 같은 '점잖은' 취미는 괜찮지만, 게임이나 만화책은 유치하다는 편견. 그래서 PC방으로 도망치는 남자의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최소한 "나잇값"을 요구받지 않으니까. 아무도 그의 나이를 묻지 않고, 무슨 게임을 하든 눈치 주지 않으니까.
책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기억이 있다. 얼마 전 카페에서 본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노트북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했고, 게임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옆 테이블의 젊은이들이 수군거리며 쳐다봤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어쩌면 못 들은 척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저 특이한 광경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 남자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에게 그 시간은 '나잇값'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을지도.
더 가슴 아픈 건 바로 다음에 나오는 50대 남자의 이야기였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도 집사람이 없어요. 아이들 다 컸다고 이제는 자기도 즐기면서 살아야겠다며 밖으로만 돕니다."
아이러니하다. 한쪽에서는 남편이 게임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을 유치하다고 핀잔을 주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아내가 자신의 삶을 찾아 밖으로 나가버린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이 완전히 어긋나 있다. 남편은 아내가 집에서 자신을 맞아주길 바라지만, 정작 아내가 집에 있으면 불편해한다. 아내는 남편이 듬직하고 어른스럽길 바라지만, 정작 그런 무게를 짊어진 남편과 대화하는 것은 지루해한다.
"어두운 집에 불 켜고 들어오는 첫 번째 사람이 저예요"라는 고백을 읽을 때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가족을 위해 평생을 달려왔는데, 정작 그 가족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큰아들은 밤늦게 들어오고, 딸은 공부하느라 집에 없고, 아내는 이제야 자신의 삶을 찾겠다며 밖으로 돈다. 물론 아내의 선택을 탓할 수는 없다. 그녀도 충분히 오래 기다렸고, 자신의 삶을 살 권리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홀로 남겨진 남자의 외로움이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어두운 집, 불 켜지지 않은 거실, 텅 빈 식탁. 이것이 그가 평생 꿈꿔온 '성공한 인생'의 모습이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 상상했을 것이다. 퇴근하면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집, 가족들의 웃음소리, 함께 둘러앉은 저녁 식탁. 하지만 현실은 차갑고 어둡고 적막하다.
"나이 오십에 혼자 밥 먹는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황량합니다"라는 문장에서는 책을 잠시 덮어야 했다.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 너무 선명하게 그려져서. TV 소리만 웅웅거리는 텅 빈 거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 한 그릇, 그리고 "이렇게 살려고 그 세월을 고생하면서 보냈나"라는 자문. 라면을 먹으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신입사원 시절 끼니를 때우던 라면과, 오십의 나이에 혼자 먹는 라면은 같은 라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일 것이다. 젊은 시절의 라면이 미래를 위한 잠시의 고생이었다면, 지금의 라면은 그 미래가 되어버린 현재의 초라함을 상징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라면 끓여 먹을 때는 정말 제가 처량하게 느껴집니다"라는 말이 계속 맴돈다.
라면을 끓이는 것 자체가 처량한 게 아니다. 함께 먹을 사람이 없다는 것, 누군가를 위해 정성스럽게 차린 밥상이 아니라 혼자 대충 때우는 한 끼라는 것, 그것이 처량한 것이다. 음식은 단순한 영양 섭취가 아니라 관계의 매개체이고, 사랑의 표현이며, 소통의 도구인데, 혼자 먹는 라면에는 그 어떤 것도 없다. 그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일 뿐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요구하면서, 정작 '사람'으로서의 존재는 외면하는 건 아닐까. 남편은 돈 벌어오는 기계가 아니고, 아내는 집안일하는 로봇이 아니며, 자녀는 성적 올리는 도구가 아닌데. 우리는 언제부터 가족을 역할로만 바라보게 되었을까.
'아빠'라는 역할, '엄마'라는 역할, '자녀'라는 역할. 역할은 충실히 수행하지만, 그 역할 뒤에 숨은 한 인간의 외로움과 갈망은 보지 못한다. 아니, 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는 순간, 우리도 똑같이 외롭고 불안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잇값 좀 하라"는 말 속에는 '당신은 이제 게임 같은 걸 즐길 나이가 아니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나잇값을 하며 살아온 결과가 혼자 라면 끓여 먹는 쓸쓸한 저녁이라면, 우리가 추구해온 '어른다움'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잇값이란 말에는 나이에 걸맞은 품위와 책임감을 요구하는 사회적 압력이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압력은 종종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가 된다. 게임을 좋아하는 것도, 만화책을 읽는 것도,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모두 '나잇값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규정된다. 그렇게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자신을 잃어간다.
책을 읽으며 깨달은 건, 중년의 위기는 단순히 나이 듦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를 역할로만 바라보고, 진정한 소통은 잃어버린 채, 각자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현대 가정의 진짜 비극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정서적으로는 더 가난해졌다. 넓은 집, 좋은 차, 안정된 직장. 이 모든 것을 갖췄지만, 정작 마음을 나눌 사람은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 살지만,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화면을 보며, 각자의 세계에 갇혀 산다.
게임하는 남편을 유치하다고 핀잔 주는 대신 "오늘 게임에서 이겼어?"라고 물어볼 수는 없었을까. 혼자 라면 끓여 먹는 남편 곁에 앉아 "나도 한 젓가락"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을까.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나잇값'이 아니라, 나이를 잊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따뜻한 시선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살려고 그 세월을 고생하면서 보냈나"라는 한탄은 단순히 한 개인의 푸념이 아니다.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 세대 전체의 자화상이다. 가족을 위해 산다고 했지만, 정작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없었고, 행복한 미래를 위해 산다고 했지만, 정작 현재는 늘 불행했다. 그렇게 우리는 삶을 유예하며 살아왔다.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라고, 언젠가는 여유로워질 거라고, 언젠가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거라고 믿으며.
하지만 그 '언젠가'는 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커서 제 갈 길을 갔고, 아내는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났으며, 남은 것은 텅 빈 집과 혼자 먹는 라면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성공한 삶의 모습일까.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지금이라도 서로를 역할이 아닌 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나잇값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혼자가 아닌 함께 먹는 저녁 식탁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어른다움이 아닐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더 많은 역할을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역할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리고 서로의 연약함과 외로움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