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 아이는 오늘도 전속력이다.
“엄마, 다음 주에 애버랜드 가요!”
“엄마, 나랑 끝말잇기 해요!”
“엄마, 나랑 핫케잌 만들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이름은 ‘엄마’라는 호출음으로 울린다.
그 속도에 맞춰 걷다 보면 숨이 찬다.
숨이 차서 멈추면, 아이는 물음표 눈으로 쳐다본다.
“왜? 엄마 벌써 힘들어?”
나도 모르게 웃는다.
그래, 열 살은 뛸 때고
쉰 살은 숨 고를 때니까.
마흔한 살에 막내를 낳았다.
그때는 “이제는 좀 여유 있게 키우겠지” 하고 생각했다.
첫째와 둘째를 키우며 겪었던 시행착오,
그 모든 경험이 나를 ‘노련한 엄마’로 만들어줄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다시 시작된 육아는,
지식보다 체력, 인내심보다 컨디션이 더 중요한
완전히 새로운 챕터였다.
열 살인 아이는 체력으로 부딪치고
쉰 살인 나는 숨으로 버틴다.
아이의 눈은 반짝이고
내 눈은 피로로 자주 감긴다.
아이의 말은 끝이 없고
내 귀는 중간중간 멍해진다.
하루는 여섯 시에 시작된다.
아침밥을 차리고, 도시락을 싸고,
학교 갈 준비를 도와주고,
분주하게 현관문을 닫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그제야 집이 조용해지지만,
그 조용함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지 않는다.
빨래를 돌리고, 장을 보고, 업무를 처리하고,
머릿속에는 저녁 메뉴와 숙제 체크리스트가 떠다닌다.
그리고 오후가 오고,
아이의 발소리가 집 안에 퍼지는 순간
다시 내 몸의 전원이 켜진다.
“엄마, 나 배고파요!”
“오늘 체육시간에 게임했어요!”
“내일 발표 있는데, 같이 연습해봐요!”
아이의 말은 늘 신나고
엄마의 리액션은 늘 간신히 따라간다.
간식 내주고, 이야기 들어주고 나면
이제 본격적인 ‘저녁 미션’이 시작된다.
리코더 연습 10분,
영어 녹음 숙제 5분,
담임 선생님이 올린 영상 시청하고 활동지 작성,
가끔은 독서록까지 추가된다.
“이건 언제 다 해?” 하고 묻는 아이에게
“하나씩 천천히 해보자” 하고 대답하지만
속으론 ‘오늘도 전쟁이다’ 싶은 날이 많다.
책가방을 열면 알 수 있다.
정리정돈은 여전히 숙제다.
리코더 악보와 간식봉지, 끝이 닳은 연필들과
뚜껑 없는 사인펜들이 굴러다닌다.
필통부터 가방까지 하나하나 같이 정리하고,
아침독서할 책을 골라 넣는 걸 도와주고,
“이건 내일 가져가야 하니까 여기에 넣자”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다시 초등 1학년 엄마처럼 꼼꼼해진다.
이 모든 것을 끝내고 나면
아이의 눈이 감기고,
나의 어깨는 축 처진다.
그리고 밤이 오면,
아이의 눈이 감기는 시간에
나는 조용히 숨을 고른다.
거실에 앉아 눈을 감고 있으면
오늘 하루 아이에게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다시 재생된다.
“그렇게 하지 말랬지.”
“왜 또 딴짓해?”
“제발 좀 가만히 있어봐.”
그 말들 사이사이,
내가 하지 못한 말들도 함께 떠오른다.
“오늘도 수고했어.”
“엄마가 너 많이 좋아해.”
“있잖아, 사실 엄마는 오늘도 버겁단다.”
열 살 아이는 뛰고,
쉰 살 엄마는 잠시 멈춰 선다.
함께 손을 잡고 걷는 길이지만
아이의 속도와 나의 속도는 다르다.
그 다름을 억지로 맞추려 하면
엄마도 아이도 지쳐버린다.
그래서 나는 멈춘다.
잠시 숨을 고른다.
내가 못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오래 함께 걷기 위한 리듬을 찾는 것이다.
열 살인 아이는 지금 ‘자라나는 중’이고,
쉰 살인 나는 ‘다시 자라고 있는 중’이다.
육아는 아이를 기르는 시간이면서
내 삶을 다시 배워가는 시간이다.
나는 점점 느려지지만
느려질수록, 더 많은 걸 보게 된다.
아이의 눈빛, 말투, 하루의 결.
빨리 걸을 땐 놓쳤던 것들이
멈춰 설 때마다 내 눈에 들어온다.
오늘도 아이는 달린다.
나는 그 뒤를 서두르지 않고 따라간다.
조금 늦게 닿아도 괜찮다.
엄마는 오늘도 숨 고르며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