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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등반이 힘들 땐 어승생악에 올라 가세요!

제주 오름 여행 1 | 어승생악 탐방기

by 새벽강

유럽 여행을 가기로 했던 모녀가 계획을 변경했다. 덕분에 온 가족이 짧지만 여름휴가를 함께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가족들의 선택지는 쉽게 모아진다. 제주도!


독채 숙소에는 자쿠지가 두 곳이나 있어 쉬기 좋았다

제주 도착 하루만에

휴가 앞뒤로 내 일정이 빡빡해서 바쁘게 다니기 부담스럽다. 오랜만에 특별한 계획을 짜지 않고 떠났다. 첫날은 도착해서 숙소에서만 있었다. 안에서 밥 해 먹고, 남은 시간은 각자 책 보거나, 음악 듣거나, 넷플릭스 보거나, 쉬거나... 좋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그래도 무리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뭐라도 하자라는 의견에 도달. 현재 숙소 근처에서 뭘 할 수 있을지 찾아본다. 제주에 오면 해변 한 곳, 오름 한 곳 들리기가 우리 가족의 평소 루틴이다. 검은 현무암 너머 파란 제주 바다를 보고, 오름 한 곳에 올라 산책하고 풍경을 즐기는 것은 제주 여행의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이번 숙소가 중산간이라 가까운 오름을 찾아보니 멀지 않은 곳에 '어승생악'이 있다.


어승생?

어승생악은 평소 가보고 싶었던 오름 중 한 곳이다. '어승생악'은 '임금님이 타는 말이 나는 곳'이라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문헌인 <탐라지>에 따르면, 이 오름 아래에서 임금님이 타는 말이 나와서 어승생악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오름 중에서는 꽤 높은 해발 고도(1169m)에 위치하여 한라산 정상이 건너 보이고, 제주도 북쪽 풍경을 조망하기 좋다. 소요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아서 한라산 정상 등반이 부담스러운 사람에게 트래킹 코스로 인기가 많다. 가벼운 트래킹만으로도 높은 곳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수국.jpg 제철이 지나고 있지만, 그늘이나 높은 지대에는 아직 남아 있어 반가운 수국

아침 일찍 숙소에서 나왔다. 여름 햇살을 최대한 피해볼 요량이다.


아주 멀리까지 가보고 싶어
그곳에선 누구를 만날 수가 있을지
아주 높이까지 오르고 싶어
얼마나 더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을지


시동을 걸고 라디오를 켜니 김동률의 '출발'이 흘러나온다. 나이스 타이밍~!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노래가 적절한 때에 나오다니. 다 같이 흥얼거리며 어리목탐방안내소로 향한다. 어리목탐방안내소에서 한라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코스는 남쪽으로 나 있고, 북쪽으로 어승생악으로 올라가는 입구가 있다.


고작 1.3Km ?

정상까지 1.3km. 이 정도는 쉽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샌들을 신고 왔는데, 초입 계단길의 경사가 가파른 편이다. 예상외의 난관에 처음부터 숨을 헐떡인다. 신발을 제대로 신고 올 걸, 물을 더 가져올 걸 후회해 봤자 늦다. 아내는 그래도 덤덤하게 올라간다. 그런데 내 뒤에 있던 딸과의 간격이 점점 벌어진다.


백약이 오름 올라갈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주 오래전 일이라 딸이 어릴 때다. 등산을 싫어하던 딸은 막상 눈앞에 오름이 나타나자, 올라가지 않으려 했다. 결국 혼자 주차장에 남은 적이 있다.

'혹시 그때처럼 안 간다고 하는 건 아닐까?'


큰 바위 하나 위에 여러 나무가 살아가는 신기한 모습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노래 가사처럼 오늘도 예감은 적중한다. 어느새 발걸음을 멈춘 딸은 나의 감언이설(?)에도 쉬이 넘어오지 않는다.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으나, 어떻게 억지로 물까지 먹일 수 있겠는가! 대화를 더 하다가는 서로 감정만 상할 거 같아서 거기서 멈추고, 이미 사라진 아내의 뒤를 따라 오른다. 가다 보니 중간에 완만한 데크길이 나온다. 올라오면 좋겠다고 마지막으로 카톡 메시지를 딸에게 보냈다. 아마도 안 올라오겠지만, 이만하면 할 만큼 했으니 됐다.


"꾸우꾸 꾹꾸~!"

"휘이이익 후휘욱!"

멧비둘기와 휘파람새의 웃음(!) 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에 듣는 반가운 새소리에 딸과의 실랑이를 잊고 올라간다. 이 탐방로의 장점은 그늘이 많다는 것이다. 거의 그늘진 숲길이다. 바위 위에 나무가 자라는 독특한 풍경도 구경하고 걷다 보니 어느새 머리 위 숲그늘이 사라지면서 햇살이 비친다. 이제 몇 계단만 더 오르면 정상이다.




기대보다 훨씬 더!

드디어 어승생악 정상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풍경이 훨씬 더 좋다! 소문대로 한라산 정상을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요즘 무릎이 좋지 않아 백록담에 올라가 보지 못한 나로서는 제주도의 가장 높은 곳에 걸어서 올라온 셈이다. 한라산 꼭대기 쪽 산세는 저렇게 생겼구나. 멀리 아래서 볼 때는 골짜기가 없이 완만하게 보였는데, 생각보다 골짜기가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한라산 정상을 배경으로 어승생악 글자가 보이도록 인증사진을 찍는다.

제주도 어승생악 정상.jpg 어승생악 정상(1169m)에서 한라산 방향


그런데 이 날 어승생악은 한라산 전망대이자, 가장 멋진 북제주 전망대임을 알게 되었다. 남쪽으로는 한라산이 눈앞에 똭! 서쪽으로는 비양도, 동쪽으로는 우도와 일출봉까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한림 바다 앞 풍력발전기는 마치 작은 핀들이 바다에 꽂혀 있는 것처럼 보이고, 북쪽에는 제주 시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제주 시내에서 제일 높은 드림타워(38층)도 작은 레고 블록을 하나 더 올려놓은 정도이다. 또, 제주공항에 비행기가 아주 작은 장난감처럼 뜨고 내리는 걸 보니 여기가 얼마나 높은 곳인지 실감할 수 있다.

제주도 어승생악 시내뷰.jpg 어승생악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제주 시내
제주도 어승생악 동쪽뷰.jpg 어승생악 내리막길(제주도 동쪽 방향으로 멀리 우도와 일출봉도 보인다)

파란 여름 풍경 속에 행복한 우리가 있다

정상에 탐방객은 우리 부부가 전부다. 아무도 없어서 제주도 풍경을 구름의 높이에서 여유롭게 누렸다. 충분히 감상한 후에 이제 내려가기로 한다. 그런데 데크길 내리막 풍경조차 멋지다. 아내 뒷모습 사진을 찍어주는데, 갑자기 익숙한 실루엣이 등장한다. 그렇다! 딸이다!!

"우와!"

"오~! OOO!"

딸의 등장으로 부부의 입에서는 감탄사 연발이다. 처음 멈춘 곳에서 한숨 돌린 후, 정상까지 올라오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자신의 속도대로 끝까지 올라온 딸이 대견하다.


"아빠, 그런데 나 지금 속이 안 좋아. 울렁거려!"

가까운 벤치에 털썩 주저앉는다. 힘들어하는 그 모습도 귀여워 사진에 담아 주는데, 찍고 보니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참 예쁘다. 아름답고 파란 여름 풍경 속에 지금 우리가 있다. 이 순간 그냥 감사하다.

제주도 어승생악 서쪽뷰.jpg 서쪽 방향으로는 한림 앞바다 비양도와 풍력발전기까지 보인다


숨을 고르고 난 뒤, 정상 인증샷도 기분 좋게 찍고 하산했다. 우리가 내려올 때는 많은 탐방객들이 위로 올라왔다. 외국인들이 더 많았다.

"Hello!"

“안녕하세요”

"Have a nice day!"

"Enjoy Jeju Island!"

서로 기분 좋은 인사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내려왔다. 딸의 바람대로 제주도에만 판매한다는 귤그림 티셔츠 구입 오픈런을 위해서.


제주도 스투시 가족사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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