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 물건에 대한 욕심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10킬로그램 정도 되는 배낭 하나만으로도 일상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서는 물건을 소유한다는 것이 짐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까. 서울에 살 때는 차가 없으면 못 살 줄 알았다. 차는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정말 소중한 두 발이었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차를 구입하지 않았다. 차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 같은 게 생겼으니까. 그래서 새로 입사한 회사를 다닐 때 버스를 타거나 걸어다녔다. 높은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 명품 가방 대신 백팩을 메고서. 아침에 건강 삼아 30분 정도 걸어서 출근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회사 사람들은 차 없이 걷거나 버스 타는 나를 불쌍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런 시선 따위야 그 사람들의 몫인 거고. 그렇게 나의 차 없이 사는 삶이 시작되었다.
제주에 살게 되면서 나는 자차 대신 버스를 타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시작한 알바에 문제가 생겼다.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는 버스 정류장이 없다는 것. 버스를 타려면 걸어서 15분 정도 큰길로 걸어나가야 한다는 것. 물론 카페 출근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가끔 저녁까지 연장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집에 돌아오는 게 문제였다. 내가 사는 이 시골 동네에는 가로등조차 거의 없었고, 특히 밤에는 더 조용하고 더 어두웠다. 나는 어둠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동네 목줄 풀린 개들은 왜 이리 짖어대며 나에게 겁을 주는지.
그러다 카페 사장 언니가 내게 차 키를 주었다. 사장 언니 차인데 어차피 자신은 낮에 필요할 때만 차를 쓰니 너 출퇴근용으로 타고 다니라고 내게 보험까지 넣어서 차 키를 준 거다. 그렇게 나는 갑자기 차가 생겼다. 서귀포시나 제주시처럼 대중교통이 잘되어 있는 곳에 살면 차가 필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처럼 시골에 사는 사람은 차가 필수다. 마트에 가서 장 보고 올 때도 가끔 제주시 병원을 간다거나 할 때도 제주에서 차가 없으면 정말 불편하다는 것을 제주에 살면서 알게 되었다. 난 카페 사장 언니 덕분에 편하고 안전하게 출퇴근을 하게 되고, 이른 아침 카페 출근 전에 이웃 마을에 요가도 하러 가게 되었다. 마치 처음 내 차가 생겼던 그때처럼 제주에서의 차는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카페 알바 3개월쯤 지났을 때, 카페 알바를 그만두어야 할 시점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차가 아쉬운 거다. 카페를 그만두면 차를 반납해야 하는 거니까.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카페 단골 아저씨 고마운 제주사람3에게 "네, 알겠어요."라는 문자를 하나 보내면 되는 상황인데 나는 그날 전화를 걸어 "네, 알겠어요. 그런데 어디세요?"라고 물었다. 아저씨는 차를 구입하러 왔다고 했다. "네? 차를 요? 아저씨 차 멀쩡하고 좋은데 왜 바꿔요?" 하고 나는 물었다. 아저씨는 "제주시 왔다 갔다 하는데 기름값이 너무 많이 나와서 바꾸려고." "그럼, 지금 타고 다니는 차는 어떻게 하려고요?" "이 차? 폐차시키려고." "폐차요? 아직 멀쩡한데...... 그럼 그 차 저에게 폐차하세요!" "그래? 그럼 지금 와서 가져가!"
나는 곧바로 서귀포 시청에서 아저씨를 만나 아저씨의 차를 이전받았다. 차값을 드리려는데 아저씨는 됐다고, 괜찮다고 하셨다. 그럼, 아저씨 새로 사는 차 보험료 제가 낼게요. 했더니 기존 차 보험 이전하면 되는 거라 필요 없다는 거다. 음... 이걸 어쩐담… 그런데 그때 차 이전을 하면서 아저씨의 기존 차에 밀린 세금이 걸려있었다. 나는 얼른 가서 아저씨의 밀린 세금을 결제해버렸다. 이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하얀색 붕붕이 그랜저 XG의 주인이 되었다. 차 없이 살겠다던 내가 말이다. 하지만 제주에서 그랜저 XG는 단순히 물질적인 소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밤의 어둠으로부터 나를 지켜주고, 더 넓은 제주를 탐험하게 해줄 친구이자 가족같은 거였다.
그런데 우주의 기운이 나를 향하는 이 느낌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