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기, 그 세 번째 이야기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떤 상황에서 의미 있는 말과 행동을 한다. 허튼 소리나 불필요한 언행을 그들은 결코 하지 않는다. 우리의 현실 속에선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작품 안의 그들은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아니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작품을 구상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하는 내 입장에선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봐야 맞는 표현이겠다. 가령 누군가의 말처럼 소설 속의 한 인물의 집 벽면에 걸린 한 자루의 공기총이 있다면 그것이 단지 장식용이어선 안 되듯 등장인물의 다양한 언행은 모두 의미 있고 복선의 의미를 내포한 것이라야 한다. 공기총을 언급한 그 작가는, 어떤 소품이라도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저 벽에 걸린 총이 아니라, 작품이 끝나기 전에 반드시 그 총으로 누군가를 쏘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쓰임새가 없다면 그 공기총은 작품의 배경 속에서라도 등장하면 안 된다는 것이겠다. 그런 점에서 보면 마찬가지로 인물의 말과 행동은 그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제시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일단 소설의 원론적인 이야기는 젖혀 두더라도 등장인물의 언행에 있어서도 그의 말은 주효하다. 인물의 언행은 작가인 '나'를 대신해 작품을 이끌어 간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 스토리를 풍부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암시한다. 그의 언행은 적절한 갈등을 유발하고 갈등을 더 깊고 난해하게 만들어 간다. 또한 시간의 흐름과 배경의 변화 및 장면의 전환과 함께 기어이 갈등을 해결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다.
그만큼 중요한 의미와 역할을 하고 있으니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인물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소설을 구상하는 단계에서 전체 스토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윤곽이 드러나면 대체로 나는 인물 선정 문제로 고심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인물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그건 바로 알맞은 이름 부여하기다. 이름은 고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우리가 불러 주었을 때 우리에게 와 비로소 의미를 띠는 것이다. 어쩌면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일 수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니겠나 싶다.
더러는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냐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철수라고 부르든 영희라고 이름을 짓든 무슨 상관이냐고 할 것이다. 정말 사실이 그러하다면 이름을 갖다 붙이는 일 따위로 고민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의 이름과 관련해 몇 가지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이름의 가치라는 측면에서 이름을 지으려 할 때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너무 흔한 이름을 부여하는 건 지양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이다. 사실 이 점은 논란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 부분이다. 자칫하면 흔한 이름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겠다. 그러나 82년생 김지영의 '지영'이나 특정한 연도에 태어난 동명이인들의 온라인 모임이 있을 정도로 흔한 이름인 '지훈'과 같은 이름들은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그들의 이름이 현실에서도 가치가 떨어진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어쩌면 그만큼 흔하다는 건 남자의 혹은 여자의 대표성을 이미 띠고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다만 적지 않은 소설을 쓰는 동안 너무 흔한 이름을 등장인물에게 부여하는 건 작품을 다소 가볍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세상과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철수도, 영희도, 그리고 바둑이도 함께 뛰어노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그건 오래전 교과서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작품 속에서 복잡하고 다변한 일을 겪고 버텨낼 내공을 부여하기 위해 조금은 더 단단한 이름을 주고 싶을 뿐이다. 등장인물의 이름 짓기가 내게 작지 않은 고민거리가 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다음으로 조사, 즉 격조사와 이름과의 상성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이 문제는 대략 세 가지 정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1) 주격 조사(보조사)와 이름과의 상성 문제
주격 조사는 '이/가', 주격 보조사는 '은/는'이다. 문장 속에서 체언 즉, 명사와 대명사 그리고 수사 등과 결합해 해당 낱말을 주어로서 기능하게 한다. 실제로 구어체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나, 문어체에선 묘한 불협화음을 일으키곤 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예시 문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철우가 학교에 갔다. (O)
영섭이가 점심을 먹었다. (O) (?)
이 예시에서 두 번째 문장에 굳이 물음표를 붙인 이유는 철저한 구어체적인 문장이기 때문이다. 즉 말로 하는 건 문제가 없어도 글로 표현할 때에는 올바른 어법에 따른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이 문장들을 작품 속으로 옮겨 놓는다면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는가? 다시 말해서 두 번째 문장이 부자연스럽지 않느냐는 것이다. 올바른 어법으로 표현하려면 '영섭이가 점심을 먹었다'가 아니라 '영섭이 점심을 먹었다'로 쓰는 게 맞다. 왜냐하면 이름에 있어서 끝 글자의 받침 유무에 따라 활용의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이 갈리기 때문이다. 즉 받침이 있든 없든 '이'를 따로 붙이면 안 된다. 그런데 영어식 이름은 묘하게도 이 문제에서 그저 자유로워 보인다.
Nancy가 학교에 갔다. (O)
Kevin이 점심을 먹었다. (O)
(2) 목적격 조사와 이름과의 상성 문제
'을/를'과 같은 목적격 조사는 문장 속에서 체언과 결합해 해당 낱말을 목적어로서 기능하게 한다. 이 역시 앞의 문제에서 예외일 수 없다. 즉 등장인물의 이름의 끝 글자에 받침이 있든 없든 '이'를 붙이면 안 된다.
학교에서 철우를 본 사람이 없었다. (O)
영희가 영섭이를 좋아한다. (X)
영희가 영섭을 좋아한다. (O)
사실 두 번째 문장이 작품 속에서 아예 등장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스토리 위주의 글을 읽어 본 경험에 따르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동화에서 간혹 '영희가 영섭이를 좋아한다'라는 식으로 '이'를 덧붙이는 걸 보기도 한다. 만약 일반 소설에서 이렇게 표현된 것을 봤다면 그건 작가가 소설적 문법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영어식 이름은 이번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왜 그런 건지 그 이유를 솔직히 모르겠다.
학교에서 Nancy를 만났다.(O)
Nancy가 Kevin을 좋아한다. (O)
(3) 관형격 조사와 이름과의 상성 문제
대표적인 관형격 조사는 '의'인데, 국어사전을 보면 문장 속에서 체언과 결합해 사물에 대한 소유의 주체, 여러 구성원을 소속하는 주체, 선행하는 체언이 어떤 본연적이거나 임의로운 속성 또는 드러나는 현상의 주체, 어떤 행동이나 상태 변화 또는 결과의 주체, 어떤 행동이나 작용의 대상, 어떤 행동이나 현상의 원인, 그리고 부분에 대한 전체 또는 유효한 범위 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거두절미하고 다음과 같은 예시 문장을 들 수 있다.
민희는 철우의 동창생이다. (O)
영희는 영섭이의 동생을 좋아한다. (X)
영희는 영섭의 동생을 좋아한다. (O)
학교에서 Nancy의 동생을 만났다.(O)
Nancy가 Kevin의 동생을 좋아한다. (O)
앞의 두 가지 경우처럼 영어식 이름은 이번에도 전혀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매번 영어식 이름을 쓸 수도 없다. 외국인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이상 멀쩡한 우리 이름을 두고 그럴 필요는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간혹 드라마에서 보듯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럽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면 한다.
김역경: 온갖 고난에 빠져 살아가는 인물
이대출: 대출과 연체 등으로 살아가는 인물
나공주: 주변 사람들을 시종을 부리듯 하며 자신이 공주인 것처럼 행세하는 인물
박재수: 어떤 일을 할 때 심할 정도로 요행이 따르는 사람
물론 이런 이름은, 이름만 봐도 등장인물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는 장점은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누가 이름을 이렇게 짓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이름은 튀지 않는 데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이런 이름들을 활용해야 한다면 일부 코믹 소설에 한정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등장인물의 이름이 소설의 구상 및 지필 단계에서 왜 문제가 되는지 몇 가지 점에서 짚어 보았다. 누군가는 별 것도 아닌 걸로 왜 그렇게 깊이 고민하냐고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앞에서 말했듯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는 건 지양해야 한다.
영섭이가 점심을 먹었다.
영희가 영섭이를 좋아한다.
영희는 영섭이의 동생을 좋아한다.
앞의 체언에 받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저 받침 하나를 덧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선 곤란하다. 멀쩡한 글을 써 놓고도 맞춤법에 흠이 있으면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듯, 이렇게 별 것 아닌 듯 보이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이름 만으로 특징이 잘 드러나게 하려면 그 어떤 이름도 함부로 지을 순 없으리라.
글쓰기 관련 팁 2.
작은 수첩이나 공책 등에 지금까지 자신이 사용한 등장인물의 이름을 한번 적어보자. 이미 사용했던 이름을 다시 사용하면 안 될 이유는 없지만, 가능한 한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는 게 좋다. 만약 소설을 구상하고 있거나 아직 한 번도 써 보지 못했다면 미리 수 명에서 십수 명의 이름을 생각해 놓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