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더 슬로우’의 오전 공기는 조금 붉었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흐리게 했고, 광장동 골목은 사람들 목소리도 평소보다 작게 느껴졌다.
서지윤은 오전 일찍부터 어딘가 허전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갔고, 설거지도 끝냈고, 집안은 평온했다. 하지만 마음은 자꾸만 무언가를 놓친 느낌에 허공을 더듬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그곳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짧은 인사 뒤에 라떼를 주문했고, 익숙해진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누군가 먼저 앉아 있었다.
검은 점퍼에 캡 모자를 눌러쓴 남자. 그는 책을 펼쳐놓고 있었지만, 시선은 책 너머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지윤은 잠깐 멈췄다가 다른 구석 자리에 앉았다. 자주 오지는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두고 있던 자리를 누가 차지하고 있는 기분은 묘하게 서운했다.
도윤은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윤이 오늘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시간이 더 길다는 걸 느꼈다.
정하민은 책을 읽는 척했지만, 누군가 자신이 앉은 자리 앞에서 순간 멈칫하다가 다른 자리로 이동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그는 그 자리에 왜 그녀가 앉으려 했을까를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자리를 옮겨야 하나 잠시 고민하기까지 했다.
정하민은 커피숍에 공부를 하러 오지만, 정작 공부에 집중은 되지 않고, 사소한 모든 것들에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지윤은 오늘도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왔지만, 이상하게도 누군가의 존재 때문에 자신이 낯선 공간에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편함은 아니었지만, 편안하지도 않은 상태가 지속됐다.
그때 도윤이 라떼를 가져다주며 조용히 말했다.
“다음엔 미리 오신다고 연락 주시면 조금 더 좋은 자리 예약해 둘게요.”
지윤은 놀란 눈으로 도윤을 바라봤다. 그는 웃지도 않았고, 지나치게 다정하지도 않았지만 그 말은, 묘하게 따뜻했다.
정하민은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췄다. 그 말을 들었다는 듯… 하지만 반응하지 않는 척했다. 그 순간, 세 사람 사이엔 어떤 대화도 없었지만 공기 속엔 조용한 교감이 흘렀다.
지윤은 결국 말없이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나가기 전 잠깐, 그 남자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정하민도 고개를 들었다. 딱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스쳤다. 눈인사는 없었지만 그 짧은 마주침이 마치 “당신도 여기 있었군요”라는 인사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지윤은 전단지를 다시 꺼내 펼쳤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노트북을 켜고 재취업 강의 신청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나만 이런 줄 알았는데… 다들 자기 자리 하나쯤은 지키고 싶어서 오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