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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을 위한 7년 계약

by 무이무이

[시:창세기를 위한 시] 연재북의 9화, 10화, 11화에 이어 제이콥이 하란에 도착해 레이첼을 만나고 난 뒤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이콥이 레베카의 품을 떠나 하란 성에 온 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레이첼은 하란과 그 주변 지리에 익숙했기에, 제이콥은 그녀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웠다.
어머니와 살 때는 집안일만 했으니, 모든 것이 새로웠다.

그럼에도 제이콥의 팥스튜는 에이서스가 장자의 명분을 맞바꿀 만큼 손맛이 뛰어났다. 그 솜씨만큼은 제이콥의 분명한 장점이었다. 레이첼이 그런 그에게 목축 지식을 전해주는 것이 아깝지 않았을 것이다.

레이벤이 레이첼을 남자아이처럼 키운 것은 겉으로는 딸을 너무 사랑해 시집보내기 싫어서인 듯 보였지만, 속으로는 계산이 있었다. 하란의 성주였던 그는 사내자식이 없으면 권력을 세습할 수 없다는 풍습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레이첼을 남장시켜 키운 것이다.

그래서 제이콥의 등장은 그에게 반가운 일이었다. 여동생 레베카의 아들이자 혈통을 잇는 존재, 그를 통해 자신의 가문을 연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첼은 늘 아버지에게 제이콥을 칭찬했다. 이 새로운 일꾼의 등장에 레이벤의 욕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제이콥이 외삼촌 레이벤의 처소를 찾았다.
“무슨 일이냐, 제이콥? 나는 네가 여기 있는 것이 참 좋구나.
네가 온 뒤로 양들의 번식이 활발해지고, 흰털의 값도 올랐지. 어쩌면 레이첼보다 일을 더 잘하는구나.”
레이벤은 마치 제이콥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제이콥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삼촌, 저는 레이첼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딸, 하란의 축복받은 여신의 소생을 제 아내로 맞게 해 주십시오.
이 몸이 부서질 때까지 보답하겠습니다. 제가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삼촌도 잘 아실 겁니다. 이곳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레이벤의 눈썹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이것 봐라, 생각보다 나에게 먼저 이런 제안을 해오다니. 나야 고맙지.....
그는 잠시 제이콥을 바라보다가 잔잔히 웃었다.
뒤이어 레이벤은 짐짓 내키지 않는 어투로 말했지만, 그 눈빛에는 묘한 흥미가 섞여 있었다.

“사실 나도 눈치채고 있었다. 레이첼은 늘 네 얘기만 하더군. 네가 우물의 돌을 옮기던 날부터 이곳 사람들은 네 지혜와 힘에 감탄했어. 나도 그때 알았지. 이 아이, 보통이 아니구나.”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시선을 내리 깔았다.
“솔직히 말해, 네가 내 사위가 되는 건 나쁘지 않아.
너는 우리 가문의 유일한 혈통이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

레이벤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다.
이 마을의 모든 눈이 너와 나, 그리고 레이첼을 보고 있어.
그들의 눈에는 너와 레이첼의 결혼이 권력 세습의 단초로 보일 수 있어. 특히 레이첼은 한때 후사로 여겨졌던 아이야.
그녀가 여자임이 드러난 뒤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지. 그런 상황에서 너를 사위로 들이면, 사람들은 내가 혈통을 핑계로 권력을 물려주려 한다고 수군댈 거야.”

레이벤은 잠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바람이 천천히 커튼을 돛처럼 부풀렸다.
“이곳의 사람들은 척박한 땅과 모래 바람에 시달리며 사는 이들이다. 근면함, 땀, 인내… 그게 이곳의 언어야.
네가 그들의 언어로 말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는 천천히 제이콥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제안을 하나 하지.
7년 동안 이 땅에서 나와 함께 일해보거라.
양 떼를 돌보고, 들의 바람과 모래를 견디며 이곳 사람들에게 네 진심을 보여줘라. 그 7년이 지나면, 레이첼은 너의 아내가 될 것이다.”

레이벤의 눈에 묘한 불빛이 스쳤다.
“물론 7년이란 세월은 길지. 하지만 그때까지 네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짜 사랑일 거야.
만약 변한다면, 그건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던 거지.”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매서웠다.
그 안엔 계산과 시험이 함께 섞여 있었다.

제이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의지는 오히려 강해졌다.
레이벤의 말이 맞는지, 아니면 또 다른 덫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레이첼의 얼굴이 떠오르자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그녀의 웃음, 우물가에서 반짝이던 눈빛, 그 모든 것이 제이콥의 결심을 다시 세웠다.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레이첼을 아내로 맞이할 수만 있다면, 7년은 7일과도 같을 것입니다. 제가 감히 하란의 성주가 되는 영광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레이첼과 삼촌을 위해 그 정도쯤은 견뎌보겠습니다.”

레이벤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따뜻했으나, 속을 읽기 어려웠다.
그가 제이콥의 순수함을 이용하려는 것인지,
진심으로 그를 시험하는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제이콥은 그 미소를 마주하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7년이라… 그래, 사랑이라면 그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의 눈동자에는 이미 시간의 길이를 초월한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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