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모래 (3)

헬로, 앤디 2

by SY전서주
Gemini_Generated_Image_tdoziltdoziltdoz.png 헬로, 앤디



입구로 들어서니 긴 복도가 나왔다. 벽과 바닥과 천장을 온통 검은색으로 칠한 좁은 복도였다. 양쪽 벽 위에는 금박을 덧대 그린 섬세한 벽화가 있었다. 복도 안쪽까지 이어져 있던 벽화는 벽에 달린 불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어둠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벽화 덕분에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복도 끝 막다른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니 큰 공간이 나왔다.


이곳은 커다란 회의실이었다. 가장 안쪽에는 높은 단상이 있었다. 단상 위에는 크고 화려한 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 의자의 등받이에는 커다란 가죽이 걸려 있었는데, 가죽 위엔 금가루와 은가루를 여러 번 올려 완성한 동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앉는 곳에는 금실로 짠 두툼한 방석도 있었다. 의자 뒤편엔 검은 천 위에 금실로 수를 놓은, 어른 키만 한 높이의 얇은 가림막이 서 있었다. 소년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 의자는 가장 높은 사람이 앉는 의자였다. 소년의 아버지 같은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소년의 작고 야윈 얼굴이 어두워졌다.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자와 탁자 여러 개가 큰 원 모양으로 마주 보며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간단한 음식과 음료가 있던 흔적이 있었다. 이미 한 차례 먹고 마신 후 모두 떠난 듯했다. 회의실 한가운데에는 작은 탁자가 있었다. 흰 천이 덮인 탁자 위에는 술잔과 찻잔, 납작한 그릇, 장신구, 구슬 같은 자그만 세공품들이 있었다. 주로 유리나 조개로 만든 물건이었다. 소년이 탁자로 걸어갔다. 그가 찻잔을 들어 근처에 있던 불빛에 대보았다. 유리 찻잔이었지만 표면이 거칠고 색이 탁했다. 그가 쓰던, 궁전을 가득 채우던 투명하고 빛나던 것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조악한 물건이었다.



‘그대가 가져온 아름다운 물건들은 그대의 이름으로 받겠다.’



이 나라의 왕은 한껏 너그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고된 여정 동안 소년이 억울하게 빼앗기거나, 허망하게 잃어버리거나, 아니면 어딘가에서 살아내기 위해 비굴하게 바치고 남은 물건 중 그나마 덜 부끄러운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결코 그의 이름도 될 수 없었다. 소년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는 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안에 있던 초록 구슬을 땀이 밴 손으로 부서질 듯 꼭 쥐었다.



“헉!”



옆구리에 짧고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소년이 한 손으로 옆구리를 누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



상처는 다 아물었지만, 근육 안쪽으로 퍼지는 듯한 기분 나쁜 통증이 가끔 찾아왔다. 소년은 눈을 질끈 감고 옆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쨍그랑



탁자 위에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실수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소년의 얼굴이 굳었다.



‘어떡하지…? 하… 숨겨야 하나? 그냥 두어도 될까? 아무도 모르게 치워야 할까? 치운다면 저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치워야 하는 거야?’



그 투명한 유리 찻잔은 파란 유리 찻잔과 한 쌍이 되게 만든 것이었다. 소년이 몰래 치운다고 해서 사라진 것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발아래 부서진 찻잔 조각을 바라보았다. 작은 조각들이 불빛에 반짝였다. 소년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미 수천 번 흘러 이젠 메말라 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형편없는 찻잔 하나에 또 스며 나왔다. 물기를 머금은 푸른 눈동자가 슬프게 빛났다. 소년은 한동안 표정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어디선가 젖은 나무 냄새가 났다. 어렴풋이 음악 소리도 들렸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소년이 고개를 들어 그의 키보다 높은 곳에 난 창문을 보았다. 새카만 밤하늘이 보였다. 소년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그는 얼굴에 상처라도 낼 듯, 옷소매로 땀을 거칠게 닦아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곳에 와서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게 싫었다. 낯선 음식도, 기이한 소리도, 이상한 풍경도 다 싫었다. 무엇보다, 그곳이 아니어서 싫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 먼 길을 오는 내내 그를 환영하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소년이 부서진 유리 조각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작 이런 물건들에 얹혀 이곳에서 살게 해 달라 구걸하는 것이 자신의 처지였다. 손등 위에 동그란 물방울 하나가 톡 하고 떨어졌다. 날카롭게 빛나는 유리 조각을 집으려 소년이 손을 뻗었다.



“하지 마!”



누군가의 목소리에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회의실 안에 한 소녀가 들어와 있었다. 처음 보는 소녀였다. 소년이 놀랄 새도 없이 소녀는 그의 앞으로 재빨리 뛰어왔다. 소녀의 가벼운 연두색 치맛자락이 소년의 얼굴에 닿을 뻔했다. 묘한 꽃향기가 났다. 소녀가 소년의 손을 덥석 잡고 그를 일으켰다. 소년은 한 손이 잡힌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녀 앞에 섰다. 키가 비슷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조그만 불빛이 살랑거렸다. 소녀는 소년의 푸른 눈동자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괜찮아. 가자.”

“……”



소녀는 함께 가려 했지만, 소년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잡혀 있던 손을 뺐다. 소녀가 그를 보았다. 소년은 이번엔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외롭게 서 있는 자신을 보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소녀의 빨갛고 도톰한 입술이 심통 난 사람처럼 변했다. 소녀는 다시 소년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소녀는 소년을 회의실 안쪽으로 끌다시피 데리고 갔다. 마지못해 그녀를 따라가던 소년의 눈에, 소녀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 위에서 빛나는 금색의 머리 장식이 보였다. 소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소녀는 단숨에 단상 위로 올라갔다. 단상 뒤엔 돌을 빽빽이 쌓아 만든 거대한 벽이 있었다. 소년이 걸음을 멈췄다. 온갖 크기의 돌을 치밀하게 조립해 만든 높은 벽은 모래밭 한가운데 서 있던 감옥 같기도, 누군가의 무덤 같기도 했다. 소년은 두려웠다. 이 위에 함부로 올라가선 안 된다는 것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빨리 와. 나가자.”



소녀가 소년의 손을 잡고 단상 위로 당겼지만, 소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녀가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왜?”

“……”

“가기 싫어?”

“……”

“여기 혼자 있을 거야?”



소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소녀가 빈 의자와 탁자가 가득한 회의실을 흘끗 둘러보았다.



“여기 아무도 없잖아. 그리고 아무도 안 와. 같이 가자니까?”



소녀가 눈을 맞추고자 했지만, 소년은 소녀의 눈을 피했다. 대신 회의실 가운데에 있던 탁자로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저거 깨트려서 그래? 괜찮아. 알아서 치울 거야. 그리고 대단한 물건들도 아니야. 저런 거 많아.”

“……”

“가자. 아무도 없는데 혼자 여기 있어서 뭐 하게? 밖에 사람들이 많아. 잔치가 열렸어. 얼마나 재밌는데! 극놀이도 하고 묘기도 하고, 신기한 거 하는 중이란 말이야. 너 그런 거 여기서 처음 볼 걸? 아! 미안, 너는 악기 연주를 듣는 걸 좋아하겠다. 그래, 맞아. 연주부터 들으러 가자.”



소녀의 목소리가 행복한 나비처럼 팔랑거렸다.



“다 같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춰. 너도 노래 가르쳐 줄게. 금방 배울 수 있어. 맛있는 음식도 많아. 가자. 구경하고 싶지 않아? 지금까지 계속 배 위에만 있었다며.”



소녀가 까르르 웃었다. 무엇이 웃긴 지 알 수 없던 소년은 소녀를 보기만 했다.



“배 타는 거 어때? 재밌어? 무서워? 나는 배를 타본 적이 없어서 궁금해.”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음… 왜 그러지? 내 말을 못 알아듣나? 아닌데? 이제는 알아들을 거라고 그랬는데?”



소년이 흠칫 놀랐다. 소녀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못 알아듣는 거 아니면서 그런 척했네?”

“…아! 아니야!”

“말도 잘하네? 하하하. 흠…그러면, 눈만 안 좋은 건가?”

“……?”



소녀가 손을 들어 소년의 얼굴 앞에서 살며시 흔들었다. 소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닌 거 같네. 그래, 이 정도면 괜찮아. 나랑 같이 가면 되니까.”



소녀가 다시 소년의 손을 잡았다. 소년이 손을 빼려고 하자 소녀가 얼굴을 찌푸렸다.



“밖에 깜깜해. 그냥 빨리 따라와. 이러다가 잔치 끝나겠어. 너만 안 왔어. 아까 보니까 너랑 같이 배 타고 온 그 어른은 신나게 놀고 있더라. 뒷길로 가면 빨라.”



소녀가 뒤돌아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노란 웃옷 위로 찰랑거렸다. 소년은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긴 끈 장식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다. 높이 꽂은 금색 장신구에서 시작해 허리까지 이어지는 검은색 비단 끈이었다. 소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소녀가 의자 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큰 의자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자, 소년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



재빨리 따라왔지만, 의자 뒤에 있어야 하는 소녀는 그곳에 없었다. 놀란 소년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검은 가림막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알고 보니 가림막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고, 그 사이에 틈이 있었다. 소년이 가림막 사이로 나갔다. 저 멀리 뒷벽 구석에 난 작은 문을 통해 소녀가 나가는 것이 보였다. 소년도 소녀를 따라갔다. 짧은 계단을 내려가 문을 하나 더 열고 나가니 건물 뒤편이었다. 시원한 공기가 얼굴을 훅 감쌌다. 하늘엔 달과 별이 반짝였다. 그 아래, 잎이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커다란 연못이 보였다. 연못 건너편엔 높은기둥 위에 우아한 곡선을 가진 지붕을 올려 만든 건물이 있었다. 기둥마다 밝은 등이 매달려 있어, 지붕 아래 사람들이 가득한 것이 멀리서도 잘 보였다.



“가자.”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소년의 손과 크기가 비슷한 손이었다. 다만, 어떤 상처도 굳은살도 없었다. 망설이던 소년은 자신의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소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소녀의 두 볼이 살짝 올라가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IMG_0118.jpeg 헬로, 앤디




어두운 밤, 소녀와 소년은 연못을 둘러싼 숲길을 잰걸음으로 함께 걸었다. 사방에 풀 냄새와 연못 냄새가 진동했다. 얇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작은 벌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앞서 걷는 소녀의 걸음이 꽤 빨랐다. 소년은 옆구리가 당기고 숨이 찼다. 따라가기 벅찰 정도였다. 하지만 계속 걸었다. 검은 비단 끈이 소년의 눈에 계속 아른거렸다. 순간, 소년은 어머니의 정원을 떠올렸다. 이상했다. 색색의 꽃이 가득하던 어머니의 달콤한 정원과 이곳은 너무도 달랐다. 그런데도 왜 그 생각이 나는 걸까? 소년의 정신이 흐릿해졌다. 먼 옛날, 떠나는 형을 배웅하러 뛰어나갔던 쌀쌀한 새벽, 어머니를 찾아 궁전의 방들을 헤집고 다니던 뜨거운 낮, 아버지와 함께 모루스탈을 걷던 고요한 밤, 그리고 시퍼런 바다 한가운데 요동치는 배 위에서 바닷물에 푹 젖은 채, 기둥을 부여잡고 두려움에 떨었던 날들이 스쳐 갔다. 아픈 비명이 화살처럼 머릿속을 갈랐다. 불에 휩싸인 방앗간에서 나던 그 소리는 오래된 배의 뒤틀린 나무가 맞물리며 나던 소리와 비슷했다. 소년의 마음속에서 분노와 슬픔이 끓어올랐다.



‘아니야. 지난 일이야. 이제 그런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은… 여기에 있잖아.’



앞서 걷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소년은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연못 건너편까지 반 정도 왔을 때, 소녀가 그의 손을 놓고 연못으로 내려갔다. 소녀는 물가에 웅크려 앉았다. 소년이 소녀를 따라갔다. 소녀는 연못에 손을 씻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머리카락에 달린 검은 리본만 보았다. 여전히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소녀에게 다가갔다.



“분명 씻었는데 아직도 묻어 있네.”



소녀가 중얼거렸다.



“네 손도 봐봐.”



소녀가 소년의 손을 잡아당겨 물에 넣었다. 소년이 넘어질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연못은 차가웠다. 소녀가 소년의 손에 물을 뿌렸다. 소년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못에 손을 씻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못이 이상했다. 안에 무언가 있는 것 같았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점점이 빛나는 어떤 것이 생겨났다가 가라앉았다. 소년이 손바닥에 물을 담았다가 천천히 쏟았다. 그리고 또 두 손에 물을 담았다. 분명 무언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까 다쳤어?”

“……”

“상처가 있네?”



소녀가 소년의 손바닥을 펼쳤다. 만져보니 방금 난 것이 아니었다. 상처는 오래되어 살처럼 변해 있었다.



“불쌍해라. 약이 없었어?”

“......?”

“우리는 약이 많아. 산만큼 있어. 내가 갖다 줄게.”

“……”



소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벌떡 일어섰다. 소녀가 따라 일어섰다. 소년이 걸어갔다. 소녀가 뒤를 따랐다.



“내가 내일 색을 가지러 가는 길에, 네 약도…”

“필요 없어!”

“공주님?”



한 여인이 손에 작은 등불을 들고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어디 계셨어요? 찾아다녔잖아요. 아, 마침 같이 계셨네요.”



여인이 소년을 보고 반가워했다. 소녀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데리고 왔지.”

“잘하셨어요.”



등불을 든 여인과 소녀가 나란히 걸었다. 그 뒤를 소년이 따랐다. 흥겨운 음악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뭐 하러 왔어? 내가 찾아서 잘 데리고 갈 텐데.”

“그래도요. 밤이 늦었잖아요.”

“이런 하찮은 일은 내가 할 수 있어. 다들 바쁘니까, 나는 이런 거라도 도와야지.”

“어머나, 공주님. 생각이 깊으셔요.”



소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배고프시죠?”

“나는 괜찮아. 얘가 배고플 거 같아.”

“준비해 뒀어요. 얼른 가요. 첫째, 둘째 공주님도 기다리고 계세요.”

“벌써 왔어? 내일 온다더니.”

“그러게요.”

“이번에도 선물을 많이 가져왔어?”

“네. 많이 가져오셨어요.”

“좋겠다. 나도 거기 가보고 싶다. 배도 타보고 싶고.”

“언젠간 허락해 주시겠죠.”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잔 하나가 깨졌던데요?”

“어?... 어…”

“어쩌다가 잔이…”

“내가 깼어. 내가 실수로.”

“네. 그런 거 같았어요. 괜찮아요. 한두 번인가? 다치신 데는 없죠?”

“없어. 아, 근데 상처에 바르는 약을 다 썼나? 남은 게 있어?”

“방에 있는 서랍장에 항상 있어요.”

“아, 알았어.”

“다치신 데 없다면서요?”

“없어.”



셋은 잔치가 한창인 곳에 도착했다. 떠들썩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잠시만요, 등 좀 갖다 두고 올게요.”

“응.”



여인이 어디론가 가고 소년과 소녀가 남았다. 소년이 소녀 앞으로 걸어왔다.



“왜 네가 깼다고 했어?”

“어?”

“유리잔.”

“아, 그거? 너 혼날까 봐.”

“뭐?”

“나는 안 혼나거든. 나는 공주님이니까. 괜찮아. 늘 있는 일이야. 다른 일꾼들도 뭐 망가트리면 내가 깼다고 말해주면 안 되냐고 부탁하고 그래. 그럼 난 다 들어줘. 너도 걱정하지 마.”



소년이 소녀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고마워할 것 없어. 우리는 친구잖아.”

“… 친구?”

“응. 친구. 와, 그런데 너 말 잘한다? 약이 진짜 효과가 좋은가 봐. 내가 내일 산에 가서 오래된 흉도 없애는 약을 만들어달라고 할게. 네 손의 상처도 금방 나을 거야.”



소녀는 활짝 웃었다.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있던 곳에선 그 누구도 감히 소년과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이곳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소녀는 공주라고 했다. 공주는 하녀나 노예만을 곁에 둘 뿐 친구를 만들지 않는다. 만약, 소녀가 말하는 친구가 놀이 시종을 뜻하는 것이라면, 절대 그렇게 되지는 않겠다고 소년은 다짐했다.



“나는 네 친구가 아니야.”

“왜 아니야?”

“나는 친구를 만들지 않아.”

“그럼 내가 뭐야?

“……”

“내가 뭐냐니까?”

“그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거야. 도대체 넌 뭐야?”

“뭐?”

“넌 뭐냐고!”

“나? 나는 공주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소년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에 달려있던 긴 비단 끈을 잡았다. 검은 끈 위에 매끈한 물감으로 그린 무늬가 이젠 확실히 보였다.



“아! 그거 내 댕기야.”

“… 너!”

“내가 만든 거란 말이야! 얼마나 오래 걸렸는데!”

“너 왜!”

“아! 아! 당기지 마! 아프잖아!”

“왜…!”

“뭐!”



소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한 손에 쥐고 있던 검은 끈은 놓지 않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 이 머리끈에 이것이 적혀 있는가? 소년은 소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잠시 후 그가 머리끈을 놓았다.



“뭐야? 기껏 잘해줬더니!”



화가 난 소녀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기분이 안 좋은 것은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소녀를 쫓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의 댕기에 꽂혀 있었다. 망설이던 그가 소녀를 따라 뛰어갔다.



“... 미안해.”

“왜 따라와!”

“미안해.”

“이제 와서? 됐거든?”



소녀가 소년을 한번 째려보고는 훌쩍 걸어갔다. 소년은 그녀를 쫓았다.



“미안해. 미안.”



소년은 사과하며 또 소녀를 쫓아갔다.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댕기를 머리에 묶고 있는 이 소녀를, 소년은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은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아주 오래전, 이곳이 아닌 아주 먼 곳의 이야기이다.


세상은 붉은 비명과 하얀 고통과 푸른 외로움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용기와 인내를 애써 믿으며 밝은 낮을 견디고, 간절한 기도로 어두운 밤을 버텼다. 하지만 슬픔은 매일 재처럼 수북이 쌓였고, 마음의 상처는 계속 덧났다. 소년도 그랬다. 너무나 아팠다. 잿더미에 온몸이 처박혀 죽을 것 같았다. 그런 그의 앞에 비단 끈이 나타났다. 붙잡을 것 하나 없던 외로운 걸음이었는데, 그것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보였다. 고단한 길 위 그의 이름이 가리킨 곳에서, 소년은 소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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