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에 이어 계속-
며칠이 지나자, 가게 사람들은 자연스레 정소이를 가족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소이야, 물김치 떨어졌네. 채워야겠어.”
“네, 이모!”
“소이 씨, 여기 이거 좀 닦아주세요.”
“알겠어요, 사장님.”
춘심은 소이가 설거지를 끝내고
서툰 손으로 김밥 재료를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참 성실하네. 가르치면 괜찮겠어.”
어느 비 오는 오후, 손님이 몰려 정신없이 바쁜 날이었다.
그날 정소이는 처음으로 계산대 앞까지 나갔다.
정숙은 밀려드는 김밥 배달 주문으로 바빴다.
한 손님이 물었다.
“저기요, 여기 셀프바에 단무지 떨어졌어요.”
“아, 네! 잠시만요!”
소이는 주방 냉장고에서 단무지를 꺼내, 셀프바로
가져갔다.
그 때였다.
“쨍그랑!”
우동을 주문한 손님이 서빙을 기다리지 못하고,
막 나온 뜨거운 우동을 들고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손님과 소이가 부딪히며, 우동이 소이 팔에 쏟아졌다.
“앗, 뜨거워!”
단무지와 우동이 동시에 와락, 쏟아졌다.
손님의 손에도 뜨거운 우동이 조금 튀었다.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자신의 아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소이가 사과하고 있었다.
“젊은 아가씨가 조심을 해야지, 이거 어떡할 거야?”
“죄송합니다, 손님. 제가 치료비라도 배상을...”
“저... 손님?”
정숙은 김밥을 말던 손을 중단하고, 밀려드는 주문을 막기 위해 배달앱부터 껐다.
“많이 뜨거우시죠? 일단 이걸로 응급처치부터 하시죠.”
냉동실에 있던 얼음과 수건을 손님에게 내미는 정숙.
“거참, 재수가 없을라니까 별 비쩍 마른 아가씨가 다 앞길을 막는구만.”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숙은 화가 났다.
자신도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실수가 있는 걸
재수 없는 저 손님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정숙은 손님이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소이 씨, 뭐가 그렇게 죄송해. 이제 그만 죄송해.
다친 덴 없어요? 얼른 주방 가서 찬물에 씻어요.”
“사장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할 것 없어요. 장사하면 이런 일 한 두 번 아니야.”
“어이, 당신이 사장이야? 직원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이 자식아, 직원 교육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그만 처 먹고 나가? 너 같은 손님 필요 없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정숙은 꾹 참으며, 반달 눈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아하, 손님! 죄송합니다. 앞을 똑바로 보도록,
직원 교육 잘 시키겠습니다.
이건 서비스예요~
혹시 물집이 잡히거나 하시면 저희에게 병원비용 청구하세요.
근데... 저희 직원도 다친 것 같으니,
혹시 병원에 갈 일 있으면 손님께 병원비 청구해도 될까요? 쌍방 과실인 것 같은데...”
“뭐? 쌍방 과실? 참내, 맛도 없으면서
불친절하기까지 하고,
내가 이 가게 장사 못하게 할 줄 알아?
구청에 비위생 업소로 신고할 거니 알아서 해?”
“네, 네 신고하시죠. 지금 전화할까요?
안 그래도 담당 구청 직원을 알고 있는데, 저희 집 단골이거든요?”
“에잇,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거지 같은 김밥집 사장이 *랄이네. 나 원. 재수 없어. 에퉤퉤.”
우락부락 화가 난 남자가 나가는 순간, 지완이 들어온다.
“무슨 일 있었어요?”
“한 건 했어요.”
얼굴이 발그레해진 정숙은 브이를 그려 보이며 씩 웃었다.
저녁 9시, 마감 시간...
“당신 성질 죽지 않았네.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성질...
그래도 좀 참지 그랬어?”
지완은 별점 테러와 함께 불친절하다느니, 비위생적이라느니
늘어놓은 악성 리뷰를 보며,
정숙에게 말했다.
“걱정 말아요. 우리 가게가 어디 그런 리뷰 하나 따위에 흔들릴 가게인가?우리 단골 손님들은 가게가 없어질까 봐 걱정이구만.”
“사장님... 저 때문에 괜히, 죄송해요.”
혹시 모를 화상이 있을까 봐 병원에 보냈던 소이는
손등에 화상을 입고 붕대를 감고 있었다.
“당분간 물은 묻히면 안 되겠어요. 소이 씨는 주문만 받아줘요.”
소이는 거의 울상이었다.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제가 하는 일은 왜 이 모양인지... 흑...”
“무슨 소리예요. 소이 씨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손이 덜 갔는데. 큰 역할 해 주고 있으니 걱정 마요.
그리고,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나도 처음에 김밥 썰 때 얼마나 삐뚤빼뚤 했다구.
맨날 옆구리 터트려먹고...”
“나도 접시 깨트리고, 주문 잘못 받고 그랬어. 소이야. 울지 마!”
아들에게 줄 김밥을 포장하며 후엔이 말했다.
“그럼, 이쁜 소이가 와서 우리 가게에 젊은 남자 손님이 늘었는걸?
그리고, 소이 양 재능 있어. 음식만 30년 한 내가 딱 보면 알지.”
춘심 이모까지 거들어 위로해주고 있었다.
‘나 이렇게 사랑받아도 되나? 이들은 왜 이리 나에게 친절한 걸까?’
소이는 영문을 알지 못했다.
엄마는 자신이 뭔가를 잘했을 때만 칭찬했다.
엄마의 기대는 날이 갈수록 높았고,
소이는 그 기대에 충족 못하면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다 자신을 조건 없이 사랑해 주는 전 남편이 나타났을 때, 그 사랑에 홀랑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 남편도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길 바랐다.
그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자, 남편은 자신을 떠나갔다.
소이는 처음으로 자신이 잘못을 해도,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자체로 괜찮다고, 실수한 자신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소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저… 여기 있으니까 좋아요.”
“왜요?”
“살아 있는 기분이 들어요.”
마감 후, 남은 불빛 아래에서 소이는
젖은 고무장갑을 벗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이 자신을 버린 것 같던 날도 있었지만,
지금은 누군가가 먹을 음식을 위해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 그냥 뭘 하지 않아도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