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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어둔 옷, 널지 못한 마음

꼭 보도록 해요. 우리

by 글짓는 날때

이은경 작가님의 '오후의 글쓰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쓰기를 주저하는 사람에게, 쓰는 용기와 방법을 알려주는 고마운 책이죠. 그 책에서 작가님이 제안한 과제와 문장대로 글을 지어 보자고 생각했어요. 이왕 짓는 김에 과제와 문장을 활용해 단편 정도는 한번 지어볼까 라는 욕심이 생겼고요. 가관이죠.


그렇게 지은 저의 첫 글이 [레시피 대로 짓는 글 - feat. 오후의 글쓰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마중글로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요.


과제 중 옷정리에 대한 문장이 있었어요. 다음 문장인데

[하려던 일이 있었다. 미뤄뒀던 여름옷 정리다. 매년 하면서도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낯설고 싫은지 선선한 바람 부는 게 반갑지 않을 정도다]라는 문장으로 글을 지어 보라는 거예요.

그때 지은 글을 일부 옮겨 보겠습니다.


앗. 이건 올여름에 한 번도 못 입었네 '이건 두면 입겠지' 하는 옷들은 대부분 다음 해에도 '입지 않는다'라는 원칙도 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8할의 확률로 입지 않는다. 그렇게 쌓아둔 여름옷이 제법 많다. 이 이유 또한 명확한데 '아. 이건 두면 언제 언제 입으면 좋을 것 같다.'라고 생각해서 그냥 둔 옷들은 그 '언제 언제'가 생기지 않아 결국 그해 여름을 옷장에서 지내다 다음 해 여름 사라지기도 한다.





여러분, 옷을 정리하고 버리는 게 이렇게 힘들고 낯없는 일일까요?


옷 서랍을 엽니다. 섬유 탈취제의 향이 배인 나무서랍은 묵연한 향기를 내보냅니다. 건조하지만 조금 서늘한 습기의 옷들은 지난여름과 같은 모습으로 잘 개어져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미안,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겠지만, 결국 바라던 일은 없었네. 뭐 올여름엔 그랬는데 내년에 별일 없어도 한 번쯤 보자.' 라며 낯없는 마음에 섬유탈취제며 제습제까지 챙겨서 주름지지 않게 잘 개어서 넣어뒀을 거고요.


올여름도 역시 기대했던 일들은 생기지 않았죠. 그럼에도 보자고 약속했으면 한 번쯤 봐야 하는데, 이 무심한 인간은 또 이별할 때만 온갖 낯없는 척을 합니다.


개어둔 모든 옷이 그렇진 않아요. 특히 눈이 가고 마음 가는 옷들이 있어요. 10년이 지나도 버리지 못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이제 갓 만났는데 '넌 좀 오래가겠다. 잘 부탁해' 하는 옷도 있고요. 모든 계절의 요일마다 습관처럼 꺼내어 입는 낡았지만 그 낡은 결이 좋아 결코 버릴 수 없는 녀석도 있죠. 목 늘어진 면티 같은 거요. 하나씩 다 있으시잖아요.


그런데 이 모든 녀석들을 두고 가장 속상한 녀석이 매해 생각만 하다가 매해 서랍에 담아두는 녀석이죠.




"넌,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언제 밥 한 번 먹자고 연락한다고 하면 연락 오냐?"

친구 윤후가 물었어요. 조용하고 품 넓은 친구죠.


나 : 꽤 높은 확률로... 연락온 적이 없지. 왜? 누구 만났어?


윤후 : 그냥, 고등학교 때는 좀 친했는데, 기회 되면 봐도 좋겠다 생각했는데, 나 같진 않은 것 같아서.


나 : 왜?


윤호 : 연락처를 묻지 않더라고.


나 : 면티 같은 거야.


윤후 : 뭔 소리야.


나 : 넣어둔 기억도 없이 서랍 깊숙이 있던 면티 같은 거라고.

'아~ 이게 여기 있었네. 언제 산거더라. 여름 다 갔는데 다음에나 입자' 그리고 다시 깊숙이 넣어둔다고.

그 면티는 어디에 있든 상관없는 거야. 입을 생각이면 가까이 잘 개켜 두겠지!

면티를 여름에만 입진 않잖아.


윤후 : 면티같다...


나 : 목이 늘어져도 계절마다 꺼내 입는 면티가 있고. 기억은 있는데 어디 구겨져 박혀있는지도 모르는 드레스 셔츠도 있는 거야. 매년 꺼내만 보고 입지 못하는 애틋해서 낯없는 옷도 있는 거고.




올해도 입지 못해 햇살 한 번을 못 본 옷들이,

올해도 만나지 못해 미소 한 번을 못 본 사람들 같아

그냥 그렇게 넣어두기 아까워 억지로라도 펼쳐 품에 대보았습니다.





epil

다들 있으시죠!?

늦기 전에 펼쳐 품에 대보시길 바랍니다.

옷도, 그 사람도.


월요일이지만 미소 가득했던 하루였기를 바랍니다.

퇴근길도 가벼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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