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온도_2

by 슬로우

그날 이후, 서지윤은 가끔씩 커피숍 ‘더 슬로우’에 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창가에 앉기도 하고, 때로는 안쪽 조용한 자리에 머물기도 했다.


무언가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택배 사건 이후로 가끔씩 ‘더 슬로우’에 오면 편안함이 느껴지고, 그녀는 하루가 조금 더 버틸만 해졌다고 느꼈다.


커피머신 너머에서 도윤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봤다. 라떼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모습, 시럽을 넣을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아무것도 넣지 않고 마시는 방식. 그녀는 말보다 긴 숨으로 하루를 견디는 사람 같았다.


도윤은 그런 사람들을 오래 기억하는 편이었다. 조용한 사람은 쉽게 잊히지만, 쉽게 기억속에서 떠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날 커피숍 한편에서 조용히, 아주 작게 한 사람의 마음이 따뜻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지윤은 일주일 만에 다시 ‘더 슬로우’의 문을 열었다.


이번엔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택배가 잘못 온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집 안에만 있기가 싫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 조용한 공간에서 마시던 따뜻한 라떼가 자꾸 생각났다.


지윤의 집 근처에도 프랜차이즈 커피숍이야 얼마든지 있다.


걸음을 옮기기만 해도 익숙한 로고와 같은 간판이 눈에 띄고, 비슷한 가구 배치와 음악이 이어진다. 주문 방식도, 사람들의 태도도, 말투도 다 어디서 본 것 같아, 편리하지만… 어딘가 마음이 닫힌 곳 같았다.


서지윤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커피는 매일 마셔도, 그 공간이 편한 건 또 다른 얘기야."


처음 ‘더 슬로우’를 찾았을 땐, 단순한 실수였다. 잘못 배달된 택배를 찾으러 오는 길이었고, 그날도 주변엔 프랜차이즈 커피숍들 사이로 이곳만 조용히 숨어 있었다.


작은 간판, 통유리 너머 보이는 나무빛 조명, 그리고 무심한 듯 따뜻하게 눈을 마주친 남자의 인사.


그날 이후로 지윤은 생각보다 자주 이곳을 찾게 됐다. 이곳에는 주문을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 시간 제한을 무언중에 암시하는 눈빛도 없었다. 커피 한 잔을 다 마신 후에도 굳이 나가야 할 이유가 없고, 자리를 빼달라고 눈치를 주지도 않았다.


‘더 슬로우’의 커피숍 주인은, 오히려 그런 사소한 것들을 굳이 묻지 않아서 좋았다.


바쁜 음악도, 시끄러운 진동벨도 없는 공간. 내가 있다는 걸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되는 이곳은, 프랜차이즈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작은 호흡 공간이었다.


커피를 주문하면 직접 자리로 가져다주는 방식도 지윤에게는 따뜻하게 느껴졌다.


‘더 슬로우’라는 이름이 괜히 붙은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커피 맛 때문에 오겠지만, 서지윤은 그 느린 속도 덕분에 이곳을 좋아했다.


서둘지 않아도 되는 공간. 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혼잣말처럼 커피를 한 모금 마셔도 되는 곳이 바로 이 곳이었다.


지윤이 ‘더 슬로우’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전히 낮고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카운터 너머에는 지난번처럼 커피를 내리던 남자가 있었다.


지윤은 말없이 다가가 조용히 주문했다.


“라떼 한 잔이요. 따뜻하게요.”


그리고 이번에는,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안쪽 조용한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고 나서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아무것도 꺼내 놓지 않았다. 책도, 핸드폰도… 지윤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창문 밖을 보니, 맞은편 빵집 간판에 햇살이 얹혀 반짝였다. 지윤은 아무 이유 없이 그 장면을 오래 바라봤다.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랜만이었다.


도윤은 라떼를 조용히 내려주며 짧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쉬러 오신 거 같네요.”


그 말에 지윤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풀어졌다.


“네… 딱히 할 게 없어서요.”


그녀는 조금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 날, 가끔 필요하죠.”


그의 말은 지나치게 친절하지도, 건조하지도 않았다. 딱 그만큼, 지윤이 더 말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였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도 지윤은 한동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자신이 처음엔 불안했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그 불안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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