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나면 아프잖아요.
제가 지은 글에 자주 등장하는 '춘승'이라는 지인이 있습니다. 사실 이분과는 사회생활 하면서 만났습니다. 각자 다른 부서의 같은 기획자로 일하고 있었죠. 회식자리에서 술몇잔 부딪히고 말 몇 마디 썩다가 단지 단골 술집이 같다는 이유로 친해졌습니다.
어처구니없게도 말이죠. '그 집 알면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서로 괜찮은(?) 사람이 되었고 지금까지 괜찮게 지내고 있습니다. 도대체 세계 평화는 왜 힘든 걸까요?
글을 지어 보겠다는 말을(?), 다짐을. 처음 들은 사람도 이분입니다.
처음엔 응원을 해주더라고요.
"글이라... 그게 카피나 제안서 쓰는 거랑은 다를 건데. 쉽지 않을걸요. 거기가 뭐 '쓸게요~' 하면, '눼에~ 쓰세요' 하는 댄 줄 아시나. 아니, 굳이 한다고 하면 말리진 않아. 그냥 괜히 떨어져서 상처받고 울까 봐 그러지. 만약 한 번에 된다? 그럼 오징어 물회 쏜다! 그리고 구독자! 그거 좋다. 그거 내가 1호로 할게요."
"그렇단 말이죠. 오징어 물회라... 그거죠? 그럼, 내 어디 한번 해보리다."
구독자의 소중함을 모르던 때였죠. 지금요? 그저 감사하고 영광이고 그렇죠. 오징어 물회 따위...
듣고 나면 기분이 나빠지는 축하도 받았답니다.
"참, 없는 재주로 어떻게 요래요래 됐어요(?). 해튼 운 하나는 기가 막혀. 한잔 받아요. 일단 축하드립니다. 날팀장님,,, 아니 이제 날작가님인가. 근데, 10주년이다 뭐다 해서 그냥 막 뽑아준 거 아니야? 쉽지 않다던데..."
"그러게요. 그냥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뭐 이런 거 일수도 있고. 왜, 그런 장면 있잖아요. 시니컬한 담당자가 심심한 표정으로 '오늘은 어제 보다 적네, 이거나 읽어보고 퇴근하자' 했다가 약속시간이 늦어서 '앗, 시간이 벌써? 모르겠다. 일단 읽히긴 하네.' 하면서 무심한 손동작으로 클릭! 뭐, 이 정도의 행운이랄까. 그러고 보면 참 특별한 재주 없이도 지금까지 욕 안 먹고 월급 받아가면서 산 것도 재주라면 재주고 행운이라면 행운이고"
"아닌데, 난 딱 그 생각부터 들던데. 나나 팀장님이나 유일하게 잘하는 거. 설득이 안 되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길 해주고 결정을 못하면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주는거. 그냥 거기서 듣고 싶은 얘기. 보고 싶은 글. 그거 썼겠다 싶었지. 팀장님이 뭐 보통 여우야."
커흑... 좀 아픈데요. 이런 것도 재주라면 재주일까요. 제 생각엔 남 설득해야 먹고사는 일을 업으로 삼다 보니 자연선택적 진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나름 적지 않은 계절을 반복하는 동안 많은 부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대부분 좋은 사람이었고요. 간혹 별난 사람이 있었고 아주 적은 경우로 조금 견디기 힘든 사람이 있었네요.
견디기 힘들면 좀 멀리 두고 별나다 싶으면 조금 더 지켜보는 정도랄까요. 각자의 결이 다르다는 생각에 상처받거나 상처 준 기억은 없답니다. 아마도 "오해로 인한 이해" 덕분에 나름 나쁘지 않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산 것 같아요. 다행이죠.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캉의 말이죠. 저 말을 처음 들은 건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 강신주 선생의 강연이었어요. 뭐, 라캉이 무슨 의도와 의미로 저 말을 했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강신주 선생의 해석은 이런 거였어요. 좀 오래전에 들은 거라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볼게요.
'자 여러분 쉽게 설명할게요. 아이가 첫걸음마를 해요. 엄마가 웃어요. 아이도 웃어요. 엄마가 웃으니까 아이도 좋아요. 그래서 엄마가 좋아하는 걸음마를 계속해요.
그런데, 어? 엄마가 이전보다 덜 좋아해요. 아이는 엄마를 웃게 할 다른 것을 찾기(욕망하기) 시작해요. 엄마의 기쁨을 욕망하는 거예요. 바로 그 아이가 우리예요.
여기에 아이의 욕망이 있어요? 아이는 엄마의 행복을 자신에게 투영한 거예요. 욕망의 주체가 아니에요. 아이의 행복의 주체는 엄마의 욕망이에요.
여러분이 욕망의 주체가 되어야 해요. 남 좋은 거 그거 왜 자꾸 해요. 그래서 행복해요? 그럼 하세요. 평생 그렇게 사시면 돼요. 그게 행복하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알고는 있자는 거예요. 욕망의 주체가 사라지면 어떻게 할 거예요? 내가 욕망의 주체가 아닌데? 그럼 또 찾게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타자에 의존하는 거예요. 어떻게 사시겠어요?'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워낙 말을 쌔게 하시는 분이라 거의 호통에 가까운 강연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어차피 철학이란 게 명제 "1"에 "N" 개의 해석이 생기는 거잖아요. 뭔가 이해가 될 듯하면서 좀 어려운데 강신주 선생의 해석이 좋았어요. 내가 주체가 돼라 자나요. 듣기엔 좋았어요. 그런데 저의 깜냥으론 삶에 구현하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설령 강신주 선생의 해석이 맞고 심지어 라캉의 명제 또한 다르지 않다면, 그냥 오해하는 것으로 이해를 대신하기로 했어요. 그게 편할 것 같았어요. 맞잖아요.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Case1.
'이건 내 욕망이고 행복이야. 너와는 관계없어. 그러니 신경 꺼'
: 이 새끼 드디어 미쳤구나 소리 듣겠죠? 무서울 수도 있어요.
Case2.
'이건 내 욕망이고 행복이야. 아무리 네가 좋아해도 이건 내 욕망이라고. 그러니까 적당히 좋아해.'
: 이 새끼 드디어 미쳤구나 소리 듣겠죠? 귀여울 수도 있어요. 볼정도는 꼬집히거나 흘겨보면서 이렇게 말할지도 몰라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하고 나 좀 봐봐. 참... 미워할 수가 없다.'
(아이고 압니다. 강신주 선생이 뭐 저런 뜻으로 말했겠어요.)
[Case2] 가 제가 선택한 오해입니다.
오해하기 위해선 이해가 필요했고요. 저렇게 확신을 갖고 오해를 하니까. 저 두 선생님도 잘하면 뭔가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같은 사람인데 조금 더 공부하시고 배우신 거 말고 다를 게 있나요. 두 분 선생님들이 왜 그렇게 끊임없이 철학에 대해 공부하셨을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아. 듣고 싶어 하는 걸 어떻게 알고 들려주냐고요? 이건 설득이 필요한 사람에게 통하는 경우예요. 일상적 대화에선 통하지 않을 거예요. 조금은 통하려나(?). 아무튼 다들 알고 계시는 방법이에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만 빼고 말하면 본인이 알아서...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더라고요. 좋고 싫음에 대한 감정 개입이 없으니까 대화도 담백해지고요.
그냥 '지금. 여기에. 당신과. 왜. 있는지'에 대한 사실만 담백하게 얘기하면 되더라고요.
상대방이 뭐라고 하냐고요?
'맞아요. 제 얘기가 그 얘기예요. 업무연락은 계속 날팀장님한테 드리면 되죠?'
해튼, 요는 철학적 명제를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 별 재주 없이 그나마 먹고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길게도 했습니다. 아이고. 이 부족한 인간아.
epil.
음.. 토요일 오후엔 역시 라캉이죠.
앗. 야구 시작하네요. 아. 그리고 이건 진심인데요.
전 당신의 행복을 욕망합니다. 흠흠.
평안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프지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