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수퍼비전을 못 받는 이유
상담교사는 대부분 혼자 일한다. 아무리 꼼꼼히 해도,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한 상담을 더 경험 많은 상담자 앞에 내놓고, 피드백을 받는다. 그 과정을 ‘수퍼비전(supervision)’이라고 부른다. 내 첫 수퍼비전은, 울음으로 끔찍하게 얼룩졌다. 20명의 상담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조용히 무너졌다. 고개를 숙이고, 코 먹은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금방 들통났다. 시간이 지난 지금 알 수 있다. 내가 왜 그렇게 무너졌는지, 뭐가 그리 두려웠었는지를.
처음 그 감정을 알게 된 건 대학교 때였다. 발표하러 앞에 나설 때면 머릿속이 멍해지고, 눈앞이 아른거리며 새하얘졌다. 손이 떨려 들고 있는 종이는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말은 우스꽝스럽게 더듬었고, 눈동자는 지그재그로 춤을 췄다.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도 그랬다. 밥 먹는 모습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밥에만 시선 고정한 채 상대방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그 모든 과정은 나를 지치게 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그 감정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사회불안(social anxiety)”이라는 이름을 마주했을 때, 모든 것을 이해했다.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것 자체에서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 그게, 나를 대표하게 되었다.
임용 첫해, 난 내 인생 첫 상담을 했다. 그 아이를 만나러 갈 땐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이 감정을 이겨내기 위해 일주일 동안 논문을 뒤져보며 열심히 준비했다. 상담은 보통 일주일에 한 번 한다. 그 일주일을 다 소모했다는 건, 그만큼 내가 열정적이었다는 말이다. 아이에게 허락받고 상담을 메모했다. 그 메모를 바탕으로 또 일주일을 내리 준비했다. 플랜 A와 플랜 B를 세우고, 혹시 몰라 짐도 바리바리 싸갔다. 그땐 위 센터*에서 근무할 때라 상담하러 학교로 출장 가야 했다. 경력자들은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지만, 내 가방엔 보드게임과, 인형과, 쓸모없는 위안들로 가득했다.
* Wee센터: 위기 청소년 지원을 위한 상담 센터
그 모든 준비는 결국, 얇은 실타래 같았다. 겉은 단단해 보여도 속은 쉽게 얽히고 흐트러져있었다, 엉킨 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한 번 꼬인 뒤에는 끝까지 풀어야 했다. 엉킨 실타래를 놓지도 못한 채, 나는 그 안에서 점점 조용히 얽혀갔다.
내 첫 상담을 마친 직후, 난 운 좋게 수퍼비전을 받게 됐다.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어쩌면 칭찬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처음치곤 잘했다고, 내 열정을 알아봐 주길 바랐다. 남들보다 뒤처져 있는 나를, 누군가 조용히 눈치채주길 바랐다.
“상담 목표부터 잘못됐어.”
그 말은, 처음부터 잘못됐다는 말이다. 부드럽지만 단호한 교수님의 그 한마디는, 날카로웠다. 내 심장이 난도질되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턱 막히고, 내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억누르던 눈물은 결국 조용히 흘러내렸다. 코 먹은 목소리가 흐르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치챘다. 내 어리숙하고 미련한 모습이, 드러난 게 수치스러웠다.
그 뒤로 열심히 무언가를 적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그 한 문장만이 뇌리에 박혀있을 뿐이다. 시작부터 틀렸다는 그 한마디가, 내 모든 열정과 노력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단지 미숙함 때문이 아닌, 오랜 시간 내 안에 자리한 불안이 나를 압도했다. 사회불안은 타인의 평가를 받는 자리에서 더 커진다. 그 자리에서 난, 상담교사로서 있는 게 아니었다. 평가받을 때마다 주저앉던 한 명의 아이로서 그곳에 존재했다. 그러니 상담을 평가받는 게 아닌, 내가 평가받는 것처럼 느꼈던 거다.
그 이후로, 난 아직 수퍼비전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직 용기는 없다. 하지만 안다. 결국 그 자리에 앉아, 다시 나를 마주하게 되리라는 걸. 상담자라고 완벽할 순 없다. 불안이 없는 상담자도 없다. 다만, 마주하고 인정할 뿐이다. 나도 그렇게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다. 언젠가 다시 그 자리를, 그 아이를 마주할 때…….
그땐, 미워하기보단 조용히 어루만져 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