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함을 버킷리스트 안에 넣어 두었다.
약 10여년 전 지인이 나에게 버킷리스트 100개를 적어보라고 했었다.
30대 하고싶은 열정이 지금보다 더욱 넘치던 시절, 나는 호기롭게 버킷리스트를 써내려갔지만 채 50개 정도가 되고 나서는 더 이상 쓸 내용이 없었다.
내가 꼭 버킷리스트를 다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탓할 사람이 없고,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쓴다고 해도 나의 이유에 반박할 사람도 없었다.
첫 마음 같아서는 100가지는 물론 1,000가지도 더 쓸 것처럼 시작했으나 50가지 정도를 써보고 나서는 뭐가 더있을까 생각을 하고 있는 고민이 오히려 부끄러워졌다.
오히려 더 못쓰는 핑계거리를 발에 채이도록 늘어놓고 있는 나…
직장인의 매여있는 시간으로는 주어진 시간이 한정적이다. 현실적으로는 금전적 자금이 부족하다. 혼자하기 어렵다.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다. 이건 나로서 불가능하다… 스스로가 평화주의자인 척 또는 양심적인 사람인 듯한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밀고 나는 그래서 현실적인 나를 택했다 라고 버킷리스트를 마무리하던 나는 그냥 쉬운길을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글모임에서 버킷리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회자되면서 10년 전 작성해봤던 버킷리스트를 기억에서 꺼내어 내가 지난 10여년동안 얼마나 꿈을 이루고 지내왔던가 돌아보았다.
10년 동안에도 내가 이룬 것은 50여가지중에 대략 10가지내외 정도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 당시에는 나를 옭아매던 직장/육아의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리고 그저 새 옷이 더 마음에 드는 것 마냥 나를 갈아 입히고픈 버킷리스트 였을지 모르지만, 살다보니 삶의 우선순위에 밀려버린 그저 나의 허영심 가득한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스런 똑순이 덕분에 버킷리스트의 어원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bucket list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한 리스트 Kick the Bucket에서 유래하였다. 중세시대에 자살할 때 목에 밧줄을 감고 양동이를 차 버리는 행위에서 유래되었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삶은 양동이 위에 위태롭게 서있을 뿐 그 발 밑에 있는 양동이가 넘어지면 우리는 삶과 죽음의 교차점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닌가.
버킷 위에서 삶과 죽음 양면이 불안정적으로 존재해야 하고, 그럼에도 버킷을 가득 채우려는 우리의 사욕이 죽음의 한순간 앞에서는 한낱 부질없다는 생각마저 든다면 너무 회의적인 걸까?
하지만 버킷리스트는 나의 인생을 조금 더 멋지게 인도해주는 도전이고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란 점이 내 욕망의 바램을 잠재우고 달래준다.
나의 오랜 지인이자 정신적 위안의 동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신은 진짜 이 시대의 진정한 욜로 Yolo(You Only Live Once)다.’
잘못 이해하면 나에게 던진 욜로가 불편한 언어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만,
그녀가 한 말이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순번을 매긴 나의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일구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그녀였다.
그녀와 나, 우리 두사람은 모두 맞벌이 부부이며 동시에 워킹맘으로써 하루하루가 외줄타기 마냥 위태로운 매일을 살아내던 사람들이었다.
외롭고 지쳐가는 고단한 30대를 보내는 중에서도 우리 서로는 내 자신의 의미있는 삶을 찾고 있었다. 회사와 육아 두개의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루는 중이었으나 그 안에서 ‘나’를 찾는데도 게을리하지 않던 그녀와 나였다.
그녀는 늘 바쁜 와중에도 새벽 요가와 독서, 경제 공부에 늘 최선이었고(회사를 1년간 육아 휴직하고는 그 짧은 기간동안 공인중개사 면허까지 취득한 영특한 그녀), 나 역시 새벽운동과 가족여행, 부부/자녀 관계회복을 위한 마음공부에 최선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처지가 너무 비슷했고, 비슷한 또래의 자녀를 키우고 있었기에 서로가 시대적 유행어였던 ‘욜로’를 외쳤고, 매일을 나와 내 가족이 함께 이루고 싶은 것들을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다.
과거와 지금 내 삶의 패턴은 크게 다르지 않으나 변한 것이 있다면 30대의 시간이 무사히 지났고, 나는 몸과 마음에 나이가 조금 더 들었으며, 아이는 훌쩍 몸과 마음이 커서 손이 좀 덜 가고, 내가 혼자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예전보다 조금 더 많아졌다는 점이다.
지금의 나의 버킷리스트라고 한다면 책을 읽고(또는 누군가 책으로부터 얻은 통찰에 감탄하며 그 책을 따라 읽거나), 또 내가 읽고 좋았던 부분을 내 남편과, 내 아들과, 내 친구와 함께 나누는 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언젠가 외국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 중 한 가지가 그날 저녁 식사에 지인 또는 가족들과 나눌 대화 소재를 수집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언제 들은 것인지, 신뢰할 만한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서양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그들은 풍성한 대화의 재료가 항상 신선하고 또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을 것이란 예상이 된다.
최근 나와 남편의 대화소재도 책을 통해서 나오고, 책을 통해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다.
간혹 내 품에 들어온 단어 하나, 문장 한 귀절은 오래토록 나의 의식을 지배하기도 했다.
또 다른 가까운 지인이 나에게 물었다.
남편이랑 둘이서 있으면 어색하지 않느냐고… 여전히 재밌느냐고, 둘은 무슨 얘기를 하느냐고, 놀면 둘이서 도대체 뭐 하면서 노느냐고.
우리는 전날 읽었던 책을 이야기하거나, 드라마나 영화를 이야기하거나, 보이는(또는 보고싶은) 사물/생각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시시껄렁한 것도 이야기 하고, 별 생각없이 서로 좀 놀리기도 하도 말장난도 하며 그냥 길을 걷는다.
지금의 이 순간이 어쩌면 과거의 내가 그토록 갈망하고 소망했던 30대의 버킷리스트가 아니었을가 싶다.
무탈하고 편안한 하루, 다정한 대화, 공감을 담은 한마디, 따뜻한 눈빛, 가벼운 스킨쉽, 고갈되지 않는 대화, 신선한 자극, 함께 공유하는 경험, 세심한 배려, 가능성 있는 시도들, 칭찬과 용기…
조금 부족해도 소박하게, 그리고 서로를 아끼는 첫 마음 그대로 내 사람들을 아끼고, 우리의 조용한 삶에 만족하고 지내다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면 이보다 더 좋은게 있을까?
나의 버킷리스트는….
누군가처럼 나도 그저 무탈하게 내 곁에서 나와 동행해주는 내 삶의 반려자인 듯하다.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버킷리스트는 왜 버킷리스트가 되었는 줄 알아? 버킷은 Bucket 양동이를 의미하는데, 옛날에는 사람이 자살하려고 목을 매달고 죽을 때 또는 사형을 집행할 때 발받침으로 있던 것을 툭 치워버리면서 생을 끝맺음했다고 하잖어. 그 발받침이 bucket이었고, 그게 어원이 되서 죽기전에 꼭 이뤄야 할 일 또는 그러고 싶은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버킷리스트가 된거래”
“오~! 우리 하니가 엄청 똑똑해졌네, 그런건 어떻게 생각해냈대?”
“내가 하니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나 공부해왔어. 나 잘했어? 그럼 우리의 버킷리스트를 같이 만들어볼래?”
“그래. 뭐든 좋아. 나는 우리 둘이서 같이 한다는 것이 더 의미있는 거니깐. 우리 이쁜이가 똑똑해 졌어. 확실히 똑똑해 졌어”
그의 다정한 놀림은 오늘도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