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의 별빛
사막에 스며든 지하수가 솟아오르는 작은 기적, 오아시스 하란.
태양은 머리 위에서 강렬하게 내리쬐며, 하늘빛과 맞닿은 모래 언덕은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풀밭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드는 바람은 모래알과 풀잎을 흔들며, 작은 음율처럼 사막에 울려 퍼졌다. 대지 위에는 양들이 자유롭게 뛰놀며, 반짝이는 풀밭 사이로 산들바람이 흘러가듯이 그들의 발걸음이 지나갔다. 먼 언덕 너머, 햇빛에 물든 황금빛 먼지가 바람과 함께 흩날리며 신비로운 광경을 만들어냈다.
그 사이, 풀밭 위에서 한 소년이 가볍게 뛰어다녔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호기심과 생명력이 반짝였고, 오똑한 코와 분홍빛 입술에는 소소한 장난기가 스며 있었다. 그의 미소는 사막의 뜨거운 공기마저 환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가녀린 어깨와 옷깃 사이로 살짝 비치는 쇄골은 남자답지 않은 부드러움을 자아냈지만, 눈빛은 결의에 차있는듯 강인해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하란 마을의 족장, 레이벤의 막내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체구와 여성스러운 눈매를 보고 모두들 의심했다. “이 아이가 후계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스며들었다. 그래서 그는 ‘암양’, 즉 레이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때때로 은근히 무시와 냉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 모든 시선에도 레이첼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풀밭 사이를 뛰어다니며, 발자국마다 생명을 심는 듯한 활력을 뿜어냈고, 마치 하란의 태양처럼 언제나 밝고 따스한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은 우물가로 몰려들었다.
거대한 돌이 우물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우물은 마을의 생명줄이자 재산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불안이 번졌다. “누군가 이 땅을 탐내는 걸까? 혹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여 위협을 주려는 걸까?” 남자들은 힘을 모아 돌을 굴려 열어보려 했지만, 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를 보며 낙담한듯 웅성거렸다.
“도대체 누가 이 돌을 치울 수 있을까?”
그때 레이첼이 우물가로 다가왔다. 남자들은 비웃었다.
“아무도 이 돌을 움직이게 하지 못했어. 이 돌을 들어 올릴 뾰족한 수라도 있는게냐?”
그러나 레이첼은 굴하지 않았다. 그녀의 지팡이를 돌과 우물 사이에 끼우고 있는힘껏 당겨 돌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막대는 퉁겨져 바닥에 굴렀고 그것을 피하려다, 균형을 잃은 순간 옷이 흘러내리며 가슴 일부가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황급히 옷을 여미었지만, 이미 사람들의 눈은 그녀의 존재를 확인한 뒤였다.
사람들은 충격과 배신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외쳤다. “역시 여자였구나!” 그들의 목소리는 사막의 열풍처럼 뜨겁고 날카로웠으며, 서로를 노려보며 쏟아내는 말들은 점점 격해졌다.
“족장이 우릴 속였어! 여식을 후계자로 세우다니!”
“사막의 신이 노하신 게 틀림없다. 그래서 침입자들을 보내신 거야!”
“평화는 끝났다. 하란은 이제 피바람 속으로 들어가고 있어!”
“이게 다 레이벤과 그… 암양 때문이야!”
말들이 날카로운 화살처럼 레이첼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녀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한 채 서 있었지만, 눈앞이 아른거리고 심장은 무너지는 모래탑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머릿속은 소용돌이쳤다.
‘내가… 내가 정말 이 모든 혼란의 시작일까? 아버지가 나를 후계자로 세우지 않았다면, 사막의 신이 벌을 내리지 않았을까… 침입자도, 싸움도 없었을까…’
사막의 태양빛은 여전히 온 세상을 환히 비추었지만, 레이첼의 시야는 어둠으로 덮여 갔다. 자신의 이름과 존재가 이 모든 혼란의 씨앗이 되었다는 생각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후계자인가, 아니면 하란을 파괴한 죄인인가…’
그때, 모래 언덕 너머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모래바람과 고함 속에 묻혀 주목받지 못했지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사람들의 시선이 서서히 그쪽으로 향했다. 언덕 너머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발걸음은 비틀거렸고,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옷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졌고, 손에는 말라붙은 피가 묻어 있었다. 숨은 거칠었고, 모래 위를 걸을 때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흔들렸다.
마지막 힘을 짜내듯 몇 발자국을 옮기더니, 그는 뜨거운 모래 위에 무릎을 꿇었다. 사람들은 순간 숨을 죽였다. 그의 등 뒤로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 그가 걸어온 고단한 길을 말해주는 듯했다.
레이첼은 망설임 없이 달려가 그의 머리를 무릎에 눕히고, 가죽 주머니의 물을 남자의 입에 흘려 넣었다. 얼굴에 묻은 모래와 말라붙은 피를 닦아내자, 햇빛에 반짝이는 그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레이첼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얼굴이 붉게 물들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온몸을 채웠다.
제이콥은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은 레이첼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속에는 광야의 밤하늘처럼 반짝이는 별이 있었다. 첫눈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순간이었다. 이 먼 길을 걸어 이곳에 온 이유가, 어쩌면 바로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느꼈다.
“나... 난… 제이콥입니다. 어머니, 레베카가 이곳에 삼촌이 계시다 하여 무작정 별을 따라왔습니다. 나를 구해주신 아름다운 천사여,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을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레이첼은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오, 하늘에서 내려주신 나의 용사여. 대지의 여신이 사자 같은 힘을, 사막의 신이 뱀 같은 지혜를 그대에게 주시길 바랍니다. 황야의 간악한 무리가 막아놓은 저 커다란 돌을 치워, 어린양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해주겠습니까?”
제이콥은 힘을 내어 일어나, 머리만 한 돌을 찾아 우물로 향했다. 부러진 지팡이를 지렛대로 이용하자, 돌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움과 감탄을 숨기지 못했고, 함께 힘을 모아 돌을 굴렸다. 결국, 우물의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양들은 시원한 물을 마셨다.
레이첼은 숨을 고르며 외쳤다.
“이분은 무수한 모래와 별들의 아버지 아브람의 손자, 축복의 아들 아이작의 장자이며, 하란의 여주 레베카의 아들 제이콥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충격과 경이로움 속에 입을 다물었다. 이제 더 이상 레이첼을 조롱할 자는 없었다.
하란의 태양 아래, 양들과 모래, 끝없이 펼쳐진 초원 속에서 두 사람의 운명은 서로에게 깊이 새겨졌다. 레이첼은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었고, 제이콥은 새로운 삶과 만남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
오아시스의 햇빛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하란의 바람이 두 사람의 존재를 감싸 안으며, 먼 미래까지 이어질 전설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