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온도_29

by 슬로우

방정심은 ‘더 슬로우’ 커피숍의 건물주였다. 겉으로 보기엔 고지식하고 냉정해 보이는 노년의 여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계산 빠른 할머니'라 부르기도 했지만, 정작 가까이서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차도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사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 커피숍보다 훨씬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윤이 대기업에 다니던 시절, 패션 브랜드 영업팀에서 일하던 때였다. 정심은 그 브랜드의 대리점을 내고 싶다며 본사로 상담을 왔다.


패션 브랜드 대리점을 해본 경력이 한 번도 없었던 그녀는 투박하지만 진지한 눈빛으로 대리점을 오픈할 수 있는지와 어느 지역에 오픈하면 되는지, 수익은 많이 나는지 등 기초적인 것부터 하나하나 물었고, 도윤은 그 질문에 성실하게 답했다.


“나 이거, 해볼 수 있을까요?”


처음 만났던 날, 정심이 물었다.

도윤은 진지하게 상담에 응했다.


“사장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쉽지 않으세요. 이쪽 경력도 전혀 없으시고, 나이도 좀 있으셔서…”


도윤은 자칫 상대방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해드리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하시고 싶으시다면, 저도 적극적으로 도와드릴게요. 매장 위치도 같이 찾아봐드리고, 시장 조사도 같이 나가 드릴게요.”


그렇게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적당한 매장을 찾아 돌아다녔고, 상권도 분석하고, 실질적인 운영에 대한 방법도 고민했다.


도윤에게는 그저 회사 업무였지만, 정심은 그 속에서 묘한 신뢰감을 느꼈다. 사실, 정심은 이 브랜드 말고도 여러 브랜드에서 상담을 받아보았지만 대부분 어렵다는 말만 형식적으로 내뱉고 빨리 상담을 끝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도윤에게 신뢰가 갔다.


결국 대리점 오픈은 성사되지 않았다. 정심이 감당하기엔 처음 도전하는 대리점 사업의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만두려고 해. 욕심만으로는 안 되겠더라고.”


정심은 그렇게 말했다.

도윤은 그 말을 듣고도 끝까지 친절했다. 마지막 미팅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다른 좋은 기회가 생기면, 그때 연락 주세요.”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정심은 명절 때면 도윤에게 문자를 보냈다.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일 많으실 텐데, 잘 챙겨 드세요.’


그리고 몇 년 후. 도윤이 회사를 나왔다는 소식을 정심은 우연히 알게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윤이 갑자기 연락을 끊고 잠적하다시피 했을 때였다.

회사를 나와 방황하던 시기, 가까웠던 동료들조차 연락이 닿지 않는 그 시간 동안 정심만이 몇 번이고 안부를 물었다.


한 번은 도윤이 걱정되는 마음에 직접 회사 근처까지 찾아갔다. 물론 이미 퇴사한 도윤을 만날 수 없는 걸 알지만, 그래도 도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해서 무작정 찾아간 것이다.


결국 정심은 반나절을 허탕치고 돌아왔지만,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도윤에게 연락이 왔다. 그동안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하다며…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며… 풀이 죽은 잔잔한 목소리로 전화기 너머에서 소식을 전해왔다.


도윤이 어렴풋이 커피숍을 해볼까 고민하던 시기였고, 마침 정심의 건물 1층, 오래 비어 있던 자리가 있었다.


“커피숍 해볼 거라고? 매장 계약은 했어? 우리 건물에 자리 있는데… 도윤씨가 들어오면 왠지 잘할 것 같아서.”


그 말 한마디에 도윤은 망설였다. 하지만 정심은 별다른 조건도 내세우지 않았다.


“네가 여기 들어오면, 나는 그냥… 한 번쯤 와서 앉아 있으면 될 것 같아서.”


도윤은 그 말에 전화기 너머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더 슬로우’라는 이름의 커피숍은 시작되었다.


정심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계산 빠르고, 거칠게 말하지만 언제나 도윤에게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무 말 안 해도, 그 인연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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