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기분이 오랜만이었다. 쓸모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사장님, 여기 우동에 참치김밥 하나요.”
“국물 떡볶이 하나, 만두 하나요.”
점심시간, 정숙은 주문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개점한 지 3개월,
미소김밥은 이제 밀려오는 손님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입소문이 나 있었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는 인파,
버스로 갈아타려는 손님,
인근 구청과 법원 직원들,
각종 크고 작은 사무실,
1만 2천 세대 이상의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까지...
황금입지라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 가운데 괜찮은 분식집이라곤 미소김밥 밖에 없었으니,
그냥 대충만 맛있어도 매출이 평균 이상일 터였다.
하지만, 여기는
음식과 청결에 진심인 남자 사장과
친절에 진심인 여자 사장이 있는 곳.
리뷰 평점은 4.8 이상이었고,
진심으로 가게가 번창하길 바라는 찐 후기들로 가득했다.
'혼밥 하기 좋고 가성비 좋은 분식,
미소김밥 쵝오!'
'메뉴가 진짜 다양한데 하나같이 다아 맛있어요. 집밥 같아요.'
'김밥에 당근이 진짜 잘게 썰어져서
엄청 많아요.'
'집에서 싼 김밥처럼 맛있어요.'
'사장님 진짜 친절하십니다.
미소김밥 없어지면 안 돼요!!!'
"사장, 우리도 키오슨지 뭔지 그거 합시다.
바깥 사장은 설거지해야 되고, 안 사장은 주문받고, 김밥은 누가 말아?”
주방장 김춘심은 눈코 뜰 새 없는
점심시간 회오리가 지나가자 지친 듯 말했다.
“설거지 알바를 쓰던지, 키오스크를 하던지
하긴 해야겠어요.”
정숙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으로 주문을 받고, 김밥을 말았다.
대면 주문을 고집했던 지완도 몇 번의 주문 오류를 경험하고 키오스크의 필요성을 느꼈다.
지완은 키오스크를 하게되면 주문 자체가 어려울
엄마, 아빠뻘의 단골 손님들을 떠올렸다.
“요샌 김밥도 기계가 말고 썰기도 한다는데,
그거라도 햐?”
’진짜 손이 모자라긴 하네.
김밥 기계라도 들여야 하나?‘
춘심과 정숙이 대화하는 도중,
딸랑하고 가게문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세요. 어?”
정숙은 반가움과 놀람이 교차했다.
소이는 다시 그 가게 앞에 서 있었다.
간판에는 정겨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미소 김밥’
문 앞에서 몇 번을 망설였다.
돌아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할까 생각도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안으로 들어가야만
내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 안녕하세요…?”
작은 목소리로 문을 밀자, 종소리가 딸랑하고 울렸다.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따뜻한 밥 내음, 단무지의 새콤한 향,
삶이 꾸려지는 소박한 냄새.
안쪽 테이블을 닦다 정숙이 고개를 들었다.
“어머, 포옹 아가씨…!”
소이는 반가우면서도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어이구, 이게 누구신가? 포옹 아가씨 아닌가?”
주방에서 저녁 재료를 준비하던 춘심 이모가
반갑게 맞는다.
“어서 와요. 김밥 한 줄 드릴까요?”
“앗, 저... 실은...
혹시......
여기서 제가 할 일이 없을까요?
그러니까 설거지 아르바이트라도...”
그러고 보니, 이제 막 상경이라도 한 듯,
커다란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다.
정숙의 눈이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커졌다.
“일이요?”
“네…”
정소이는 조심스레 말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집에 갔는데, 그냥 할 일 없이 있는 게 눈치 보이고, 부모님 뜻 어기고 결혼한 거라...
도로 집에 들어가 있는데 너무 불편해서요.
이제 저 스스로 한번 살아 보려구요.
막상 집은 나왔는데, 학벌도 짧고, 배운 게 없네요...
저 고등학교도 중퇴해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정숙이 서둘러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이름이 뭐예요?”
“소이에요. 정소이...”
뒤쪽에서 후엔이 고개를 내밀었다.
“설거지? 안 그래도 손이 모자라 힘들었는데!
좋아, 좋아.”
그 말에 주방 분위기가 순간 밝아졌다.
지완이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우리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가 제일 바쁜데…”
“그 시간 괜찮아요. 저는 뭐든 괜찮아요.
하루 종일도 있을 수 있어요.”
소이는 단호히 말했다.
그 단호함 속에는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날부터 소이의 하루는 달라졌다.
처음엔 주로 설거지통 앞에서 보냈다.
기름이 둥둥 뜬 물, 손끝을 따갑게 하는 세제 냄새.
손이 불고, 물집이 잡히고, 손톱 밑이 하얗게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소이 씨, 왜 고무장갑을 안 껴요?”
“고무장갑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자꾸 미끄러져서 그릇 깰까 봐요.”
“깨뜨려도 괜찮아요. 고무장갑 꼭 껴야 돼요.”
“네, 사장님!”
후엔이 슬쩍 다가와 말했다.
“소이 씨, 힘들죠? 안 해본 일 하려면 쉽지 않을 거에요.
나도 처음 주방일 할 때 울었어요.
땀은 줄줄 흐르고, 눈은 따갑고,
그래도 익숙하면 괜찮아요.”
“아니에요. 일하는 게 좋아요.”
그녀의 대답은 거짓이 아니었다.
손이 고되고 몸이 힘들었지만,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기분이 오랜만이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