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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 시작한 것에 대한 공포.

전, 좀 무섭더라고요.

by 글짓는 날때

“요즘 뭐 하니? 개발 회사랑 협업해서 뭐 만든다며.?”

[광고회사에서 정년퇴직하고 다른 결의 광고일을 시작한 상윤형님이다.]


“거의 마무리해서 QA 중이에요. 제안서 몇 군데 보냈는데 반응은 나쁘지 않아요. 쓰겠다는 곳도 있고.”


“잘했네. 그건 그렇고, 그거 마무리하면 다음엔 뭐 할 건데.?”


“다음이요? 하고 싶은 게 있긴 한데. 이건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거라. 일이라 하긴 뭐 한데.”


“어딜 들어가든, 프리를 뛰든 안 해?”


“QA 끝나고 서비스 런칭 한 다음에 생각할라고요. 그때 까진 하고 싶은 거 하고. 왜요? 당장 어딜 들어가거나 일할 생각은 없는데.”


“넌, 그게 되니?”


"뭐가요?"


“이해해라, 상윤형이 요즘 생각이 많으시다. 형, 날때는 지가 알아서 해. 형이나 좀 뭘 하려고 좀 하지 마. 제발 열심히 좀 하지 마! 뭘 하고 싶으면 가만히 있는 걸 해”

[오랜 시간 디자이너로 같이 일하고 있는 형선형이 나선다.]


“날때야, 내가 상윤형의 열심히 때문에 미치겠다. 아니, 뭘 그렇게 열심히 하려고 그래. 형 열심히 하는 거 껀껀히 참견하는 거 사람들 다 부담스러워한다고. 가끔 카피 워싱이나 해주고 광고주랑 골프나 처. 그러라고 불러서 명함 주고 방 줬더니, 왜 일을 하려고 그래. 그냥 젖은 낙엽처럼 조용히 살자. 내가 죽겠어서 그래.”


[상윤형님이 낮게 답헀다.]

“난, 그게 그렇게 안되더라. 뭘 안 하면 그렇게 불안해.”




‘불안’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들렸고 이전까지 없던 ‘불안’이 생겼다.

출근이라는 걸 할 때보다 부지런해진 요즘의 매일은 ‘불안’ 때문이었을까.

글을 짓기 전의 ‘설렘’은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뭐라도 해야 한다는 조급함에서 생긴 달콤하게 포장된 ‘불안’이었을까.


아니다. 불안해하지 않기로 한다.

내 잘못으로 인한 안 좋은 형태의 결과에 대한 ‘불안’만 아니라면 불안해할 건 없다. 개발 중인 서비스는 QA 중이고 작지만 런칭도 약속해 둔 상황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놨다. 결과를 기다리고 결과에 따라 다음 '일"을 하면 된다. 서두르지 말자 조급해할 필요 없다.


될 일이면 될 거고 안 된 일은 되게 하면 된다.

그게 일이고 그 일을 지금까지 해왔다.

'일'에 대한 '불안'따위 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

시작한 것에 대한 공포에 비하면...




작년 여름과는 많이 다른 특별한 여름을 보내고 있다. 회사를 그만두었고, 새로운 명함이 생겼다. 일은 하고 있지만 출퇴근은 하고 있지 않다. 가끔 먹고사는 일로 사람을 만나고 가끔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한다. 매년 그러하듯 올해의 여름은 지난여름들의 기록들을 여러 의미로 경신하고 있고 이상기후라는 말은 잘못 지어진 말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 발생하는 건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이건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건, 일단 하지 않는다.]라는 인생의 원칙을 깨고, 이건 해도 되겠지 중 어쩌면 가장 하지 말았어야 했거나 가장 힘든 일이 될지도 모르는 글짓기를 시작했다. 이상발현도 이상행동도 아니다.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 발생했다.


글을 짓기로 마음먹고 정성 들여 나를 소개하고 허락을 구했다. 허락을 받았고 글을 지을 수 있는 공간도 허락되었다. 나를 모으고 주변을 돌아보며 꼬깃꼬깃 접어둔 이야기들을 펼쳐 보았다. 그 이야기들 속엔 감당 가능한 아픔과 평범한 즐거움, 유난스럽지 않은 행복과 공감 가능한 못됨이 있었다. 특별하진 않지만 조금의 살을 붙이면 읽을 정도의 이야기는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첫 문장을 쓰고 알게 되었다.


아! 나에겐 이야깃거리는 있지만 글을 짓는 재주는 없구나.!

시작한 것에 대한 공포가 시작되었다.


일은 하면 된다. 내가 못하면 남 시켜서라도 하면 된다. 공들이고 시간들이고 돈들이면 일은 된다.

글은 쓴다고 지어지지 않는다. 짓지 못한 글은 그저 뱉어낸 단어와 뿌려진 기억일 뿐이다.

공들이고 시간 들인다고 글은 지어지지 않는다.


상윤형님의 날 선 충고가 떠올랐다.

"네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이미 아는 걸 나열하는 건 매뉴얼이야. 이미 아는 걸 읽고 누가 공감을 하고 감동을 하겠어. 아는 것과 다르지 않으나 다르다고 포장을 해야 설득을 하지. 아는 것에 포장을 좀 해보자. 그래서 필요한 게 카피야. 글로 치면 제목! 이걸 먼저 써봐. 우선 아는 이야기를 궁금하게 해. 그러면 궁금하게 한 제목에 대해 책임감이 생기고 어떻게든 쓰게 될 거다."


그만 떨고, 재주 없는 사람의 글짓기를 시작해 보자.

이야기를 먼저 쓰지 않고 장면을 그려본다.

그리고 제목을 최대한 정성스럽게 짓는다.

단어를 모으고 나열한 후 배치하고 다듬는다.

산으로 가는 이야기를 되돌려 앉히고

앞뒤가 맞지 않는 단어를 다시 줄 세운다.

몇 번을 고쳐 읽고 몇 번을 고쳐 쓴다.


그리고 발행!


내놓은 것에 대한 공포가 시작된다.


올해 여름은 객년에 비해 덥다고 하는데

난, 왠지 으스스함에 이불을 끌어다 덮고 등을 구부린다.

그리고 공포에 잠긴다.


누가 읽기나 할까.




epil.

여섯 번째 글을 짓기 위해서 늦은 고백을 해봅니다.

"네, 글을 짓는 게 사실 무섭습니다."

극복할 재주가 없으니 무뎌져야 할 것 같습니다.


Postscript.

얼마 전엔 읽어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야기를 지어 글을 쓰시는 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드립니다.

아마추어의 글짓기란 불안과 공포의 반복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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