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선배들
어제였습니다.
어휴. 기어코 야구는 저버렸습니다. 오라질...
이 닦고 자야지. 내일은 산이나 갈까. 글을 지을까. 오늘 지었는데 하루 쉴까. 하면서 휴대폰을 들어보았습니다. 앱 알림이 들어와 있네요. 어쩌지, 어쩌지, 휴대폰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엽니다. 브런치에 접속하고 잽싸게 글 읽는 서재를 클릭합니다. 잘 밤에 꿈자리 사납고로 알림을 열어볼 용기가 안나는 거죠. 대신 구독 중인 작품의 새로 올라온 글과 읽다만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읽습니다.
뭐, 눈에 글이 들어오나요. 결국 알림을 보죠. '어휴 감사하여라. 뭘 또 이렇게들 찾아오셔서..' 이제야 읽던 글이 눈에 들어옵니다. 네, 뭐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저 속물입니다. 흠!
신기한 사실 하나 알려드릴게요. 제가 좀 유별난 건지 이상하게도 다른 작가님의 글을 읽는 게 왜 이렇게 부끄러운 걸까요. 소설, 에세이 장르 구분 없이 왠지 큰 실례를 끼치는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해야 하지.
아! 이런 느낌이에요! 어릴 때 친한 여자아이(짝입니다) 집에 자주 놀라가곤 했어요. 어느 날인가 평소엔 잠겨 있던 그 아이의 일기장 자물쇠가 열려 있는 거예요. 심지어 펼쳐 읽어 보란 듯이 일기장 중간 넘어 도그지어까지 해둔 걸 발견한 겁니다.
읽어요? 말아요? 약아빠진 저는 그 아이의 마음을 지레 짐작하고 펼쳐 봅니다. 그리고 황급히 덮고 일기장에서 시선을 거두었죠. 간식접시를 들고 들어온 그 아이의 얼굴이 발그레 변하는 거예요. 일기장에 가있던 저의 시선은 애써 감추었지만 열없이 벌게진 얼굴은 감추지 못한 거죠. 초등학교 때의 일이었습니다. 약아빠지긴 했어도 라캉은 알기 전입니다.
모든 작가님들이 마음 한 부분, 한 부분을 펼처 읽기 편하게 곱게 접어두셨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꾸준히 살며시 정성 들여 읽고 잘 덮어두도록 하겠습니다. 열없이 발개진 얼굴을 들킬 수 없으니 살짝 읽은 표시만 해두도록 하지요.
아무튼, 저렇게 이런 생각, 저런 상상을 하며 글을 읽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립니다. 이 시간에? 왜?
"날팀장, 야구 어떡하냐. 박살이 났더만?"
가끔 일주시고 정을 주시는 제작사 (동휘) 형님이네요.
"나 좀 바꿔봐... 날때야 내일 막걸리 먹자"
항상 참견하고 조언을 주시는 (상윤) 형님이고요.
"몇 시! 어디로 가면 되는지요?"
"독립문역에서 만나자. 안산으로 해서 인왕산 찍고 체부동 잔치집에서 막걸리 어때?"
"넵, 내일 뵙겠습니다"
상윤형 : 일은 잘돼니?
나 : 일이라 생각하면 못하죠?
동휘형 : 쓰는 건 잘 되냐고...
나 : 읽어주시긴 하더라고요.
상윤형 : 난 왜 안 알려 주니?
나 : 무슨 욕을 먹으려고요.
동휘형 : 일 좀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시간은 돼?
나 : 맡겨만 주십쇼.
상윤형 : 난 왜 안 알려 주냐고?
나 : 형님한테 배운 글, 형님한테 어떻게 보여드립니꽈.
상윤형 : 얘 지금 나한테 역정 내는 거지?
동휘형 : 나 같아도 싫겠다. 날팀(장) 술이나 따라줘. 잔 빈지가 언젠데.
상윤형 : 동휘형님은 읽어봤어?
동휘형 : 읽히긴 해.
상윤형 : 날때 너, 뭘 어떻게 쓰고 다니는 거냐?
동휘형 : 읽을만하다니까. 근데, 날팀아. 내가 발주하고 상윤이가 내려준 일이라고 생각하고 써봐.
나 : 에?
동휘형 : 그럼 더 잘 쓸 것 같아. 네가 납기 어긴 적 없잖아. 상윤이가 막 내보낸 적도 없고.
나 : 에?
동휘형 : 일처럼 치열하게 써보라고.
나 : 에?
상윤형 : 날때가요? 멀었어. 겨우 '가!갸!거!겨!' 하고 있겠지.
몇 년 전일까요? 기획본부장으로 상윤형님을 처음 만난 때가 생각나네요. 그 당시 동휘형님은 외주 제작사였고요. 시어머니 하나 더 생겼다 생각했죠. 동휘형님은 시어머니가 아니고 그냥 주적이었고요.
망할 대표도 골치 아픈데 저 양반을 어찌해야 내가 편할까 생각하다 '아니다 그것도 귀찮다. 가능한 마주치지 말고 시키면 시키는 일이나 잘하자' 했는데, 점점 찾는 빈도수가 느는 거예요.
그러다 그날이 왔습니다.
"너, 제안서만 쓰지 말고 카피도 좀 쓰자. 일단 제안서에 네가 막 앉힌 글부터 워싱해 봐. 제안서 수정하면서 허구한 날 읽었을 거 아냐. 거슬리는 거 고쳐보라고."
상윤형님의 갑작스러운 통보였고 일이 하나 늘었습니다. 뭘 더 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 월급쟁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죠. 같은 월급 받고 왜 일을 더하냐고요. 입은 대빨 나와서 투덜대며 원고 받아서 자리로 돌아가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처음 알았답니다. 쓰고 고치고 다시 쓰는 게 재밌다는 걸요.
화이트보드에 곱게 줄 세워 붙인 까만 글자가 있던 하얀 종이에 빨간 줄과 엑스표와 물음표가 빼곡하게 들어차더니 이네 한 장씩 뜯겨 떨어져 흩날리는 풍경을 보고 간절하게 빌었습니다.
'한 장만 붙어 있자. 제발 한 장만!'
간절함이 통했을까요. 무려 두장이 붙어 있더군요.
"이걸로 각각 5장씩만 더 써와"
[야이씨, 한 장만 붙어있으랬잖아!!!!!]
초가을의 상쾌하고 선선한 산행으로 기분 좋게 열띤 얼굴들이 시원한 막걸리로 가라앉나 싶더니 이내 무지근한 취기로 다시 발갛게 익어갑니다.
햇살 좋은 날,
햅쌀 같은 사람들과 함께한 휴일이었습니다.
저에겐 복되고 복된 날이었네요.
선퇴 마저 부서져 내리는 늦가을의 오후,
렌즈 같은 술병 밑둥으로 오늘의 기억을 눌러 놓기로 합니다.
선퇴를 마저 벗는 날이 오면 오늘의 기억을 꺼내 보겠습니다.
형님들의 내일의 출근을 응원합니다.
부디 고단하시길.
epil.1
오늘 지은 글은 거의 어린이날 일기에 가깝네요.
취한 열을 씻어내고 급하게 글을 지어 봤습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이게 맞나요?
'당신의 일상이? 일기도? 에세이가 될 수 있다' 이런 느낌의 제목이었는지 글이었는지.
맞다면, 여덟 번째 글로 하려고요. 뻔뻔스러운가요. 흠흠.
epil.2
이 공간에 있으신 분들 모두 복된 휴일이었길 바라봅니다.
저에겐 모두 햇살 같고 햅쌀 같은 분들이셔요.
남은 휴일도 내내 평안하시고요.
저마다의 내일의 출근을 응원하겠습니다.
내내 가벼운 마음, 가벼운 발걸음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