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받은 외국인

– 낯선 곳에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삼총사




처음 현지인의 결혼식에 초대받은 건, 첫아이가 인터내셔널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결혼의 주인공은 아이의 담임 선생님. 인상이 따뜻하고 유쾌했으며, 아이들이 무척 따랐던 능력 있는 젊은 여선생님이었다.

나에게도 그녀는 특별한 존재였다. 첫아이의 첫 담임 선생님이자, 모든 것이 낯설던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던 고마운 사람. ‘금쪽같은 내 새끼’를 처음 맡기는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같기에, 나도 자주 이것저것 묻곤 했다. 귀찮을 만도 했을 텐데도, 그녀는 항상 성심껏 답해주었다.

그런 선생님의 결혼 소식은 나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초대장을 받고 나니 걱정이 앞섰다.
‘뭐 입지? 축의금은 얼마가 적당할까?’
처음이라 모든 게 낯설었지만, 다행히도 든든한 현지인 친구 Dwi(두이)와 Kristina(크리스티나)가 있었다. 우리는 유치원 친구 엄마들로 맺어진 삼총사였다. 셋이 붙어 다닌 시간이 벌써 3년, 그들의 조언은 언제나 믿음직했다.

드레스코드는 ‘세미 파티룩 또는 전통 바틱’이라고 했지만, 입어본 적 없는 스타일이라 옷장 앞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눈에 띈 건, 허리 밴드가 넓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치마. 평소엔 손도 대지 않던 그 치마를 가슴까지 끌어올려 드레스처럼 입고, 짧은 카디건을 걸쳐 어깨를 가렸다. 나름 정성껏 꾸며 신은 건 5cm 흰 구두.

축의금은 보통 20만 루피아가 적당하다고 했지만, 감사한 마음을 담아 50만 루피아를 정성껏 봉투에 넣었다.

결혼식 당일, 우리 꼬마 왕자님과 공주님도 나비넥타이와 예쁜 원피스로 멋을 냈다. 들뜬 마음으로 도착한 그곳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테이블은 있었지만 의자가 없었고, 에어컨도 없는 야외에서 진행된 스탠딩 파티. 오후 시간대의 더위와 모기떼 속에서 아이와 나는 꽤나 고전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구두 대신 샌들을 신을 걸…’

하지만 그런 불편함조차도 내 첫 인도네시아 결혼식의 즐거움을 앗아가진 못했다. 전통 의상을 입은 신랑신부, 특히 신부의 M자 모양으로 정갈하게 정돈된 이마 머리카락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은 무대 중앙에 앉아 하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피곤할 법도 했지만 내내 환한 미소였다. 결혼식이 3일간 이어진다고 들었는데, 내가 초대받은 날은 둘째 날이었다.

예식 후엔 하객들이 뷔페 음식을 담아 스탠딩 테이블에서 자유롭게 식사하고 인사를 나눴다.
“이건 뭐야?”
“이건 어떤 재료로 만든 거야?”
나는 친구들에게 연신 묻고 웃으며, 처음 접하는 음식들을 맛있게 먹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리고 2년 뒤, 또 하나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번엔 선생님의 아버지 장례식이었다.

검정 옷을 입고, 삼총사는 다시 뭉쳤다. 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날은 충격이 컸다.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의 시신을 본 날이었다.
간이침대 위, 정갈한 옷을 입고 누워 계신 선생님의 아버지는 어두운 피부색과 차분한 표정을 지니고 계셨다. 몸 아래엔 50cm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얼음 덩어리들이 있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인도네시아에선 무더운 기후 탓에 장례식을 길게 끌지 않는다. 보통 하루 내로 화장하거나 매장한다고 했다.

그녀의 집안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음을,

나는 그제야 눈치챘다.

결혼식과 장례식. 기쁨과 슬픔.
그 두 가지 모두를 함께한 우리는, 그날 진짜 가족처럼 가까워졌다.

2025년,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건 작은 유치원을 열어 운영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그녀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낯선 곳에서 초대받는다는 것은 단지 자리에 함께하는 것을 넘어, 마음속으로도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이방인에서 ‘우리’가 되어가는 그 여정,
그 첫걸음을 함께해 준 그녀.


그리고, 두이, 크리스티나. 나의 삼총사.
그 시절 내게 가장 따뜻한 안내자였던 그들이 있었기에,
나는 이 낯선 땅에서 '가족'이 되어가는 첫걸음을 외롭지 않게 내디딜 수 있었다.
진심으로 고맙다.




by 23년 차, 자카르타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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