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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 이야기 1

소설 쓰기, 그 네 번째 이야기

by 다작이

글을 쓰다 보면, 특히 소설이라는 장르의 글을 쓰다 보면 거의 첫 문장에서 모든 게 판가름 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경우가 꽤 있다. 어떻게 보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건 우리가 일반적인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만 봐도 알 수 있긴 하다. 모든 참가자들의 노래나 춤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그들 스스로가 우리에게 증명해 보인다. 불과 몇 초간의 노래나 춤만 봐도 다른 참가자와는 수준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는 이들이 있다. 관객의 입장에서 또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만 봐도 그들이 최종 Top7이나 Top3에 들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까지도 판별하게 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무대가 우리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주기 때문일 테다.

어쩌면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이 이와 같은 강렬한 임팩트를 열렬하게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과 같은 바쁜 세상에 못 쓴 글을 기꺼이 읽으려 하는 독자는 단연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가타부타할 이유는 없다.

조금은 엉뚱하다고 해야 할까, 강렬한 임팩트를 원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많은 사람들이 그 임팩트를 첫 문장에서 찾는 것 같다. 그건 앞에서 오디션 참가자의 경우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문제다.


사실 첫 문장의 중요성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중요성이 더 짙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아는 어떤 지인은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한두 쪽만 읽어보고 선택한다. 왜 그렇게 하냐고 물었더니 처음에 재미없다고 판단되는 책은 끝까지 재미없더라고 당당하게 얘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너무 첫 문장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첫 문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그 중요성은 조금도 희미해지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소설을 쓸 때에는 거의 무의식적이다시피 첫 문장에 신경을 쓰게 된다. 즉 신경을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해서 안 쓰이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이건 어쩌면 신춘문예 등의 각종 공모전에서 이루어지는 예심 및 본심, 그리고 최종심 등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공모전 응모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래도 지방일간지보다는 중앙일간지에 응모 작품이 더 많이 몰린다거나 마찬가지로 문예지 역시 지방에서 발행하는 것보다는 중앙에서 발행하는 것들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똑같이 '등단'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당선증'을 받는다고 해도 시쳇말로 마이너 급보다는 메이저급의 무대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겠다. 뿐만 아니라 메이저급의 일간지나 문예지를 통한 등단은, 튼튼한 자본력과 확실한 광고 루트를 통해 당선자의 작품 및 이름이 보다 더 넓고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기에 작가지망생들은 더더욱 선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중앙일간지나 유명한 문예지 등에 투고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 편의 작품으로 혜성처럼 등장해서 한동안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낸다면, 그건 창작자의 입장에서 가히 싫어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대개 신춘문예 공모전이 열리면 중앙일간지는 단편소설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해마다 2~300편 정도씩 작품이 들어오는데, 지방일간지의 경우엔 그보다는 적지만, 그래도 족히 100여 편은 들어온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적으면 100여 편에서 많으면 300여 편에 육박하는 작품이 투고되는데도 불구하고, 대체로 예심에 배정되는 심사위원은 대개 2~5명 정도 선이라는 것이다. 최고 많은 인원이 배정되었을 때 6명까지 배정된 것을 본 적은 있지만, 대체로 이 정도 선에서 결정이 되는 모양이다. 물론 그 일간지나 문예지의 재정규모나 인지도에 따라 미미한 업체일 때에는 2명이 배정된 걸 본 적도 있었다.


자, 그러면 최소 100편이 들어온다고 가정하고, 심사위원을 5명이라고 잡아보자. 대체로 단편소설은 A4 10여 장 내외이니 그렇게 들어온 작품만 해도 무려 1000장(중앙일간지의 경우엔 3000장)에 가까운 분량이 된다. 그 어마어마한 분량을 일단 배정된 심사위원이 나누어서 읽는다. 단순하게 계산해 봐도 심사위원 1인당 A4 200장(중앙은 600장) 가까이 읽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작품 편수로는 20편(혹은 60편) 정도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이들 다섯 명 각자가 가져간 20여 편의 작품, 즉 A4 200여 장에 이르는 원고 뭉치에서 두세 작품 정도를 선별해 낸다. 그렇게 하고 나면 이제 열 편에서 열다섯 편 정도의 작품만 남는다. 물론 나머지 작품들은 예선에서 탈락한 작품이 되겠다. 여기까지가 주로 예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심을 끝낸 심사위원들은 심사를 통과한 작품들을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고 물러난다.

그러면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예심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각 심사위원이 받은 20여 편 정도(중앙은 60편)를 언제 다 읽느냐고 말이다. 이때 과연 심사위원들은 투고된 모든 작품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까,라는 궁금증이 생길 법하다. 절대 그럴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한다.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짧으면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에, 혹은 길면 열흘 남짓 주어지는 예심 기간 내에 전 편을 완독 후 심사한다는 건 극히 불가능에 가깝다.

이때 가장 요긴하게 사용되는 방법이 바로 앞부분, 즉 작품의 일부만 읽는 것이다. 공모전에 심사했던 어떤 심사위원은 각 응모자의 작품의 첫 장 중의 반만 읽어봐도 충분히 심사가 가능하다고 했고, 조금 더 인내심을 갖고 읽는 사람도 앞부분 두 장 정도뿐이라고 했다. 시쳇말로 '장사 하루 이틀 하냐'라는 말의 이치를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맨 앞장만 읽어 봐도 그 작품을 끝까지 읽어야 할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운명인지를 충분히 가려낼 수 있다는 뜻이겠다.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가혹하다는 말도 있는데, 대체로 첫 장의 절반 정도를 읽기도 전에 해당 작품이 쓰레기통으로 갈지 옆으로 잠시 밀쳐둘지가 결정된다고 했다. 그나마 작품에 큰 임팩트는 없어 보여도 '오, 이건 좀 읽어 볼 만하네'라는 생각이 들면 간혹 두세 장을 읽기도 한다지만, 그런 경우는 잘 없다고 한다.


자, 이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첫 문장에 목을 매는지 그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쉽게 말해서 처음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않으면 아무리 정성을 들여 썼건 혹은 수십 번이나 수백 번의 퇴고를 거쳤건 간에 그 작품은 쓰레기통으로 가게 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예심에서 본심으로 바뀔 때 심사위원도 바뀐다. 그 인원은 일간지나 문예지마다 상이한데, 대체로 2~4명 정도 배정된다. 이때에는 소설가 2인과 문학평론가 2인과 같은 식으로 배정된다고 한다. 본심에서는 예심에서 올라온 총 10여 편에서 15편 정도의 작품을 두고 돌려가며 읽는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본심의 각 심사위원들은 한 작품 정도만 추려낸다. 그러면 이제 고작 2~4편의 작품이 남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 나머지 96편은 어디에 가 있을지를 물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말은 잠시 보관했다가 심사가 끝난 후 폐기한다고 하지만, 곧장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확률이 높다. 창작자 본인에겐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인지 몰라도 심사위원에겐 그저 허섭쓰레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겠다. 그래도 그나마 본심에서는 작품을 비교적 상세하게 읽는다고 한다.

아무튼 최종적으로 남은 몇 편의 작품으로 이제 심사위원들은 심도 있는 논의의 과정을 거친다. 이른바 이것이 바로 최종심 과정이다. 적어도 여기까지 오른 작품들은 당선작과 대동소이하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에 기회만 되면 언제든 등단이라는 영예를 안을 만한 기량을 가진 작품이라고 인정받게 된다. 가령 신춘문예 같은 경우에 이 작품들은 당선작이 발표되는 신년 1월 1일 아침 신문에, 혹은 일간지마다 다르긴 하나 최소 1월 3~4일 전에, 신문지면에 투고자의 이름 석 자와 작품명과 심사평이 실리게 된다.


어떤가? 애써 투고한 나의 작품이 거의 최종 단계까지 심사위원들의 손에 있을 확률이 너무 낮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기껏 해 봤자 3/100 정도의 확률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에서 왜 ‘3’이라는 숫자가 도출되었냐고 묻는다면, 당선작 외에도 최소 한두 편의 작품이 ‘아쉽게도 떨어진 작품’이라며 심사평과 함께 언급되기 때문이다. 좀 더 심하게 얘기하자면 이미 당신이 등기로 작품을 보내는 순간부터 그 소중한 작품이 쓰레기통으로 곧장 향할 확률이 97/100이나 된다는 뜻이다. 물론 당선작이 될 확률은, 지방일간지는 1/100, 그리고 중앙일간지는 대략 1/300 정도로 보면 된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대충 봐도 우리가 첫 문장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첫 문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의 공모가 임박하면 관련 기사가 노출이 되고, 그때마다 심사위원을 했었던 이들은 첫 문장에서 승부를 보라는 말을 심심찮게 하곤 한다. 물론 대형 서점에 가서 둘러보기만 해도 첫 문장을 잘 쓰는 방법에 대한 책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건 마치 직장에 처음으로 출근하는 날, 첫 단추를 잘 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소설을 처음 써 보는 초심자나 몇 편 써 보지 않은 미숙련자에게는 첫 문장에 지나치게 공들이는 방법을 결코 권하지 않는다. 몸 구석구석은 제대로 씻지 않은 상태에서 타인의 눈에 보이는 부분만 씻은 뒤에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 싶기 때문이다. 거기에 적당히 좋은 향이 풍기는 향수를 몇 방울 뿌렸다고 해서 몸 전체에서 은은한 향이 날 리가 없을 것이다. 일시적으로 타인의 눈을 피해 숨겼던 그 깨끗하지 못한 부분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그건 등단이라는 영예를 안고도 자신의 처녀작이 바로 최종작이 되는 작가가 전체의 90%에 육박한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속된 말로 작품의 처음에서 보였던 그 텐션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없었다는 의미겠다. 그러면 이렇게 요약해도 되지 않을까?


첫 문장에 들이는 그 노력을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 유지할 수 없다면 첫 문장에 매달리는 일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또 한 작품이 끝났더라도 다음 작품에까지 그 긴장감을 유지할 수 없는 경우에도 마찬가지겠다. 작품의 전체가 아닌 어느 한 부분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건,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도, 혹시 완성에 이르는 동안에도 그 어떤 하등의 도움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 소설 쓰기 팁 3.


그동안 당신이 읽어 본 소설 중에 몇 권 정도만, 그 작품의 첫 문장을 수첩이나 노트 등에 옮겨 적어보자. 그리고 생각해 보자. 정말 그 각각의 문장이 당신으로 하여금 그 작품을 끝까지 읽게 했는지, 아니면 그와는 별개로 당신이 완독한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

만약 여력이 더 있다면, 그 주옥같다던 첫 문장을 당신의 방식으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바꿔서 써 보기를 바란다. 물론 그 멋진 당신만의 문장도 함께 메모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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