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2
장마가 끝나고 숨이 턱 막히게 뜨거운 여름이 찾아왔다. 화살처럼 온 천지에 내리꽂는 햇볕에 피부가 닿기만 해도 따가웠다. 한낮에는 필사적으로 그늘과 양산과 커다란 모자 아래 꼭꼭 숨어 있어야 했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한두 명씩 거리로 나왔다. 여전히 후끈한 열기에 머리 꼭대기가 뜨거워지면, 시원한 물 한 모금이 필요했다. 더운 바람이 불어도 손에 들고 있던 보랭병 속 얼음은 쌩쌩했다. 옅은 노을이 잔뜩 달궈진 해를 슬슬 달래 데려갈 즈음엔, 서울 거리는 젊고 명랑하고 즐거운 바로, 그 여름이었다.
‘풍경 좋다…’
혜진은 한강 다리 위에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넓은 강이 아름다웠다. 다리 위였지만 그늘도 있어 매우 시원했다. 이 다리 위에는 더 높은 다리가 또 있었다. 다리를 2층으로 지은 것이었다. 위층 다리가 아래층 다리의 지붕 역할을 해주었다. 강물을 타고 달려와 높은 콘크리트 기둥을 훑으며 차가워진 바람이 강력하고 상쾌했다. 아래층 다리를 걷는 사람들의 가벼운 옷자락이 부드럽게 날렸다.
혜진은 동그랗고 푹신한 빈백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 빈백이 여러 개 더 있었다. 초록색 인공 잔디 위에 드문드문 놓인 자갈색 빈백들은, 사람들이 산책하다 쉬어갈 수 있게 만든 공간이었다. 이곳에 앉아 있으니 산 깊은 계곡에 놀러 가 동그란 바위 위에 앉아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혜진은 마음이 편안했다. 눈을 뜨면 반짝이는 강이 반겼고, 눈을 감으면 사람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유를 즐기던 혜진이 휴대폰을 켰다. 그녀는 이어폰을 끼고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요즘 보는 것은 미국 티브이 쇼였다.
‘Pardon? 도 한두 번이지 얼마나 짜증 나겠어…’
혜진과 앤디는 여름 내내 거의 매일 연락을 주고받았다. 특히 지난주부터는 화상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주변이 궁금하다고 해서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하루에 2, 3분 동안 주변을 보여주던 것이, 지금은 혜진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공유하게 되었다. 한 번은 앤디가 혜진이 보는 티브이가 궁금하다고 해서, 통화하던 휴대폰을 소파에 올려놓고 같이 티브이를 잠깐 보기도 했다. 떠올려보니 정말 웃긴 장면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로봇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가끔 혜진은 앤디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자기 뜻도 잘 전달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한국어를 쓰는 혜진에게 갑자기 앤디와 통화할 때만 영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통화음이 끊길 때도 있었다. 그래서 인가, 자신도 그렇지만 앤디도 요즘 말수가 줄어든 것 같았다. 그러니 혜진이 이렇게 매일 영어 공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니!”
지애가 왔다.
“왔어? 여기 앉아.”
마침 비어 있던 옆 빈백에 지애가 앉았다.
“언니, 잘 지냈어?”
“잘 지냈지. 너는?”
“나는 항상 너무 잘 지내지. 이야, 여기 좋다. 예쁘다. 한강이 이렇게 예뻐.”
“그렇지.”
“딴 데 뭐 하러 가? 서울이 최고네.”
혜진이 웃었다. 지애는 이틀 전에 괌에서 왔다.
“괌은 재미있었어?”
“재미 하나도 없었어.”
“왜?”
지애가 혜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몰라서 물어?”
혜진이 웃음을 참았다.
“아,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는데, 좋았겠지.”
“왜 시댁이 괌이냐고. 다른 데 가지도 못하게…”
지애의 시누이는 오래전 괌으로 이민을 갔는데,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되신 시어머님도 시누이를 따라 괌으로 갔다. 그래서 명절이 되면 지애는 제사를 지내러 괌으로 갔다.
“재미는 원래부터 없었지만, 그땐 윤아가 있으니까 의미라도 있었지, 이젠 의미도 없어. 그리고 거기 집은 쓸데없이 얼마나 큰 걸 샀는지, 꼭 다 같이 그 집에서 먹고 자고 다 해야 하고, 호텔에 절대 못 있게 해. 아오, 힘들어. 집에서도 안 하는 살림을 거기서 다해요. 게다가 어디 나가면 난 말이 안 통하니 짜증 나고…”
혜진은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 집 분위기는 혜진도 대충 알았다. 그 시누이나 지애나 둘 다 기본적으로 통이 컸다. 시누이가 큰 집을 산 덕분에 윤아가 어릴 땐 괌에서 한 달씩 편하게 놀고 오곤 했다. 지애의 시어머니는 사실, 쉬운 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에 있을 때부터 시누이가 제 엄마를 잘 다루는 편이었다. 결국엔 그 시어머니를 시누이가 물 건너 멀리 모시고 가 주기까지 했다.
‘차를 해드려야겠다.’
시어머니가 괌으로 간 뒤, 지애가 조 박사에게 말하자 조 박사는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다며 고맙다고 했다. 큰 집이 이미 있으니 더 보탤 게 없어, 좋은 차 하나 해드리면 모양새도 나고, 나중에 제가 가서 쓸 수도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지애는 투덜거리긴 해도 돈은 크게 썼다. 시어머니는 지애를 이뻐했고, 조 박사도 그녀에게 충성했다.
“아, 여기 편하다.”
지애가 빈백에 편히 누웠다. 다리 위를 걷는 사람들의 명랑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푸드 트럭에서 나는 음식 냄새에 군침이 돌았다. 하늘이 점점 짙은 색으로 변하고 다리에 예쁜 불이 켜졌다.
“여기.”
“고마워.”
혜진이 음료를 사 왔다. 지애가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오, 맛있네. 그런데 너무 달아.”
“그렇지? 근데, 이런 날엔 이게 어울리는 거 같아서.”
“맛있어.”
시원한 피나콜라다였다. 술은 들어가지 않았고, 앞에 모래사장도 없었지만, 휴양지 기분이 났다.
“언니, 송 교수 부인 소식 들었어?”
“아니.”
“대전 내려갔대. 딸이 미국에서 들어왔잖아.”
“결혼하고 공부한다고 나간 거 아니었나?”
“맞아. 근데 거기서 학교 다니고 애 낳고 하면서 너무 힘들었는지, 몸이 안 좋아졌대.”
“뭐 얼마나 안 좋아졌길래?”
“갑상샘에 뭐가 생겼나 봐.”
“아이고, 세상에.”
“그 애가 여기선 평생 엄마, 아빠 그늘에서 살다가, 또 나가서는 엄마, 아빠 돈 쓰며 살다가, 결혼하고 보니 제가 혼자 살림에, 육아에, 공부까지 다 하려니 얼마나 벅찼겠어? 그렇게 매일 전화해서 엄마 좀 미국에 오라고 울었대. 그런데, 송 교수 부인이 딱 한 번 가고 안 갔대.”
“왜?
“그 사위가 술 문제가 있더래.”
“아이고…”
“있는 집 자식이면 뭐 해? 걔도 어릴 때부터 해외 생활을 해서 그 부모도 잘 몰랐는지, 하여튼 그거 보고 다시는 안 갔는데, 그러고 그 딸이 병이 나서, 송 교수 부인이 그냥 한국에 들어오라고 했대.”
“헤어지라고?”
“절대 헤어지라고 안 하지. 애가 있는데. 남자 집 재산이 얼만데. 그래서 서울로 안 오고 대전으로 가잖아. 대전에 시댁이 있어서.”
“에고, 그랬구나…”
혜진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그녀가 피나콜라다를 한 모금 마셨다. 기가 빨리는 이야기를 들으면 에너지가 필요했다. 지애도 피나콜라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니 다음에 마티네 모임에 같이 가자는 말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승우는 잘 들어갔어?”
“응.”
“휴가 잘 보냈어?”
“잘 보내긴… 애가 배탈이 나서 며칠을 내내 누워만 있다가 갔어.”
“아니, 왜 배탈이 났어?”
“회를 먹고 싶다고 하더니, 친구들 만나서 어디서 먹고 와서는, 그다음 날부터 탈이 나서 난리가 났었어.”
“회? 이 여름에?”
“그때는 더군다나 장마였어. 그런데 어딜 가서 먹고 온 건지…”
“하하하, 약사님이 왜 그러셨대?”
“약사님은 무슨. 헐랭이 방탱이 같아가지고…어휴…”
“병원 갔다 왔어?”
“수액 맞았지. 못살아, 정말.”
혜진이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이거, 승우가 방 여사님 드리래.”
“이게 뭐야?”
“군대에서 파는 크림이래. 유명한 거래. 나도 처음 봐. 군대에서 월급 주는 걸로 사 왔어.”
“아이고, 우리 대신 나라 지키느라 생고생하는데, 뭘 이런 걸 사 오고 그래… 돈 있으면 맛있는 거 사 먹고, 술이나 한잔하고 놀러 다니고 그래야지.”
“걔 술 안 마셔.”
“진짜? 아이, 그래도 조금은 마시겠지, 젊은 애가. 남잔대.”
“애 아빠가 위가 안 좋았잖아. 그래서 안 마셔.”
“……”
지애가 화장품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래서 포기가 안 돼요.”
“뭐라고?”
“아니야. 아무것도.”
지애가 화장품을 가방에 넣고 빈백에 편히 누웠다.
“아, 여기 편하다. 시원~하고. 분위기도 너무 좋다.”
“뭐 먹을래? 닭꼬치 사줄까?”
“아니야. 나 다이어트해.
“그래?”
“살 빼야 해. 괌에서 너무 쪘어.”
“살찌긴. 이쁘기만 하구먼.”
“저 봐…”
그들 옆에 딱 붙는 운동복을 입은 젊은 여자 둘이 조깅을 하며 지나갔다. 지애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봐, 젊은 애들 옷 입은 거 봐. 날씬해가지고.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저렇게 엉덩이랑 배랑 다 내놓고, 어후…”
“지애도 이쁘고 날씬해. 너도 저렇게 다녀.”
“나? 언니, 내가 젊을 땐 저보다 더했지. 내가 아주 대단하게 하고 다녔다고. 저건 얌전한 거야. 해외 나가봐. 우리나라 애들 얼마나 조신해? 그냥 착하기만 해 가지고. 엄마, 아빠한테 징징댈 줄이나 알지, 기본적으로 전투력이 없어. 가만히 보면 그저 물러터진 주제에, 싹수없는 걸 독립적인 건 줄 착각한다니까. 정말 걱정이야. 우리 옛날에 봐봐. 적자생존이었다. 으이구, 내가 조윤아를 생각하면, 내가 천년만년 살 수도 없는데, 저걸 어떡하나 싶어. 아후, 여기 술이 들었나? 갑자기 열이 확 올라서 아무 말이나 막 나오네.”
혜진은 그저 웃었다.
쏴아아아아
이층 다리에서 물이 커다란 아치 모양으로 쏟아져 나왔다. 유명한 무지개 분수였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색색의 빛을 입은 물들이 한강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휴, 예쁘다.”
“속이 시원하다.”
혜진과 지애가 분수 사진을 찍었다.
“언니, 나랑 찍자.”
지애가 혜진과 함께 무지개 분수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었다.
“예쁘다…”
힘차게 떨어지는 물줄기는 분수와는 달랐지만, 좋았다. 뜨거운 여름만큼이나 강렬한 모습이었다. 강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우렁찼다. 지난 며칠 중,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기분이었다. 매일 지치고 힘든 여름이었다. 더위를 먹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것은, 강을 얼리는 추위를 버티는 것보다 곱절로 힘들었다. 겨울엔 더 많이 껴입을 수나 있지, 여름엔 벗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덥고, 습하고, 진이 빠지는 피곤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이 여름이 빨리 가기를 바라진 않았다.
여름이 일 년의 전부 같았다. 봄엔 여름을 준비하고, 가을엔 여름을 추억하고, 겨울엔 다시 올 여름을 꿈꾸며 견뎠다. 데일만큼 뜨거운 그날들이 잔치이고 전쟁이고 모험이었다. 그 여름에 흘린 땀과 덴 흉터 덕에, 오늘 이 작은 축제가 즐거웠다. 후끈한 공기처럼 뜨거웠던 날들이 있어, 행복하고 슬프고 재미있었다.
“이제 가자, 언니.”
“그래.”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려다줄게. 차 가지고 왔어.”
“가까운데 걸어오지 않고?”
“난 절대 안 걷지. 이 더운데.”
“……”
“다 들려. 살 뺀다면서 안 걷는다고 뭐라 했지, 지금?”
“아니야…”
“난 나중에 휠체어도 전동으로만 탈 거야. 내가 걷나 봐라.”
혜진이 웃었다. 둘은 주차장으로 갔다. 지애가 운전석에 앉고 혜진이 조수석에 앉았다.
“언니, 추석에 뭐 할 거야?”
“나 추석에 일할 거 같아.”
“무슨 일?”
“예전에 일하던 곳에서 사람이 필요하대서.”
“그래? 그럼 바쁘겠네.”
“너는?”
“나는 이번엔 갔다 와서, 추석엔 안 가도 되거든. 애 아빠가 필드 나가재.”
“재밌겠네.”
“재밌… 나? 맨날 하다 보니, 재밌는 지도 모르겠네…”
자동차가 무거운 배기음을 내며 출발했다.
“아, 좋다. 야경도 이쁘고, 표지판은 다 한글이고, 네비도 한국말도 나오고. 나 여기 와서 방언 터졌어. 가서 말을 마음대로 못 해서 답답했었나 봐. 어제오늘,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다 아파. 한국이 최고다, 증말.”
혜진이 웃었다.
“윤아는 캐나다에서 잘 있어?”
“윤아? 아, 걔는 사춘기가 이제 온 건지 애가 희한해.”
“윤아가?”
“아니, 오늘만 해도…”
지애가 윤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급 자동차가 올림픽대로를 달렸다. 깜깜한 밤, 수많은 차가 가로등이 빛나는 매끈한 도로 위를 시원히 달렸다. 세련되고 풍요롭고 활기찬 서울의 여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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