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바람 속에서 온기를 가진 상담실이 되기를
임용을 준비하던 시절, 습관처럼 뱉던 말이 있었다.
“저는 한겨울의 솜이불처럼, 아이들을 덮어주고 싶어요.”
그 시절에는 어떤 상담교사가 되고 싶은지 비유로 말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온기를 나눠줄 수 있는 상담교사가 되고 싶었다.
“어떤 상담교사가 되고 싶으세요?”
사람마다 대답은 달랐지만, 마음의 결은 비슷했다. 촛불처럼 어둠을 비추려는 사람도 있었고, ‘되어가는 존재’를 바라보며 조용히 옆에서 응원해주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표현은 달라도, 어린 존재를 향한 따뜻함이라는 중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 상담실을 청소하고, 정리하며 들떠있었다. 상담실에서, 상담교사로서 아이들을 만날 설렘에 두근거렸다.
‘아이들을 어떻게 맞이해주면 좋아할까?’
‘상담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지만 나의 이 설레는 기대감은 현실에 무너졌다.
“선생님 심심해요.”
“놀 거 더 없어요?”
“저 만들기 하고 싶은데 언제 그거 사요?”
아이들은 고민을 나누기보단, 놀 장소를 찾으며 들락거렸다. 문턱이 낮춰진 건 뿌듯했다. 내가 신학기 상담주간이나 사과데이같은 행사하는 이유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상황들도 있었다.
“담임선생님이 여기로 오라고 해서 왔어요.”
“여기가 상담실인가요? 이곳에서 하면 된다고 해서요….”
수업 시간에 집중이 어렵거나 감정이 격해져 보내지는 아이도 있었다. 가끔은 외부 손님이 오갈 데 없어 업무를 보기 위해 들르기도 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바람이 달라졌다. 따스한 온풍, 현실의 시린 돌풍 등 다양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하나의 공간에 다양한 시선들이 매여있다는 걸 체감하게 되었다. 기대와 다른 현실에 마음이 시려왔고, 상담의 공간이 아니게 될 때는 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깨달았다. 바람에 맞서기보단 바람을 타고 올라서야 한다는 것을. 상담교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듯, 상담실을 생각하는 마음 또한 달랐다. 차이라면, 상담교사는 서로 비슷한 결을 품고 있었지만, 상담실은 바라보는 사람마다 전혀 다른 의미로 채워진다는 점이었다.
어떤 아이에겐 쉬고 놀 수 있는 아지트, 어떤 아이들은 피난처 등등. 하나의 공간이지만 다른 세계를 품어냈다. 나는 이 모든 의미들을 이제는 품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들은 오히려 상담실의 의미를 더 단단하게 다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에겐 상담실이란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이다. 상담이 이루어지고, 아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도 안전한 공간. 그리고 그만큼 중요한 건, 그 모든 것이 상담교사가 그 자리에 존재하기에 가능하다.
아이들은 나 없이도 놀 수 있다. 하지만 ‘놀 수 있는 곳’과 ‘안전한 곳’은 다르다. 즐겁지만 불안한 공간은 많다. 그러나 내가 이 자리를 지킨다면, 아이들은 비로소 안전함 위에서 즐거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상담실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상담실이란, 상담교사가 있기에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이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에겐 상담이라는 글자가 낯설고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우리가 그 의미 만들어가면 되니까. 우리가 있기에 상담실이 될 수 있으니까.
나는 오늘도 상담실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 다짐한다. 시린 바람이 와도 견고히 지키는 따스한 이불이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