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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필요한 것?

by 마음리본

드디어, 아이가 나타났다.

며칠 동안 안 보였었다.

아이는 걸을 힘조차 없어 보였다.

정숙은 김밥과 우동을 춘심에게 주문한 후,

아이가 보지 않게 작은 손짓으로 소이에게 전화 시늉을 했다.

시나리오는 짜여있었다.

아이가 오면 춘심이 김밥을 느리게 만들고, 소이는 전화를 하기로 돼 있었다.


”어서 와. 며칠 안 보여 기다렸다구.“

따뜻한 국물과 죽을 내오며 정숙이 말했다.

”저를...... 기다리셨어요? “

”응, 그럼... 아줌마도 외롭거든. 사춘기 딸 하소연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

아이는 정숙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럼..... 제가......들어드릴게요.“

아이는 뜨거운 죽을 호호 불어 황급히 들이켰다.


정숙은 아침마다 샤워 전쟁을 벌이는 자신의 딸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학교 갈 시간을 매번 넘기는 딸의 샤워와 드라이,

외모 치장 이야기는 사실이기도 했다.

”저기.... 그러니까, 너도 외롭거나 힘들면 아줌마한테 털어놔도 돼.“

아이는 이야기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 듣다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저.... 학교 가고 싶어요. 친구들 만나고 싶어요...“

그 순간 아이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아빠는 맨날 술만 먹어요. 하루 종일 술 취해 5시에 자요... 그래서 그 시간에만 밖에 나올 수 있어요.“

아이를 보는 정숙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슴 한 구석이 쿡쿡 찌르듯 아파왔다.


”너....맞기도 하니?“

”............아니요?...........네....“

아이는 처음엔 고개를 젓더니, 이내 수긍했다.

정숙은 단호히 말했다.

”이건 아동학대야. 아줌마가 신고해 줄게.“

”싫어요. 그럼 아빠가 저를 죽일 거에요.

저는 원래부터 없었어야 하는 존재였어요.“

”아니야, 아줌마 눈을 봐.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아이야.

누구도 널 해칠 수 없어.“

”저는 쓰레기에요. 아줌마. 굶어도 싸요. 저희 집에 있는 쓰레기들처럼요.“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무엇이 아이를 이렇게까지 만들었을까?

이렇게 되도록 방치한 사람은 누군가?

정숙은 진작 아이를 구해주지 못한 게 가슴 아팠다.

그때, 구청 복지사 신예영과 장상복이 들어왔다.

뒤따라 경찰이 왔다.

정숙은 녹음된 휴대폰 파일을 경찰에 넘겼다.



아이의 이름은 ’김현제‘

아이 엄마는 아이를 낳고, 떠났다.

아빠는 엄마가 떠난 후,

아이를 기르며 아이 이름으로 아동 수당을 받았다.

아이는 햇빛도 보지 못하고 자랐다.

아빠가 술에 취해 잠이 들면

아이는 집에 있는 음식물 찌꺼기를 주워 먹으며 자랐다.

아이가 4살 무렵, 새 엄마가 집에 왔지만,

새 엄마도 아이를 돌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새 엄마는 아이를 귀찮아했고, 필요 없는 사람 취급했다.

아빠는 몇 년 전,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그만 추락사고로 다리를 다쳤다.

그 후 술을 살 때만 밖을 나갔고,

온종일 취한 채 하루를 살았다.

새 엄마마저 집을 나간 후, 아이는 온전히 방치되었다.


“현제야, 우리랑 같이 갈까?”

복지사 신예영이 다정하게 물었다.

현제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싫어요… 저, 여기 있을래요…”

“괜찮아. 아저씨, 아주머니가 너 해치지 않아. 우리가 널 안전한 곳으로 데려갈 거야.”

경찰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정숙은 조심스레 아이 옆에 앉았다.

“현제야, 아줌마 봐봐.”

아이는 눈을 뜨고 정숙을 바라봤다.

“이분들은 널 도우러 왔어. 그리고… 아줌마도 여기 있잖아.”

정숙이 아이의 손을 잡자, 현제의 작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빠가 나 죽이러 안 와요?”

“응, 약속할게.”

그날 오후, 아이는 경찰차에 태워졌다.

아동보호소에서 일시 보호 조치를 받기로 했다.

떠나는 순간까지 아이는 정숙의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

“아줌마… 나 다시 올 수 있어요?”

“그럼. 언제든 올 수 있어.

이곳은 네가 오고 싶은 만큼 맨날 와도 돼.”

정숙은 울음을 참고 말했다.


며칠 뒤, 미소김밥의 주방은 평소처럼 분주했지만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후엔은 김치를 썰다 말고 조용히 말했다.

“그 아이… 지금 보호소에 있어요? 먹을 것도 잘 먹고 있대요?”

정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그래도 마음이 자꾸 쓰여요.”

“저도요.” 정숙이 말했다.

“그래도 너무 다행이에요. 사장님이 큰 일 하셨어요.”

"큰일은요..."

정숙은 죄책감이 느껴졌다.

아이를 데려와 키울 용기는 없는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사람을 데려와 먹이고, 입혀야 했는데.

온갖 착한 척은 다 하면서, 정작 학대당하는 아이를 돌볼 자신은 없었다.


띠링~!

두 달 후, 뜻밖의 방문자가 가게 문을 열었다.

작고 여윈 어깨. 아직 살이 다 오르지 않은 아이와 40대 여성.

“현제야…”

정숙이 숨을 삼켰다.

현제는 조심스레 다가왔다. 손에는 작은 편지가 들려 있었다.

“저… 이거요. 이제 학교 나가요. 한글도 쓰게 됐어요. 여기 이 분이 저 맡아주신 아줌마예요.”

정숙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현제는 아동보호소를 거쳐 위탁 가정에서 살고 있었다.

“정말 잘됐다. 어디 보자, 이렇게 잘 생겼었네.”

이전의 비쩍 마른 얼굴에 비해 조금은 살이 오른 현제는

누가 봐도 똘똘해 보이는 준수한 외모였다.

"현제가 여기 꼭 오고 싶다고 해서요. 아주머니가 천사라고, 도와주신 분이라고.

저도 이 근처 살거든요. 앞으로 자주 올게요."


정숙은 기뻤다. 안 그래도 현제가 잘 지내고 있는지,

이상한 가정에서 또 다른 학대를 받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는데

눈으로 자주 보면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자주 놀러 오렴. 학교 끝나고 배고프면 와~!"


그날 이후 현제는 방과 후마다 미소김밥에 들렀다.

처음엔 김밥 한 줄을 먹는 게 전부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정숙은 일부러 그에게 작은 심부름을 맡겼다.

“현제야, 물 좀 따라줄래?”

“네!”

“이건 주문표야. 이거 놓아줄래?”

“네, 저 이런 거 잘할 수 있어요!”

“현제야, 학교에서 친구 많이 만들었어?”

심부름할 거 없나 두리번거리는 현제를 보며, 소이가 물었다.

"아뇨, 아직... 저 친구가 없어요. 친구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럼, 우리 착한 현제랑 친구 안 하면 걔네들이 손해지.

그리고, 넌 이미 친구를 만들었어. 우리 모두가 네 친구잖아.”


며칠 후, 정숙은 가게 앞에서 작은 장면을 목격했다.

햇살이 부서지는 거리에서, 초등학생 현제가 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뛰듯 걸으며 뒤를 돌아본 아이는,

가게 앞에 서 있는 정숙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줌마! 다녀올게요!”

정숙은 조용히 손을 흔들어 답했다.

그리고 가게 문 안으로 들어오며, 현제의 편지를 떠올렸다.


“아줌마, 김밥 맛있었어요. 따뜻한 마음 주어 고마워요.”

현제는 알았나 보다.

정숙이 김밥에 마음을 말아 넣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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