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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좋은 선생님이라는 착각_1화. 선생님이 딱이다!

by 마음리본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무관하게 재구성된 허구이며,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학창시절, 삼남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지만,

자기 할 일을 딱부러지게 하는 모범생이었다.

학급의 모든 아이들과 단 한번도 분쟁이 없을 만큼.


‘교우 관계가 매우 원만하고, 누구와도 사이좋게 잘 지내며,
학급에 좋은 영향력을 주는 모범 학생임.’


삼남의 학교생활기록부에는 항상 이런 말들로 도배되었다.

선생님들의 칭찬이 엄마의 얼굴에 웃음꽃을 피게 할 때마다

삼남은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원서 쓰는 날이 다가왔다.

“집안 형편도 그렇고, 너는 교대가 딱이다.”

삼남을 예뻐했던 3학년 담임교사는

그렇게 삼남의 진로를 정해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삼남은 초등교사가 되었다. 숙명이라 여겼다.

어린 시절, 동네 동생들을 앉혀놓고

유리에 분필로 더하기 빼기, 기역 니은을

가르치던 그녀였다.

선생님 놀이는 삼남의 역할극 단골 레퍼토리였다.

‘어쩌면 교사가 되고 싶었는지도 몰라.’

삼남은 그렇게 믿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삼남은 교사 일이 꽤 잘 맞았다.

아이들이 좋았고,

수업 준비에 열을 올리는 일이 즐거웠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칠판 앞에 서서, 아이들 앞에 서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게 기뻤다.

그들은 그녀의 말에 웃었고, 따라 했다.

삼남이 계획한 수업에서 손을 들고 발표했고,

노래하고 뛰어놀았다.

교실에서 삼남은 중요한 사람이었다.


‘아, 나… 원래 선생님이 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적성에 딱 맞잖아?’


그 착각은 생각보다 오래 갔다.

첫 담임을 맡은 해, 삼남은 신규교사가 그렇듯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아이들을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자부했고,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선생님이랑 이 약속 지키는 거야.”

“힘들어도 괜찮아. 선생님이 여기 있어줄게.”

“너희가 정말 원하는 일이 뭔지 고민했으면 좋겠어.”


그런 말들을 진심으로 건넸다.

선물처럼 다가오는 아이들, 일상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삼남은 더 큰 열의로 가득찼다.

교육과정에도 없는 체험학습을 가고,

매년 학급문집을 만들었다.

새로운 교수법을 배우고,

학급운영 연수를 들었다.


가끔은, 너무 열심히 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너, 왜 이렇게 나서니?”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삼남은

정말, 누구보다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다.

삼남이 몰랐던 건, 그 순수한 열정이

언젠가 자신을 소진시킬 거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안고 가겠다고,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눈빛으로 약속했던 아이들 앞에서,

어느 날 삼남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그리고 느리게, 깊고 조용하게 파고들었다.

아직은 몰랐다.

그 눈부신 초임 시절의 교실에서는,


‘나는 누구를 위해 이토록 애쓰고 있는 걸까’

그 질문이 마음 어딘가에서,

살며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긴 생머리, 노랑 투피스 치마를 입은

젊은 여선생이 교단에 서 있다.

그녀는 밝고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아이들은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자지러지게 웃는다.

선생은 연수에서 새로 배운 교육 연극을 적용하고 있다.

바늘과 실 놀이. 선생님이 바늘이 되고, 학생들이 실이 된다.

선생의 움직임에 아이들은 최면을 건 듯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까르르. 함께 웃는다.


“오늘 국어 시간엔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 동화를 함께 읽고

책 속 한 장면을 표현해 보기로 해요.”

모둠별로 인상깊었던 장면을 정하고, 앞에 나와 하는 짤막한 연극.

“하나, 둘, 셋, 찰칵 할 때 장면을 표현하는 거에요.”

첫 번째 모둠, 찰칵!

술병 대신 물병을 소품으로 들고 고주망태로 취한 아빠,

집 나간 엄마, 양녀로 가는 영미,


선생님의 뾰로롱 요술봉에,

갑자기 살아나 말을 하는 캐릭터들.


아빠 : 술이 없으면 이 세상 살아갈 재미가 없지. 큰돌이 어딨어. 술 사와, 술 사오라고!


엄마 : 큰돌이 아빠와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맨날 술 먹고, 나를 때리니 애들은 불쌍하지만, 어서 이 집을 나가자.


영미 : 나는 부잣집보다 밤티마을 우리 집이 좋아. 큰돌 오빠, 제발 나를 좀 데려가 줘.


팥쥐엄마 : 큰돌이랑 영미가 불쌍해. 진짜 엄마는 아니지만, 내가 이 아이들을 잘 키우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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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극이 끝난 후, 각자의 소감을 말하는 시간.

“저는 술을 먹는게 이해가 안 갔는데, 그 역할이 돼 보니,

왠지 큰돌 아빠가 불쌍한 느낌이 들었어요.

일이 뜻대로 안 되고 속상한 마음에 자꾸 술을 마셨을 거에요.”

“저는 팥쥐 엄마가 대단한 것 같아요. 자기가 낳은 자식도 아닌데,

큰돌이가 아무리 밀어내도, 잘해주잖아요. 원래 전래 동화 속 팥쥐 엄마는 나쁜 사람인데...”

“저는 영미가 너무 불쌍해요. 저라면 당장 부잣집에서 뛰어나왔을 거에요.

아무리 돈이 좋아도, 큰돌 오빠랑 할아버지랑 사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요.”


이 쯤 되면, 영미가 부잣집에 입양 가는 게 더 좋은지,

큰돌이네 집에 사는 게 좋은지로

토론이 펼쳐진다.

“새 필통, 새 문구세트, 새 옷. 영미에겐

부잣집에 사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아요.”

“아무리 부잣집이 좋아도, 영미가 집 앞 장미만 봐도 고향을 떠올리잖아요.

양부모가 아무리 잘 해줘도 내 부모는 아닌걸요.

사랑이 한계가 있죠. 영미에겐 밤티마을이 딱이에요.”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스스로 주인공의 마음에 공감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문학은 삶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던가?

아이들과 책 한 권으로 서로 마음을 나누고,

토론하고,

질문을 만들고,

함께 글을 쓰는 시간들이 있었다.


삼남은 그 시간들이 참으로 따뜻했다.
교실 안에서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순간을 보았다.


어제보다 조금 더 깊어지고,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들이 교실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 작은 변화들이 모여
언젠가는 세상을 지탱할 큰 숲이 될 거라 믿었다.


삼남은 자신이 그 숲을 키워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 세상 어떤 직업보다도 귀한 일을 맡았다는 사실에,
가슴 깊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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