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오후, '더 슬로우'에 이세윤이 조용히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처럼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치고 조용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커피 한 잔, 이어폰, 그리고 집중된 시선. 그 공간은 세윤만의 작은 피난처 같았다.
그때, 문이 또 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가게를 가득 채웠다.
"아휴, 사장님~ 오늘은 날이 너무 습하죠?"
오현숙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활기차게 주문을 하고, 카운터 옆을 지나 세윤 쪽을 흘끗 보더니 갑자기 다가갔다.
"어머, 아가씨 여기 자주 보이던데~ 혹시 디자이너예요?"
세윤은 당황한 듯 고개를 들고 조용히 대답했다.
"네… 디자인 일 하고 있어요."
현숙은 벌써 옆자리에 앉을 기세였다.
"요즘은 디자인도 프리랜서가 대세라며? 근데 그게 좀 불안정하잖아요. 정규직도 알아봐야지~ 우리 큰 딸도 디자인 쪽 생각했었는데, 내가 뜯어말렸지 뭐야. 안 그래도 요즘 젊은 사람들 힘들다는데, 안정된 게 최고라니까."
세윤은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얼굴엔 금세 경직된 기색이 번졌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끝이 노트북 위에서 멈췄다.
"요즘 젊은 친구들 보면 너무 쉽게 지쳐 보여. 자존감, 멘탈 어쩌고 하는데, 사실은 끈기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 하하~"
도윤이 커피를 들고 조용히 다가왔다. 세윤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그는 알아챘다.
"현숙님, 여기 커피 나왔습니다. 자리로 가져다 드릴게요."
오현숙은 말하던 도중 멈칫했다.
"어머, 사장님이 이렇게 챙겨주시네. 아유, 괜히 떠들었나~"
그녀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세윤은 조용히 커피잔을 들며 도윤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해요. 사장님."
도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괜찮아요. 가끔은 거리감이 필요한 순간이 있죠. 그럴 땐 제가 잠깐 가림막이 될게요."
세윤은 그 말에 살짝 웃었다. 그리고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손끝이 다시 그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윤은 조용히 카운터로 돌아갔다. 가게 안은 다시 각자의 속도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여전히 크고 활기찼고, 누군가는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며칠 뒤, 현숙과 세윤은 우연히 같은 시간대에 커피숍을 다시 찾았다. 세윤은 평소처럼 조용히 노트북을 켜고 앉았고, 현숙은 들어오자마자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아가씨, 또 있었네~ 그때는 좀 미안했어요. 내가 괜히 참견했나 싶어서~ 근데 말이죠, 진짜 요즘은 자기 팔자도 자기가 개척해야 하잖아요?"
세윤은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표정은 무너졌다. 그녀는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짧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하지만 오현숙은 멈추지 않았다. 이번엔 의자까지 끌어앉으며 말했다.
"근데 프리랜서라고 했었나? 아유, 참. 우리 큰 딸은 요즘 인턴이라도 알아보라고 제가 등 떠미는 중이거든요. 아가씨도 그렇게 좀 밀어줄 사람이 있어야지. 혼자 너무 끌고 가려면 힘들어요."
세윤은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그냥… 좀 내버려 두시면 안 될까요? 전 조용히 제 일 하러 온 거예요."
현숙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어머, 난 그냥 도와주고 싶어서…"
"근데 전 그게 도움이 안 돼요. 아줌마 기준이 다 맞는 것도 아니고요."
가게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도윤은 상황을 살피다 조용히 다가왔다.
"현숙님, 제가 오늘은 커피 한 잔 서비스로 드릴게요. 여기 앉아서 드셔보세요. 제가 새로운 원두 테스트 중인데 의견 들으면 좋겠어요."
오현숙은 당황한 채로 자리에 돌아갔고, 세윤은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노트북을 조용히 열었다. 도윤은 그녀의 옆에 컵을 놓으며 말했다.
"가끔은 침묵도 배려입니다. 그리고… 마음 다치게 해서 죄송해요. 여기선 누구든 편히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세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도윤은 조심스레 커피 머신 앞에 섰다. 균형을 잡는 일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