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너머에서 빛으로
“그 아이 아스퍼거 증후군 아니에요?”
그 말을 듣자 머리가 퉁-, 하고 울렸다. 내가 놓치고 있던 퍼즐 한 조각을 드디어 찾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미 퍼즐 판은 떠나 있었다. 나의 실수 한 조각을 든 채, 조용히 되짚어 보았다.
상담실에서 마주하던 두 인영이 떠올랐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나를 넘어서 허공을 바라보던 아이. 가방을 벗지 않은 채 소파 끝에 걸쳐 앉던 아슬아슬한 그 모습. 그리고 그 옆에서 어깨가 위축된 채 바라보던 또 다른 아이, 내면 아이. 두 인영은 그제야 분리되었다.
내담자를 보기 전,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난 나의 내면 아이를 먼저 찾아가 보기로 했다.
나의 내면 아이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어떤 시대에 머물러 있을까. 먼저 알아볼 것은 그것이었다. 보통 내면 아이는 어린 시절의 결핍과 상처로 만들어진다. 가장 선명하게 남은 기억의 모습으로 성인이 된 나와 같이 살아간다.
나의 내면 아이는 잠옷 차림의 어깨가 움츠려진 여자아이다. 집 안에서 혼자 있으면서 외로움과 쓸쓸함을 배워가던 그 모습으로, 나를 본다. 나 또한 그와 눈을 마주친다.
“혼자 많이 외로웠지. 지금은 나랑 같이 있자. 우리라면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거야.”
나의 한마디로는 크게 요동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해서 부딪힌다면 달라진다.
“계속, 옆에서 기다릴게.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생길 때까지. 날 믿을 수 있을 때까지.”
한마디만으로는 신뢰가 쌓이지 않는다. 나는 눈앞에 마주한 여린 소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 얼마나 인내가 필요한지 안다. 위축되어 있던 작은 소녀가 나에게 눈길을 흘리며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언제 가장 외롭고 슬펐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나를 투명 인간처럼 취급할 때….”
“네가 혼자가 된 순간들이 그때였구나. 많이 외로웠겠다.”
사랑을 바라는 여린 소녀의 어깨를 따뜻이 감싸 안았다. 그녀의 작은 팔이 마주쳐, 우리는 서로를 안았다. 그렇게 나와 내 내면 아이는 서로를 포용할 수 있게 된다.
내면 아이는 마주하기가 두렵다.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다. 각자의 ‘나’에서 ‘우리’가 된다면, 무엇도 두렵지 않다.
이제 다시, 그 내담자 아이를 바라볼 차례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난 무엇을 다르게 볼 수 있을까? 설령 아스퍼거 증후군이 아니더라도, 상담실에는 늘 각자의 세계를 가진 아이들이 많이 온다. 때론 담임교사나 학부모도 그 특성을 모른 채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상담교사의 어깨가 무겁다. 무지에서 오는 친절과 지식에서 비롯된 믿음 사이의 경계를 지켜야 한다.
섣부른 판단은 선입견이 된다. 담임교사와 학부모와의 이야기를 통해 얻은 정보들은 유용하지만 때론 선입견이 될 수 있다. 양날의 검이다. 진짜 전문가는 “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태도”로 다가가야 한다.
모든 정보를 알고 있더라도 마음만은 언제나 0이어야 한다. 0에서부터 차곡차곡, 그 아이를 직접 마주하며 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관찰’의 시작이니까. 앞으로 나의 내면 아이의 그림자에서, 아이들을 바라보지 않기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이를 그대로 마주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