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2
이른 아침이었다. 어제 일찍 잠에 들었는데도 일어나니 몸이 찌뿌둥했다. 날씨 탓인가, 관절이 쑤셨다. 혜진은 바로 부엌으로 갔다. 건조대에서 컵을 꺼내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 한 잔을 따라 마셨다. 집안은 덥고 습했지만, 불평할 여유가 없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혜진은 잠시 생각했다. 오랜만에 하는 요리였다. 정신을 차려야 순서를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래… 먼저…’
혜진은 물컵을 식탁 위에 내려놓고 냉장고에서 국거리용 한우 고기를 꺼냈다. 핏물을 빼기 위해 고기를 찬물에 담갔다. 그리고 냉장고 옆문을 열고 다용도실로 나갔다. 창밖에 비가 오고 있었다.
‘우산이 있나 모르겠네…’
더운 데다 비도 오니 다용도실 열기가 대단했다. 혜진은 선반에서 큰 솥과 작은 냄비를 꺼냈다. 아직 손수레 안에 있던, 무릎만큼 올라오는 기다란 대파 세 개도 쭉 뽑아냈다. 필요한 것들을 몇 가지 더 챙겨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왔다. 큰 솥에 묻은 먼지를 깨끗이 씻은 후 물을 붓고, 고기와 후추를 넣고 가스불에 올렸다. 작은 냄비에도 물을 부어 채운 후 가스불에 올렸다. 혜진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야채칸에서 고사리와 토란대, 숙주, 무, 버섯을 꺼냈다. 어제 시장에 다녀온 태가 났다. 먼저 무를 재빨리 씻어 자른 후, 아까 고기를 삶던 솥에 넣었다. 나머지 채소도 깨끗이 씻고 다듬었다. 흙가루와 시든 잎을 떼고 나면, 손에 든 푸릇한 채소들은 그 어떤 꽃보다도 싱싱하고 어여뻤다. 대파도 손질했다. 뿌리 부분은 다음에 쓰려 깨끗이 씻어 작은 용기에 넣어두었다. 칼을 쥔 손이 도마 위에서 열심히 움직였다. 냄비에 물이 끓자, 그녀가 고사리와 토란대를 차례로 삶았다.
“앗…!”
손등에 뜨거운 김이 닿아 아팠다. 혜진은 찬물을 틀어 손등을 식혔다. 이 나이가 되었어도 요리하다 깜짝깜짝 놀란다. 혜진은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데친 나물을 조심히 건져 냈다. 혜진이 싱크대 아래를 열었다. 다양한 크기의 솥이 더 있었다. 안 쓴 지 오래된 녀석들이 오랜만에 깨웠다고 놀랐을까? 혜진이 미소 지었다. 그녀는 중간 크기의 솥을 꺼냈다. 솥 안에 데친 고사리와 토란대 그리고 손질한 채소를 모두 담고, 고춧가루, 조선간장, 다진 마늘, 참기름, 소금, 후추를 넣어 양념했다. 매운 향이 코에 닿자, 혀끝에 침이 고였다.
혜진은 이번엔 큰 스테인리스 믹싱볼을 꺼냈다. 냉장고에서 쌀을 채워둔 생수병도 꺼냈다. 쌀과 약간의 잡곡을 믹싱볼에 넣고 물을 부어 씻었다. 언젠가부터 쌀을 씻고 나면 이상하게 손의 피부가 따갑고 아파서, 그녀는 계란찜 할 때 쓰는 철제 거품기로 쌀을 휘저어 씻었다. 아침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알려준 방법이었는데, 혜진에게 정말 유용했다. 다 씻은 쌀을 식탁 옆에 있던 전기밥솥에 넣었다. 물 높이를 확인한 후, 그녀가 밥솥 뚜껑을 닫고 버튼을 몇 번 눌렀다.
<취사를 시작합니다.>
전기밥솥에서 안내 말이 나왔다. 혜진이 화면을 확인했다.
“에고, 에고… 취소…”
혜진은 취소 버튼을 눌렀다. 잡곡인데 백미 취사 버튼을 누른 것이다. 다시 버튼을 신중히 눌렀다.
<딩동댕>
취사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버튼을 제대로 눌렀다. 혜진은 가스불 위에 있던 큰 솥뚜껑을 열어보았다. 고기 육수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녀가 머리 위에 있던 환풍기를 켰다. 서랍에서 철 젓가락을 하나 꺼내 고기를 찔러보았다. 부드럽게 들어가는 것을 보니 잘 익었다. 가스불을 끄고, 혜진은 채를 가져와 고기와 건더기를 건져냈다. 그녀가 도마 위에 고기를 올리고 칼로 천천히 잘랐다. 장갑을 끼고 잘라도 조심해야 했다.
‘덥다…’
혜진의 두 볼이 빨갰다. 식탁 위에 있던 컵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고기를 이만큼 사본 게 정말 오랜만이네…’
이걸 끓여주면 두 사람이 얼마나 열심히 먹었던가? 생각나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이어서 쓴 한숨도 나왔다.
‘미쳤어. 미쳤어…’
이마에 땀이 흘렀다. 혜진이 화장실로 갔다. 찬물에 세수하고 나온 그녀는 양념한 채소가 있던 솥에 뜨거운 육수를 부었다. 후끈한 열기가 혜진의 얼굴에 닿았다.
‘아후, 무거워. 어깨 아파…’
혜진이 솥을 올리고 가스불을 켰다. 이미 뜨거웠던 탓에 빨간 육개장은 금세 끓어올랐다. 집 안에 맵고 진한 국물 냄새가 퍼졌다. 숙주와 파를 넣어 다시 한번 끓이는 동안, 그녀는 썼던 그릇을 싹 닦아 치웠다.
“아이고…”
혜진은 식탁에 있던 컵에 찬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이마에 땀이 또 맺혔다. 옷 속으로는 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가 거실로 나가 선풍기를 가져왔다. 바람이 가스불에 닿지 않게 방향을 잘 잡은 후, 선풍기를 틀었다.
‘좀 살 것 같네.’
당장 화장실에 들어가 시원한 물을 온몸에 뿌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불을 쬐며 여기 있어야 했다. 혜진이 베란다를 보았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굵은 빗물이 베란다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미술 작품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집 안은 덥고, 습하고,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며칠 전 승우가 군대에서 전화했었다. 휴가를 나오면 엄마가 만들어 준 육개장을 제일 먹고 싶단다. 혜진은 솥뚜껑을 열고, 한 솥 가득한 육개장을 국자로 천천히 저었다. 기름이 둥둥 뜬 빨간 국물이 기포를 뻐끔뻐끔 내뿜었다. 눈이 따가웠다. 혜진이 인상을 썼다. 등에 난 땀에 옷이 찰싹 달라붙었다.
‘이 더운 여름날, 이 뜨거운 육개장을 먹고 싶다니!’
이럴까 봐 일부러 아침 일찍부터 끓였다. 어쨌든, 한낮보다는 나을 테니. 혜진이 국물을 떠서 맛봤다. 괜찮은 것 같았다.
<맛있는 밥이 완성되었습니다. 잘 저어주세요.>
밥솥에서 안내 말이 나왔다. 혜진이 가스불을 껐다. 국도, 새 밥도 다 되었다. 그녀가 벽에 달린 시계를 보았다. 이번엔 싱크대 안에서 프라이팬을 꺼냈다. 불에 살살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굵은 갈치 두 도막을 올렸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갈치가 튀기듯 노릇하게 구워졌다. 육개장 냄새보다 막강한 생선 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혜진이 환풍기를 아까보다 더 세게 틀었다.
‘엄마, 나는 생선 중에 갈치가 제일 맛있는 것 같아.’
승우는 어릴 때부터 생선을 좋아했다. 그때 갈치가 그렇게 비쌌는데, 두 도막을 구우면 승우가 다 먹었다. 혜진이야 안 먹어도 그만이지만, 종훈도 살을 발라 승우 숟가락에 올려 주기만 할 뿐, 입에 대지도 않았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혜진이 손으로 눈가를 얼른 닦아 냈다.
‘정말 죽겠네… 하하하…’
아픈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사람 마음을 괴롭히지만, 좋은 기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좋은 것 만 주고 갔는데도 이러니, 내가 살겠냐고… 내가…’
혜진이 뒤집개로 생선을 하나씩 뒤집었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다시 뿌연 연기가 났다. 조금 뒤, 생선이 잘 구워진 것을 확인하고 혜진이 가스불을 껐다. 모처럼 가스불도 일을 제대로 했다. 오랜만에 사람 사는 집 같았다.
‘가스 회사 사람이 놀라겠네…’
혜진이 피식 웃었다. 그녀는 환풍기를 끄고 생선을 기름종이로 살포시 덮었다. 이제 그녀는 냉장고에서 과일을 꺼냈다. 자두와 포도, 참외였다. 자두와 포도는 찬물에 담가두고, 노란 참외 세 알을 집어 도마 위에 올렸다. 참외 껍질을 깎고 사 등분해서, 하나는 씨를 긁어 버리고 두 개는 씨를 그대로 두고 잘라 통에 예쁘게 담았다. 자두와 포도도 물에서 건져 물기를 가볍게 턴 후, 마찬가지로 큰 통에 넣었다. 다 쓴 칼과 도마는 깨끗이 씻어 건조대에 올렸다.
삐삐삐 삐삐삑
현관에서 소리가 났다. 혜진이 부엌에서 나왔다.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
“승우야…”
혜진이 승우를 향해 걸어갔다. 군복을 입은 승우의 모습은 볼 때마다 어색했다.
“승우 왔구나, 우리 승우.”
“엄마…”
혜진이 승우를 안았다. 승우도 엄마를 꼭 안았다.
“승우야, 괜찮아? 힘들었지? 아픈 데는 없고?”
“아픈 데 없어. 괜찮아요. 엄마는?”
“괜찮아. 엄마 아픈 데 하나도 없어.”
혜진이 두 손으로 승우의 얼굴을 곱게 쓰다듬었다.
“맛있는 냄새난다.”
“육개장 했지.”
“어쩐지!”
“배고프지? 밥 차려줄게.”
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엄마, 더운데 또 선풍기만 틀고 있었구나?”
승우가 두리번거리며 에어컨 리모컨을 찾았다.
“그거, 저기 서랍에 있어.”
“왜 서랍에 있어? 설마… 엄마 한 번도 안 썼어요?”
“아직 그렇게 덥지 않아서.”
“지금 장마철인데, 안 더워도 켜야지. 안 그러면 집에 곰팡이 생겨요.”
승우가 에어컨을 켰다. 방에서 선풍기를 하나 더 가져와 에어컨 앞에 놓고 부엌 방향으로 틀었다. 보송하고 시원한 바람이 혜진의 다리에 닿았다.
“이렇게 살면 집도 망가지지만, 엄마도 병나.”
“알았어. 앞으로 틀게. 밥 먹자. 어서 씻고 와.”
“네, 씻고 올게요.”
승우가 제 방으로 갔다. 혜진이 밥솥을 열었다. 구수한 향이 진득하게 밴 뜨거운 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혜진이 주걱으로 밥그릇에 밥을 푸짐히 펐다. 식탁 위에 밥그릇을 갖다 둔 혜진이 이번엔 육개장을 국그릇에 가득 담았다. 혼자 먹던 식탁 위엔 그릇이 두 개 이상 오를 일이 없었는데, 승우 덕에 밥그릇, 국그릇에 물 잔, 수저받침, 그리고 예쁜 그릇에 담긴 맛난 것들까지 넉넉히 올랐다.
‘너희도 간만에 일 좀 하는구나.’
지금은 찬장만 무겁게 채우고 있는 저 묵은 그릇들도, 왕년엔 이렇게 잘 나갔었다. 하루 세 번이 뭔가, 네 번 다섯 번도 뚝딱 차려내던 식탁이었다. 하도 오랜만이라 잔치라도 하는가 싶지만 사실, 이런 건 잔치에 속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살던 집이었다. 혜진이 이렇게 매일 가꾸고 보살피던, 보석 같은 가정이었다.
“우와, 맛있겠다.”
씻고 나온 승우가 음식을 보고 감탄했다.
“얼른 앉아서 먹어. 물을 얼음물을 줄 걸 그랬나?”
혜진이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승우의 물 잔에 넣어 주었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우리 아들.”
승우가 숟가락으로 밥을 한가득 퍼서 입에 넣었다. 혜진은 마음이 흐뭇했다. 아주 중요한 일을 제대로 해 낸 기분이었다.
점심을 거나하게 먹고, 혜진과 승우는 거실에 앉아 과일을 먹고 차를 마셨다. 바깥엔 끊임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에어컨 덕분에 거실은 시원하고 상쾌했다. 승우는 소파에 편히 앉아 티브이 리모컨을 손에 들고 채널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 모습이 혜진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벌써 일 년 다 되어 간다, 그치?”
“엄마, 벌써라니…”
“하하, 미안.”
“저 이제 상병이에요.”
“내년 봄이면 끝이네.”
“응.”
승우가 기지개를 켜고 소파에 누웠다.
“아, 시간 정말 안 간다. 내년 봄이 언제 오지?”
“그러게, 봄이 언제 오지?”
우리 아들이 자유롭게 팔랑팔랑 날아다닐 따뜻한 봄이 언제 오려나 생각하며, 혜진은 다정한 손길로 승우의 발을 쓰다듬었다.
“엄마, 나 제대하면 여행 가려고요.”
“그래.”
“동기들이랑 가기로 했어.”
“어디를 가려고?”
“뉴욕.”
“……”
“군대 동기 한 명이 거기서 왔대. 나랑 두 명 더 해서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 그래.”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과 승우는 티브이를 보며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혜진이 잠시 티브이에 정신이 팔린 사이, 승우가 소파에서 잠들었다. 혜진은 손을 뻗어 리모컨을 집어 들고 티브이 소리를 작게 줄였다. 신기하게도 이럴 때 티브이를 끄면, 그 사람은 잠에서 깨곤 했다. 집 안이 조용해졌다. 냉장고 소리,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어색하게 크게 들렸다. 티브이 때문인지, 이상한 전파 울림 같은 것이 귓가에 윙윙거리는 것 같았다.
‘모든 것들아 다 조용히 해라. 우리 승우 잔다.’
내 아이가 내 집 소파에서 잠들었으니, 시끄러운 것들은 다 그만하거라. 혜진이 승우의 발을 보았다. 이 큼지막한 발바닥이 혜진의 손바닥보다 작던 날이 있었다. 소파를 꽉 채우고 누워있는 이 청년은, 원래는 혜진의 무릎보다 작고 조그만 아이였다. 내내 놀다 낮잠 자는 것이 뭐가 그리 힘들다고, 자면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용을 쓰곤 했다. 폭 잠든 그 뽀얀 얼굴을 손 부채질해 주며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세상에 어디서 이렇게 이쁜 게 우리 집에 왔나 싶었다. 그 꼬맹이가 이렇게 크느라 참 수고가 많았다. 그 꼬맹이를 이만큼 키우느라 써버린 내 세월은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딴 거 했음 뭘 더 대단하게 잘했을라고…’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게 맘 편했다. 잠든 승우가 몸을 움찔했다. 혜진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도 더 작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혜진이 눈을 감았다. 그녀도 잠들었다. 꿈을 꾸었다. 그 사람과 거실에 앉아 있던 꿈이었다. 눈가에 눈물이 조금 맺혔다.
삐삐삐삐
승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혜진과 승우 모두 잠에서 깼다. 메시지를 확인한 승우는 친구들과 저녁 약속이 있다며 나갈 준비를 했다.
“엄마, 올 때 회 사 올까?”
“이 더운데 무슨 회를 사.”
“나 회가 너무 먹고 싶었어.”
“날씨가 너무 별로야.”
“진짜 먹고 싶었는데, 들어가기 전에 꼭 먹어야 하는데…”
“그러면, 사 오지 말고, 엄마가 식당 예약해 둘 테니 내일 나가서 먹자.”
“알았어요.”
“너무 늦지 마.”
“네, 안 늦을 거예요. 늦으면 내일 하루를 낭비하니까 안 늦고 잘 올 거야.”
“그래.”
혜진이 건네는 우산을 받아 들고 승우는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자, 집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어깨가 뻐근했다. 혜진이 거실에 있던 과일 그릇과 찻잔을 챙겨 부엌으로 갔다. 설거지하고 부엌을 정리한 후, 그녀가 냉장고에서 커다란 아이스커피 한 병을 꺼냈다. 컵에 차가운 커피를 따라 붓고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은 후, 그녀는 컵을 들고 거실로 나가 소파에 앉았다. 티브이에선 재미있는 사람들이 하하 호호 웃고 있었다. 그녀가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이리저리 바꿨다.
<아름다운 세계 여행>
눈부신 해변을 품은 동남아의 작은 섬이 나왔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야자수 아래, 사람들이 가벼운 수영복 차림으로 하얀 모래사장 위를 걸었다.
‘저렇게 수영복을 입고 모래 위에 누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혜진은 젊을 적 휴양지에 가면, 근처 시장에서 재미있는 기념품을 사곤 했다. 두꺼운 나무 팔찌, 호두만 한 보석 장식이 박힌 반지, 허리에 두꺼운 금박이 달린 바지도 사 입었다. 금방 망가질 게 뻔한 꽃장식이 달린 나무 손목시계는 현지 시각을 보는 데 쓰기 좋았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올 때는 모두 버리고 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무 팔찌는 혜진이 힘을 잘못 줘서 가운데가 쪼개졌고, 반지는 도중에 잃어버렸으며, 꽃나무 시계는 돌아오는 길 공항에서 멈춰버렸다. 여름 나라에 다녀오는 짐은 신기하게도 갈 때보다 올 때 더 가벼웠다. 혜진이 창밖을 보았다. 아까보다 조금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
지금 휴양지를 혼자 간다면 예전처럼 그렇게 즐거울 수 있을까? 젊을 때도 혼자인 건 마찬가지였는데, 지금은 특별히 용기가 필요할 정도로 망설여졌다. 왜 지금 더 겁쟁이가 된 걸까?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컵 안에 담긴 검은 액체가 출렁이자 가라앉아있던 사소한 기억들이 솟아났다. 손바닥만 한 커피 한잔에도 이런데, 푸른 바다 앞에선 어떨까? 그러니 백지인 젊음이 낫다. 새롭게 배우고 채우고 그릴 일만 있으니, 넘치는 기운만 들고 가면 된다. 하지만, 어디를 가던 할 것보다 해본 게 많을 때는, 그래서 그 쏟아지는 추억에 짓눌려 기쁨보단 그리움에 허우적거릴 때는, 그땐 대체 어디를 가야 진정으로 기쁠 수 있을까? 다 잊고, 다 놓고, 오로지 지금, 눈앞, 이 순간에 기꺼워하고 싶은 그런 마음을, 어떻게 해야 가끔이라도 불러올 수 있을까?
‘옛말로, 머리에 꽃 달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맘이 더 편하겠네…’
혜진은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귀 뒤에 조그만 꽃을 꽂고, 하얀 모래사장을 걷는 상상을 했다. 따뜻한 공기가 몸을 휘감는 기분이 들었다. 그 시간이 특별한 것은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물건이 아니라, 온몸에 스며들기 때문이리라. 정성 들여 세운 계획을 무색하게 하는 순간의 느낌. 하지만 그곳을 떠나는 순간 사라지는 마법. 마치, 이곳 외의 다른 곳의 시간은 담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조잡한 나무 손목시계처럼.
혜진은 휴대폰으로 커피와 함께 베란다 밖으로 내리는 비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드로잉스타 앱에 사진을 올렸다. 오늘은 기억하고 싶은 날이었다. 승우가 휴가 나온 날이고, 집에 생기가 돌았던 날이고, 혜진이 엄마 노릇을 뿌듯하게 해 낸 날이었다. 그녀가 소파에 편히 앉았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했다. 그녀는 에어컨을 끌지 잠시 고민하다 말았다. 승우가 왔을 때, 집이 시원해야 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또 잠이 솔솔 왔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달콤한 낮잠이었다. 그녀의 휴대폰에서 짧은 알림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