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일치기 제주 숲 여행 1
오늘도 당일치기 제주 여행이다. 길면 길수록 더 좋은 제주도 여행이지만, 이런 당일 여행도 그저 감사하다.
제주도 여행의 묘미는 화산섬 제주의 자연을 그대로를 즐기는 것이다. 모래 고운 에메랄드 해변에 발 담그기, 까만 현무암 바위 보며 해안 걷기, 봉긋 솟아오른 오름 한 바퀴 돌면서 전망 즐기기, 유채와 수국 등 철 따라 피어나는 꽃과 가을의 억새 구경, 바람 숭숭 통하는 올레길과 밭담길 걷기. 넓은 초원을 한가로이 오가는 말 구경... 이것이 바로 내가 제주도를 즐기는 방법이다.
이번 제주 여행 테마는 숲이다. 신비로운 곶자왈,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삼나무숲, 잘 가꿔진 수목원들. 어디로 갈까? 당일 여행이므로 제주 동부 중산간 중심의 짧은 동선으로 코스를 짰다. 오늘 여행지는 사려니숲, 도토리숲, 비밀의 숲이다.
"여보, 내 폰이 없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집에 휴대폰이 없다. 아마 어제 차에 두고 내렸나 싶다. 그런데 공항으로 가기 위해 차에 타고 보니 여기에도 없다. 어디 있는 거지? 문제는 스마트폰 안에 여행의 모든 게 들어 있다는 점이다. 항공권, 렌터카 예약, 면허증, 검색해 둔 맛집, 여행 코스 지도, 삼성페이까지 모두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랜만에 지갑을 챙겨 나와서 신분증이 있다는 거.
공항에 주차하고 다시 차 안을 구석구석 뒤졌지만 폰은 보이지 않는다. 깨끗이 포기하기로 마음을 비운다. 다행히 아내가 미리 스마트 발권한 티켓이 있어서, 일행인 내 항공권은 종이로 다시 발권해 줄 수 있다고 한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 아내의 여행 루틴인 공항 커피 한 잔으로 당일치기 여행의 막이 올랐다.
오늘따라 기내 창으로 보이는 하늘 풍경이 더 멋있다. 장마가 위로 올라가면서 여기저기 남겨둔 하얀 구름이 풍경을 돋보이게 만든다. 흰 구름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푸른 남해 바다, 그리고 점점이 떠 있는 초록빛 섬들. 나는 지금 푸른 남쪽 바다 위를 날고 있다. 폰을 잃어버렸지만 뭐 어떠랴. 행복의 섬으로 날아가고 있으니.
비행기는 제주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당일 여행이라 캐리어가 따로 없는 우리는 바로 렌터카 셔틀을 탔다. 렌터카 인수를 하고 숲으로 바로 출발? 아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불변의 여행 속담이 있지 아니한가. 동문시장에서 오늘 먹을 간식거리부터 구입하고, 상춘재로 향한다. 청와대 안에 있는 아름다운 건물 상춘재(常春齋)가 아니라 식당 이름이 ‘제주 상춘재’이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이명박 정부 때까지 청와대에서 요리사로 일한 사장님이 제주도에 낸 식당이다. 맛집답게 주변에 주차하기 힘들었다. 나는 해물돌솥비빔밥을, 아내는 멍게비빔밥을 주문했다. 돌솥비빔밥에 전복 등 해산물이 가득하다. 상추에 쌈까지 싸 먹으니, 진실의 미간은 이미 활짝 열려 버렸다.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먹는다. 요리사의 경력은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음식이 보여준다. 한결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제주 숲을 향해 시동을 켠다.
최신 렌터카 덕분이야!
오늘 렌터카는 최신 차량이었다. 깨끗하다는 장점과 함께 새 차 냄새가 심하게 났다. 찌든 냄새가 나는 오래된 렌터카에 비해 그것도 장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별도의 내비게이션 기능이 없는 게 문제다. 내 폰으로 차에 연결하면 되지만 폰을 잃어버렸으니... 아내 휴대폰으로 잠시 검색한 후 내 머릿속 지도를 내비게이션 삼아 사려니숲으로 향했다.
문제는 516 도로에서 1112 지방도로 잘 빠져야 하는데 내비게이션이 없다는 게 여기에서 티가 났다. 그만 그 갈림길을 지나쳐 서귀포 방향으로 계속 가버렸다. 어느새 성판악까지 와 버렸다.
그 덕분에 516도로 숲 터널길을 지난다. 도로 양쪽에서 하늘을 가리는 숲이 우거진 터널이 1Km 이상 이어진 아름다운 길이다. 갓길에 주차할 수 없도록 턱을 만들어 두어서, 드라이브로만 즐길 수 있는 길이다. 바로 뒤 차량이 빠르게 따라오면 즐길 겨를도 없겠지만 뒤 차량도 다행히 천천히 따라왔다.
꼬불꼬불 이어진 초록 숲 터널을 창문 열고 달린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종종 드라이브 풍경을 동영상으로 남긴다. 이럴 땐 말하면 혼난다. 조용히 해 주어야 한다. 숲 터널이라 하나도 덥지 않고 상쾌하다. 참 좋다! 내비게이션이 지원되지 않는 최신 렌터카 덕분에, 그리고 내가 길을 놓친 덕분에 오늘 숲 여행 코스에 없는 새로운 일정을 추가로 즐길 수 있었다.
아, 한 가지 보너스가 더 있었다. 또 방향을 거꾸로 돌아오다 보니 사려니숲에 주차하기 위해 유턴을 해야 했다. 그런데 유턴 지점을 찾다 보니 붉은오름 자연휴양림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했다. 휴양림 입구에 들어가 보았다. 여기도 정말 괜찮았다. 그동안 봐온 휴양림 캠핑 데크 중에 주변 환경이 최고다. 그래, 다음 제주 여행은 캠핑 장비를 준비해서 붉은오름 휴양림에서 하루 묵어야겠다. 특히 좋은 위치의 캠핑 데크 번호를 잘 봐두었다. 기억해 두자. 소나무 아래 15번!
원래 예정보다 한 바퀴를 크게 돌아 사려니숲 입구에 도착했다. 평일이지만 이미 많은 차량이 주차해 있다. 그만큼 좋은 곳이고, 데크길(무장애나눔길)이라 누구나 걷기 좋다. 오늘은 사려니숲길 전체가 아니라 초입만 걸을 예정이다.
좋아하는 삼나무가 숲 입구부터 빽빽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피톤치드를 뿜뿜하고 있을 상쾌한 숲 속으로 들어선다. 숲이 넓어서 번잡하지 않다. 걷다 보니 벤치도 있고, 나무로 만들어진 선베드도 있다.
"저기 좀 누웠다 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베드에 몸을 뉜다. 살짝살짝 비치는 햇살은 손수건으로 가리고 위를 바라본다. 곧게 쭉 쭉 뻗은 삼나무 잎들이 머리를 맞대고 바람에 일렁거린다. 살짝살짝 벌어지는 잎들 사이로 파란 여름 하늘에 흰 구름이 빠른 속도로 헤엄친다. 숲멍을 하다 살풋 잠이 들기를 반복한다. 휴대폰이 없으니, 이어폰이 있어도 음악을 들을 수 없다. 하지만 괜찮다. 숲 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가 있으니 이 또한 자연의 음악인 것을.
사슴이나 노루가 한 마리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숲에 한참을 누워 있었다.
일어나 천천히 숲 속을 걷는다. 마치 노래 속 ‘숲의 아이’가 된 것 같다. 옆지기에게 폰으로 그 노래를 틀어달라고 하니 히사이시 조의 ‘summer’를 틀어준다. 여름 숲을 걸으며 들으니 이 곡도 좋네. 숲에는 작은 도서관까지 있어서 책을 가져오지 않아도 이곳 책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야말로 힐링을 제대로(!) 하고 사려니숲을 나왔다.
*다음 주 일요일 2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