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은 독이다!

by 홍종민


불편함을 선택하는 용기: 『편안함의 습격』을 라캉의 정신분석학으로 읽다


상징계에 기입된 운명 - 가족이라는 대타자


책장을 넘기다 첫 문장에서 숨이 막혔다. "나는 폭음과 개소리와 과대망상에 빠져 살아 온 집안 출신이다." 마이클 이스터의 이 담담한 고백을 읽으며 나는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정신분석 이론이 떠올랐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라캉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구조주의 언어학과 결합하여 독창적인 정신분석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의 이론 중 핵심은 인간 주체가 세 가지 영역 - 상상계(the Imaginary), 상징계(the Symbolic), 실재계(the Real) -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이다.


라캉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존재하는 언어와 문화의 질서, 즉 '상징계' 속으로 들어간다. 상징계는 언어, 법, 문화, 사회적 규범 등으로 구성된 영역으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며 우리의 운명을 미리 규정한다. 이 상징계를 라캉은 '대타자(the big Other)'라고 부른다. 대타자는 단순히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행동을 규제하는 상징적 질서 전체를 가리킨다.


성 패트릭 축일에 술에 만취한 상태로 온통 녹색으로 칠한 말에 다른 여자를 태우고 술집으로 돌진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이것이 단순한 일탈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것은 가족이라는 상징적 구조 속에서 대물림되는 특별한 '증상(symptom)'이다. 라캉은 증상을 단순한 병리가 아니라 주체가 자신의 무의식적 진실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본다. 증상은 억압된 것의 회귀이며, 동시에 주체가 자신의 향유를 조직화하는 방식이다.


"젠장, 젠장, 폭스바겐!"을 밤새도록 외치며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삼촌의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다. 이 의미 없어 보이는 외침은 라캉이 말하는 '시니피앙(signifier)'의 자율성을 보여준다. 시니피앙은 기의(signified)와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작동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언어다. "소리를 지른 당사자도, 그 밤 유치장 안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무의식이 의식적 이해를 넘어서 작동함을 보여준다.


조카와 삼촌이 유치장에서 즉석 가족 상봉을 한 에피소드는 블랙 코미디처럼 들리지만, 여기에는 깊은 비극이 숨어 있다. 이것은 가족이라는 상징적 구조가 개인의 운명을 얼마나 강력하게 규정하는지를 보여준다. "에이다 카운티 지역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이고 잘생긴 거짓말쟁이이자 유명한 사기꾼이며 지독한 술주정뱅이"였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이 증상의 계보는 마치 그리스 비극의 가족 저주처럼 세대를 거쳐 전승된다.


향유의 덫 - 죽음을 향한 충동


라캉의 '향유(jouissance)' 개념은 이 책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다. 향유는 프랑스어로 '성적 오르가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라캉은 이 개념을 확장하여 쾌락 원칙을 넘어서는 과도한 만족감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 그것은 단순한 즐거움(plaisir)과는 다르다. 프로이트가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설명한 것처럼, 향유는 고통과 쾌락이 뒤섞인 역설적 만족이다.


"나는 이런 남성 집단 출신인 것이다"라는 저자의 선언을 읽으며, 나는 라캉이 말하는 '상징적 위임(symbolic mandate)'을 떠올렸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특정한 이름과 위치를 부여받는다. 이 상징적 위치는 단순한 사회적 역할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향유의 방식까지 구조화한다. 저자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이 운명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근 10년 전, 내 몸에도 똑같은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고백은 충격적이다. "어, 내 차가 어디 있지?"하는 몇 번의 순간들, 여기저기 부러진 뼈, 파탄으로 치달은 관계... 이런 일화들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무의식적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의 표현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과거의 외상적 경험을 강박적으로 반복한다고 했고, 라캉은 이를 향유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주체는 고통스러운 향유에 중독되어 그것을 반복한다.


특히 "접이식 스쿠터로 지상 최고 속도를 깨는 시도를 하던 중 체포당했다"는 에피소드는 라캉이 말하는 '행위화(acting out)'의 완벽한 예다. 행위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의식적 내용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 무모한 행동 속에는 죽음 충동과 향유가 뒤얽혀 있다. 그것은 자기 파괴적이면서도 동시에 강렬한 생명력의 표현이기도 하다.


라캉은 향유를 '잉여 향유(plus-de-jouir)'라는 개념으로도 설명한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잉여를 가리킨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마시면서 잃어버린 만족을 되찾으려 하지만, 실제로는 더 큰 결핍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것이 중독의 악순환이다.


분열된 주체 - 낮의 자아와 밤의 증상


저자가 "꽤 이름 있는 잡지의 건강 저널리스트"이면서 동시에 "직업적 위선자"였다는 고백은 라캉 이론의 핵심인 '분열된 주체(split subject, $)'를 완벽하게 보여준다. 라캉은 주체를 표현할 때 S에 사선을 그어 $로 표기하는데, 이는 주체가 본질적으로 분열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이 분열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가 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언어 속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즉각적인 욕구 충족의 세계에 살 수 없다. 언어는 우리와 사물 사이에 거리를 만들고, 이 거리가 바로 욕망의 공간이다. 동시에 언어는 우리를 분열시킨다. 말하는 주체(subject of enunciation)와 말해지는 주체(subject of statement)로 나뉘는 것이다.


"남부럽지 않은 경력을 가졌으며 일도 꽤나 잘했다"는 저자의 모습은 라캉이 말하는 '자아 이상(ego-ideal)'에 부합하려는 노력이다. 자아 이상은 주체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로, 대타자의 시선 속에서 형성된다. 건강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은 그에게 사회적 인정과 상징적 지위를 제공했다. 이것은 '상상계'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나르시시즘적 동일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끼적여댄 지혜에 따라 살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술에 취했다가 또다시 술에 집착하는 상황을 반복하며 살았다"는 고백은 상징계의 지식과 실재계의 향유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보여준다. 라캉은 네 가지 담론 이론에서 '대학 담론(university discourse)'을 설명하는데, 이는 지식(S2)이 주인 위치에 오는 담론이다. 저자는 건강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고 전파하지만, 그 지식은 그의 증상을 치료하지 못한다.


"삶의 거의 모든 것이 알코올과 얽혀 있었다. 마시지 않을 때는 주말까지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금요일 밤부터 다시 술을 들이마셨다"는 대목은 증상의 시간성을 보여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어금니를 악무는 고난의 행군"은 상징계의 시간이고, 주말의 폭음은 실재계의 시간이다. 이 두 시간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리듬으로 진동한다.


오브제 아로서의 알코올 - 환상의 대상


저자는 알코올을 "편안한 이불"에 비유한다. 이 은유는 라캉의 '오브제 아(objet petit a)' 개념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오브제 아는 라캉 이론의 가장 독창적이고 복잡한 개념 중 하나다. 그것은 욕망의 대상-원인(object-cause of desire)으로, 우리가 욕망하게 만드는 동시에 결코 완전히 획득할 수 없는 대상이다.


오브제 아는 프로이트가 말한 '잃어버린 대상'과 관련이 있다. 유아는 어머니와의 원초적 합일 상태를 상실하면서 주체가 된다. 이 상실은 메울 수 없는 구멍을 만들고, 주체는 평생 이 구멍을 채우려 한다. 오브제 아는 이 잃어버린 완전함의 흔적이자 약속이다.


"술은 스트레스를 날려주고, 따분함을 삽시간에 몰아내주었다. 슬픔과 걱정과 두려움을 잊게 했다. 알코올은 인간이 당연히 겪어야 할 불편함들, 즉 불안한 상황, 생각, 감정 등으로부터 나를 잠재우고 덮어주었다." 이 문장들은 알코올이 어떻게 오브제 아로 기능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그것은 모든 결핍을 메워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더 큰 구멍만을 만들 뿐이다.


라캉은 '환상(fantasy)'을 ◇a라는공식으로표현한다.분열된주체(◇a라는 공식으로 표현한다. 분열된 주체( ◇a라는공식으로표현한다.분열된주체()가 오브제 아(a)와 맺는 관계(◇)가 바로 환상이다. 환상은 주체를 실재의 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스크린 역할을 한다. 알코올 중독자의 환상은 "술만 있으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야"라는 시나리오다. 이 환상은 현실의 고통을 견딜 만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주체를 향유의 덫에 가둔다.


"이런 버릇은 생활 전체를 삽시간에 안개 속으로 몰아넣었고, 주말마다 이어지는 폭음의 굴레 속에서 여러 해를 허비했다"는 고백은 환상의 파괴적 힘을 보여준다. 안개는 환상의 완벽한 은유다. 그것은 현실을 흐릿하게 만들고, 주체가 자신의 진실을 대면하지 못하게 한다.


실재계와의 조우 - 토사물 속의 진실


스물여덟 살의 그 아침, "위스키가 뒤섞인 토사물을 뒤집어쓴 채 고통과 함께 깨어났다"는 장면은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외상적 조우(traumatic encounter with the Real)'의 순간이다. 실재계는 라캉의 세 영역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것은 상징화될 수 없고 상상될 수 없는 영역으로, 언어 너머에 있는 것, 의미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 모양새로 맞는 이틀째 아침이었고, 이전에도 숱하게 경험했던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날 아침은 뭔가 달랐다"는 대목이 중요하다. 반복되던 패턴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라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빌려 '티케(tyche)'와 '오토마톤(automaton)'을 구별한다. 오토마톤이 상징계의 자동적 반복이라면, 티케는 실재와의 우연한 만남이다. 이날 아침은 티케의 순간이었다.


"머릿속이 또렷했다. 그 무렵 빠져 있던 소립자 물리학만큼이나 명징한 느낌이었다." 이 명징함은 환상이 붕괴하는 순간의 특징이다. 환상은 일종의 필터 역할을 하는데, 이 필터가 사라지면 현실이 날것 그대로 드러난다. "내 삶이 있는 그대로 보였다"는 것은 상상계의 베일이 찢어진 것이다.


"스스로 혀를 깨물 만큼 멍청한 주정뱅이에다 직업 사기꾼이 되어버린 상황이, 이미 개판인 주변의 모든 것이, 매주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 또렷이 보였다." 이 무자비한 자기 인식은 라캉이 말하는 '주체의 진실(truth of the subject)'과 대면하는 순간이다. 진실은 항상 증상을 통해 말한다. 토사물은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 아니라, 주체가 더 이상 삼킬 수 없는 것, 더 이상 소화할 수 없는 것을 토해내는 상징적 행위다.


"조만간 이런 생활이 들통 나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에 잃게 될 것은 인간관계였다... 이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잃게 될 것이다. 차, 집, 돈 기타 등등. 그리고 마침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이 예언적 통찰은 죽음 충동의 궁극적 목적지를 보여준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모든 충동은 결국 죽음 충동이다.


강제된 선택 - 향유냐 삶이냐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는 저자의 말은 라캉이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에서 제시한 '강제된 선택(forced choice)'의 상황이다. 라캉은 "돈이냐 목숨이냐"라는 강도의 협박을 예로 들며, 주체가 직면하는 선택이 실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님을 보여준다.


"옵션 1,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냥 이대로 산다. 안일함과 무감각한 생활 방식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겠지만 대신 계속 술독에 빠져 지낼 수 있다." 이것은 향유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향유의 역설은 그것이 주체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향유를 선택하면 결국 삶과 향유 모두를 잃게 된다.


"옵션 2, 불편해진다. 안락했던 액체 이불을 걷어차 버린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상징적 거세(symbolic castration)'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상징적 거세는 실제적인 거세가 아니라, 향유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것은 주체가 상징계의 법에 복종하면서 원초적 만족을 포기하는 과정이다.


"두 번째 옵션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내가 해낼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어 더럭 겁이 났다"는 고백은 중요하다. 상징적 거세는 보장이 없다. 그것은 알려진 고통을 버리고 알려지지 않은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이 말하는 '행위(act)'의 구조다. 진정한 행위는 계산된 결과가 아니라 도약이다.


"토사물에 덮여 깨어나는 일이 흥미로웠던 점은, 나를 이렇게 만든 것과 정반대되는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더 쉽게 만들어줬다는 점이다"는 통찰은 변증법적이다. 바닥을 치는 것이 오히려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누구도 금요일 저녁에 술을 끊겠다고 결심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결심은 향유가 절정에 달했을 때가 아니라 그것의 파괴적 결과가 명백해졌을 때 가능하다.


"나는 이 바보 같던 삶에 백기를 들었다"는 것은 자아의 항복이다. 라캉은 자아(ego)와 주체(subject)를 구별한다. 자아는 상상적 구성물이고,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다. 자아가 무너질 때, 비로소 주체의 진정한 욕망이 드러날 수 있다.


금단 증상 - 향유의 잔재


"그러자 불편함이 곧바로 시작됐다. 온몸이 말라버리는 것 같은 끔찍한 지옥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두통, 메스꺼움, 탈진, 오한, 땀, 그리고 몸속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다양한 고통들." 이 생생한 묘사는 향유를 포기할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고통을 보여준다. 라캉의 관점에서 이것은 단순한 생리적 반응이 아니라, 향유의 잔재가 몸에서 배출되는 과정이다.


"줄담배를 피우면서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었던 나는 어느 순간 발암 물질 칵테일 같은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는 대목은 구강 충동의 복합적 성격을 보여준다. 담배와 술의 결합은 구강기적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구강기를 인간 발달의 첫 단계로 보았고, 라캉은 이를 욕망의 구조와 연결시켰다.


"몸의 고통들은 시간이 흐르며 마침내 의식 아래로 사라졌다. 하지만 금주에서 오는 더 큰 시련이 시작되었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정신적 혼란이다. "알코올에 절여 있던 뇌가 재부팅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이 일어났다. 마치 단단한 고무공이 대포에서 발사되어 콘크리트 방 안을 사방으로 튕겨 다니는 것 같았다."


이 비유는 충동(drive)의 작동 방식을 정확히 포착한다. 라캉은 충동을 목표를 향해 직진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주위를 맴도는 순환 운동으로 설명한다. 알코올이라는 대상을 잃은 충동은 새로운 대상을 찾아 미친 듯이 돌아다닌다. "고도로 광적인 정신 상태에서, 살아 있다는 기쁨에 들떴다가 이내 우울증에 빠져서 끝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극과 극을 오가는 상태가 반복되었다."


이 감정의 롤러코스터는 라캉이 말하는 주체의 진동(oscillation)을 보여준다. 향유를 포기한 주체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지 못하고 극단 사이를 진동한다. 이것은 주체가 재구성되는 과정의 필연적인 단계다.


새로운 삶의 학습 - 상징계의 재구성


"어떻게 술을 안 마시지? 주말마다 뭘 하지? 누군가 나에게 술을 권하면 뭐라고 해야 하지? 동창회나 결혼식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당연히 마셔야 할 것 같은데?" 이 질문들은 단순한 실용적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상징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정의해야 하는 문제다.


라캉은 주체가 대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고 본다. "Che vuoi?(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대타자의 질문 앞에서 주체는 자신의 욕망을 정의해야 한다. 술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음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사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난 이제 술 안 마셔', '술만 빼곤 뭐든지 오케이야!', '고맙지만 사양할게', 또는 '우리 술 마시는 대신에 산책이나 하면서 얘기 나눌래?'" 이 대답들은 새로운 주체 위치의 선언이다. 그것은 대타자에게 자신의 새로운 좌표를 알리는 것이다.


"그때는 막 걸음마를 뗀 아이에게 Y에 대한 X값을 구하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심오하고 어려운 문제였다"는 비유가 흥미롭다. 이것은 상징계의 재학습 과정을 보여준다. 아이가 언어를 배우듯이, 저자는 술 없는 삶의 언어를 새로 배워야 했다.


"정신 질환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 중 절반이 물질 남용 장애에 시달린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는 지적은 중독과 정신병의 구조적 유사성을 시사한다. 라캉은 정신병을 아버지의 이름(Name-of-the-Father)의 배제로 설명한다. 중독 역시 상징적 법의 거부와 관련이 있다.


"나는 인생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는 선언은 문자 그대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위스키 지옥에 빠져 살던 가족 염색체가 부활절이라도 만난 듯 되살아나서 새로운 길에 저항했다"는 표현은 가족의 향유 양식과의 투쟁을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전승된 증상과의 전쟁이다.


구강 충동의 현대적 변주 - 음식 중독 사회


책의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저자는 알코올 중독을 넘어 현대인의 음식 중독 문제를 다룬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라캉의 네 가지 담론 이론 중 '자본주의 담론(capitalist discourse)'은 현대 소비사회의 구조를 설명한다.


"인류는 본래 풍요와 기근이 반복되는 환경에서 진화해왔다"는 지적은 중요하다. 인간의 욕망 구조는 결핍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는 이 결핍을 인위적으로 메우려 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제는 두 가지 종류의 '잔치'만 존재하는 듯하다. 체중을 유지하는 약간의 잔치와 체중이 증가하는 제대로 된 잔치."


솔크연구소의 사친 판다 박사의 연구를 인용하며, "현대인이 평균 하루 15시간 음식을 섭취한다"는 사실을 전하는 대목은 충격적이다. 이것은 구강 충동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라캉은 충동이 만족(satisfaction)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충동은 목표(goal)에 도달하지 못해도 그 목적(aim)은 달성한다. 먹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간식이 1978년에 비해 70퍼센트 증가했고, 간식의 크기도 60퍼센트 더 커졌다"는 통계는 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잉여 향유의 증거다. 라캉은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개념을 차용하여 잉여 향유를 설명한다.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의 대상을 생산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칼로리를 섭취하기 시작해 잠들기 직전까지 먹는 경향이 있다"는 관찰은 현대인의 시간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더 이상 자연의 리듬이 아니라 24시간 소비의 리듬이 우리를 지배한다.


자가포식 - 죽음 충동의 생산적 전환


'자가포식(Autophagy)'이라는 개념은 이 책의 핵심 통찰 중 하나다. "스스로 먹어치우다"라는 뜻의 이 고대 그리스어는 라캉의 죽음 충동 이론과 놀라운 일치를 보인다. MIT의 데이비드 사바티니 박사가 발견한 mTOR 경로는 "우리 몸의 낡은 세포들을 허물고, 새로운 건강한 세포로 교체하도록 신호를 보내는 종합건설업자"라고 설명된다.


이것은 죽음 충동의 창조적 차원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죽음 충동을 무기물 상태로의 회귀 욕구로 설명했다. 그러나 라캉은 이를 다르게 해석한다. 죽음 충동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상징계를 넘어서려는 충동이다. 그것은 기존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원리다.


"우리 몸은 무자비할 정도로 효율적이어서, 가장 오래되고 약한 세포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자원을 재활용한다"는 설명은 죽음과 생명의 변증법을 보여준다. "더 이상 분열하지 않는 '쓰레기 세포'들은 노화와 질병을 유발하는 주요 요인"이라는 지적은 정체된 것,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진정한 죽음임을 시사한다.


"배고픈 상태가 되면 우리 몸의 세포가 일종의 자연 선택 과정을 거친다"는 설명은 진화론적 관점을 도입한다. 결핍이 선택을 강제하고, 이 선택이 진화를 추동한다. 라캉 역시 욕망이 결핍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결핍이 없다면 욕망도, 따라서 주체도 없다.


판다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낮과 밤의 주기에 맞춰 자가포식을 조절하는 생체 리듬을 가지고 있다." 낮 동안 음식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밤에는 자가포식하며 스스로를 회복하고 재생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식습관은 이 과정을 방해한다." 늦은 밤까지 먹는 습관은 이 자연스러운 리듬을 파괴한다.


배고픔의 변증법 - 욕망의 원동력


"배고픈 늑대하고, 막 식사를 끝낸 사자를 생각해보세요. 누가 더 집중하고 있을까요? 당연히 배고픈 늑대입니다." 제이슨 펑 박사의 이 비유는 라캉의 욕망 이론을 완벽하게 설명한다. 욕망은 충족되지 않을 때 가장 강렬하다. 만족은 욕망의 죽음이다.


"음식을 먹지 않고 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몸은 작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서히 출력을 높입니다"는 설명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보통 에너지를 얻기 위해 먹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배고픔이 더 큰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결핍이 생산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라캉은 욕망을 '존재의 결핍(want-to-be)'으로 설명한다. 주체는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욕망한다. 그런데 이 결여는 단순한 부재가 아니라 주체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배고픔은 단순한 결핍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몸이 더 강력하게 기능하도록 돕는 생존 메커니즘"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이를 생물학적으로 확인한다.


"허기 관련 화학 물질들의 진화적 장점"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아드레날린이 각성도와 집중력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안(anxiety)의 생산적 측면을 보여준다. 라캉은 불안을 단순히 병리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불안은 실재가 가까이 있다는 신호이며, 주체를 깨어있게 하는 정동이다.


북극의 실재 - 상징계 너머의 세계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북극 사냥 여행을 통해 극한의 불편함을 경험한다. 이 여정은 문명이라는 상징계를 벗어나 실재와 대면하는 과정이다. "날씨는 엉망이다. 눈발이 흩날리지 않는 날은 비가 흩뿌리고, 그렇지 않으면 지독하게 춥다." 이 가혹한 환경은 어떤 의미화도 거부하는 실재의 영역이다.


"앉으려면 얼어붙은 땅에 엉덩이를 붙여야 한다. 이런 추위는 안 그래도 허기가 진 나를 더 배고프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내 몸은 난로처럼 칼로리를 태우며 더욱 극심한 배고픔을 느끼게 한다." 이 생생한 묘사는 몸이 실재와 직접 접촉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여기에는 상징적 매개가 없다. 오직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날것의 감각만이 있다.


"북극이 선사하는 고통과 불행은 우리가 이 땅에 첫 발자국을 찍은 뒤로 어떤 식으로든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문장은 실재의 집요함을 보여준다. 실재는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항상 거기에 있다. 다만 평소에는 상징계와 상상계가 그것을 가려줄 뿐이다.


저자가 떠올린 문장, "오늘 나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수용'이다"는 라캉이 말하는 주체의 'destitution(폐위)'과 유사하다. 이것은 주체가 자신의 환상적 지지대를 포기하는 것이다. "날씨, 허기, 지형과 맞서 싸우는 대신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결정은 상징적 투쟁을 포기하고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좋아요!"라는 밝은 대답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것은 주체의 근본적 전환을 보여준다. 더 이상 실재를 적으로 보지 않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것이다.


제13장: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


도니의 관찰 - "자연을 사랑한다면서 자연에서 지내는 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연은 하루 종일 리조트에서 스키를 타고 오두막으로 가서 보드카에 치즈버거를 먹는 거였어요" - 는 현대인의 자연 경험이 얼마나 상징화되고 상품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진정한 자연 경험은 이러한 매개를 벗어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방식이 더 매력적이죠. 이런 데서 하는 경험들은 완전히 종류가 다르고, 사람을 훨씬 깊이, 다르게 변화시킨다고 믿습니다"라는 도니의 말은 실재와의 직접적 조우가 주는 변화의 힘을 강조한다.


"어떤 연구에서 더 힘들게 얻은 것일수록, 더 큰 행복을 느낀다"는 인용은 향유와 만족의 차이를 보여준다. 향유는 즉각적이지만 공허하고, 진정한 만족은 노력과 인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윤리와 일치한다.


순록 사냥의 실패는 상징적이다. "순록들은 너무 똑똑했고, 경계심이 강하며, 몇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완벽하게 집중하고 있었다. 반면 우리는 그 사실을 알아채기에 너무나 무지한 듯했다." 이것은 인간의 상징적 우월성이 자연 앞에서 무력함을 보여준다.


"생명은 땅을 가리지 않는다"는 관찰은 깊은 통찰이다. "푸석한 석회암과 납작한 혈암 조각들을 깔고 앉았다. 갈색 꽃들, 형광빛 이끼류, 순록 이끼 따위가 사방에 깔려 있다."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도 생명은 자신의 방식을 찾는다. 이것은 라캉이 말하는 '실재의 윤리'와 연결된다.


증상에서 성인으로 - 불편함의 윤리학


"캠프로 돌아가면서 나는 배고픔을 느꼈다. 하지만 단순히 음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삶 자체가 더 고팠다." 이 문장은 책 전체의 메시지를 압축한다. 진정한 배고픔은 생물학적 욕구가 아니라 존재론적 갈망이다.


"이 여정은 나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조용히 자각할 수 있었고, 잃어버렸던 감각들이 돌아왔다." 이것은 단순한 감각의 회복이 아니라 주체성의 재구성이다. 라캉은 정신분석의 끝에서 주체가 '성인(sinthome)'이 된다고 말한다. 성인은 증상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증상을 창조적으로 변형시켜 자신만의 삶의 방식으로 만든 것이다.


"최근 며칠 사이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시간은, 지는 해와 함께 조용히 캠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는 고백은 새로운 향유의 발견을 보여준다. 이것은 파괴적 향유가 아니라 생산적 향유다. "차가운 침묵과 적막이 깔려가는 순간, 나는 그 안에서 깊숙이 살아 있었다"는 문장은 실재와의 새로운 관계를 보여준다.


『편안함의 습격』은 단순한 자기계발서나 건강 지침서가 아니다. 이것은 한 주체가 자신의 가족적 증상과 대면하고, 향유의 덫에서 벗어나 욕망의 주체로 거듭나는 정신분석적 여정의 기록이다. 저자가 알코올 중독이라는 가족의 유산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발견하는 과정은 라캉이 말하는 분석의 과정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현대 문명이 제공하는 편안함은 일종의 환상이다. 그것은 우리를 실재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향유의 덫에 가둔다. 진정한 삶은 이 환상을 깨고 불편함과 결핍을 받아들일 때 시작된다. 이것이 바로 라캉의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삶의 진실이며, 이 책이 몸소 보여주는 변화의 가능성이다.


편안함이 습격해오는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편함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다. 그것은 단순히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통해 욕망을 되찾고, 실재와 대면하며,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마이클 이스터의 여정은 이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라캉의 이론은 이 여정의 의미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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