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2
혜진은 자신의 집, 작은방에 있었다. 커튼을 닫은 창문 앞 책상에 앉아,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각사각 삭삭
종이 위로 색연필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뭉툭해졌네.’
혜진이 작은 연필깎이로 색연필 끝을 더 날카롭게 깎았다. 색연필을 세워 잡고 그녀는 가볍게 손목을 움직였다. 이제야 섬세한 선이 나왔다. 혜진은 요즘 문화센터에서 색연필 그림 수업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있는 것은 분홍 꽃잎을 가진 장미 한 송이였다.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종이에 색을 칠하는 것이 아니라, 색연필이 종이 위를 살짝 지나가게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빈 공간을 채우듯 일정한 힘으로 그은 얇은 선들이 수십 번 지나가야, 그 투명함이 표현되었다. 혜진이 들고 있던 색연필을 놓고 다른 색을 집었다.
“이것도 깎아야겠다.”
그녀가 연필깎이를 집으려 팔을 뻗었다. 몸이 기우뚱하며 의자가 바닥에 끌렸다.
뿌드드득
“엇?”
혜진이 놀랐다. 그녀가 연필깎이를 제 앞으로 가져와 색연필을 깎으며 오른편을 살짝 보았다.
‘들었나?’
책상 오른편엔 혜진의 아이패드가 있었다. 화면에는 대본을 읽는 앤디가 보였다.
‘못 들었나 보다.’
혜진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혜진과 앤디는 화상 통화 앱으로 서로의 모습을 비춘 채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지금 한국은 저녁이었다. 혜진은 일과를 마치고 그녀의 집 작은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영국은 낮이었다. 앤디는 런던 저택, 그의 방에서 차를 마시며 대본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그와 연락을 이어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모든 것은 그날 밤, 경주에서부터였다.
[“앤디 코넬 씨, 조심히 가세요.”]
가이드를 마친 혜진이 동궁과 월지 주차장에서 앤디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런데 앤디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왜, 왜 저래? 불만이 있나?’
이래서는 다시 일을 해서 돈을 벌어 놀러 가겠다는 그녀의 원대한 계획은 시작할 수가 없었다.
[“앤디, 괜찮으세요?”]
[“솔직히… 좀 상처네요.”]
[“네?”]
혜진은 당황했다.
[“혜진이 물론 좋은 가이드지만, 저는 우리가…”]
‘아… 왜 지금……’
그녀의 등에 땀이 흘렀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앤디! 잠깐만요!”]
[“네?”]
[“잠깐, 기다려요!”]
혜진은 앤디를 두고 어딘가로 쌩 달려갔다.
[“가지 말고, 기다려요!”]
다시 한번 소리치며 멀어지는 혜진을 바라보던 앤디는 그녀가 들어가는 건물에 달린 사인을 보고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날, 주차장 가로등 아래에서 앤디와 혜진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혜진은 앤디에게,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매정하게 군 것에 사과했고, 앤디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혜진을 곤란하게 만든 것에 사과했다.
‘내가 또 그랬던 거지…’
가뜩이나 슬픈 일로 힘들다고 했던 앤디에게 배려가 부족했다. 그 옛날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던 한 외국인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그 사람의 걱정의 바탕은 애정과 관심이었는데, 혜진은 예나 지금이나 참 사무적이었다. 체면을 무릅쓰고 앤디에게 최선을 다해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는 것이, 늦었지만, 기억 속 그 관광객에게 전하고 싶은 사과의 대신이라고 생각해도 될까? 그날 이후로 혜진과 앤디는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주로 드로잉스타 앱으로 짧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혜진이 늦게 귀가하던 어느 날이었다. 앤디가 주변 풍경이 궁금하다고 했다. 휴대폰 버튼 몇 개를 누르자, 화면에 앤디의 얼굴과 혜진의 얼굴이 동시에 떴다.
[“지금 서울은 저녁이에요.”]
<[“그러네요.”]>
혜진은 자리에서 휴대폰을 들고 주변을 천천히 보여주었다. 거리엔 사람도 자동차도 많았다. 회색 빌딩 사이, 도로 끝에 펼쳐진 초록색 산자락에 붉은 노을이 보였다. 앤디의 표정이 밝아졌다.
<[“멋져요.”]>
지구 반대편의 아름다운 풍경과, 시간과 공간을 넘어 그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작은 기계와, 그곳에서 자신과 대화하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까지, 모든 것이 멋졌다.
통화가 끝났다. 앤디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음악 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런던의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낮에 회의 겸 작은 모임이 열리는 중이었다. 세련된 차림의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선글라스를 쓴 한 남자가 앤디에게 왔다.
[“앤디, 뭐해요?”]
[“친구랑 통화 중이었어요.”]
[“그래요? 친구요? 이 근처예요? 그러면 오라고 해요.”]
[“아니에요. 자요.”]
[“잔다고요? 이 시간에?”]
[“네. 게으른 친구거든요.”]
앤디가 어깨를 올렸다가 내렸다. 앤디와 그 남자는 함께 이야기하며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앤디는 마법사가 된 기분이었다. 앤디의 주머니 속 휴대폰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의 시간을 담는 마법을 부렸다. 그 속엔 앤디의 비밀 친구도 함께였다.
런던 저택, 자신의 방에서 대본을 보던 앤디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가 옆에 켜둔 아이패드의 화면을 보았다. 화면 속 혜진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혜진의 표정은 심각했다. 큰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인 양 그녀는 종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렇게 그림을 그릴 때, 그녀는 꽤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가끔은 기계 속에 그가 있다는 것도 잊는 것 같았다.
["......"]
앤디는 혜진에게 말을 거는 대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앤디는 혜진과 화상통화를 하며 그녀의 일상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엔 주로 얼굴을 보고 대화를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화면만 켜둘 뿐, 그들은 각자의 일을 했다. 혜진은 어떤 일이든 한번 시작하면 집중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재밌게도, 간간히 혼잣말을 했다. 아마 한국말인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 앤디는 조용히 귀 기울였다.
앤디가 발견한 혜진의 습관은 더 있었다. 부엌에서 요리할 때, 혜진은 틈틈이 물을 마셨다. 채소를 꺼내 씻고 정리하고 나서 물 한 모금, 도마를 꺼내놓고 칼질을 한 뒤에도 물 한 모금, 그리고 큰 팟에 재료를 넣고 물을 부은 후 스토브를 켜고 나면 또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화면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물을 자주 마시니 당연히 그래야겠지…’]
앤디가 찻잔을 바라보았다. 앤디는 혜진 덕분에 자신이 하루에 물을 얼마나 마시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또 혜진은 집안에 있어도 계속 움직이는 편이었다. 그리 넓지도 않아 보이건만, 혜진은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집을 살폈다. 거실에서 티브이를 볼 때도 가만히 쉬지를 않았다. 빨래를 가져와 개던지, 포장 테이프를 동그랗게 잘라 이곳저곳에 붙은 먼지를 떼어냈다. 아니면 어디에 서서 계속 스텝을 밟았다.
[‘그게 뭐예요?’]
<[‘이거요? 대나무를 반으로 자른 거예요.’]>
[‘그걸로 뭐 하는 거예요?’]
<[‘이렇게 밟으면 발이 시원하고 혈액순환이 잘 돼요.’]>
[‘오호…’]
앤디는 저런 걸 사려면 차이나타운에 가면 될지 생각했었다.
['아직도 있었군...']
앤디가 손을 뻗어 패드 가장자리에 붙은 흙을 닦아냈다. 검은 흙가루가 손가락 끝에 묻어 나왔다. 중정에서 묻은 흙이었다.
며칠 전, 앤디는 저택의 중정에서 혜진과 화상통화를 했다. 왠지 정원일이 하고 싶었다. 그가 도구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삽과 장갑뿐 아니라 자잘한 장난감들도 들어 있었다. 아마 애쉬튼이나 브랜든이 넣어 두었을 것이다.
[“아하?”]
잡동사니 속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기념품이 있었다. 앤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혜진, 이것 좀 보…!”]>
투툭, 콰광 쾅!
앤디가 자갈을 밟고 미끄러졌다. 소리를 듣고 침실에서 혜진이 뛰어왔다.
[“앤디? 앤디?”]
정면을 비추던 화면이 까만 흙바닥을 향해 있었다. 앤디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나, 앤디? 괜찮아요? 앤디!”]
<["으..."]>
신음 소리가 들렸다. 혜진이 근심 어린 눈으로 패드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앤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넘어진 탁자를 세우고 위에 아이패드를 다시 올렸다. 앤디는 카메라에 묻은 흙먼지를 닦아냈다. 본인이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것을 확인한 앤디는 멋쩍게 웃으며 바지에 묻은 흙도 털어냈다.
[“괜찮은 거예요? 다쳤어요?”]
<[“하하하,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걸 보여주려고요.”]>
앤디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모형을 흔들어 보였다. 미간을 찌푸린 혜진의 저게 뭐야?라는 눈빛이 앤디의 패드 화면에 가득 떴다.
[“이거 기억나요?”]
<[“그게 뭐예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기념품이에요. 제가 예전에 말했던.”]
<[“네?”]>
신이 난 앤디가 조그만 기념품을 흔들자, 혜진이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이거라고요.”]
<[“아, 네.”]>
[“상자에서 찾았어요. 여기 있는 줄 몰랐어요.”]
<[“축하해요.”]>
[“하하하하.”]
앤디가 웃었다.
[“혜진… 당신은 관심이 없군요.”]
<[“관심… 있어요. 있는데…”]>
[“생각해 보니, 당신은 좀… 차가운 면이 있어요.”]
<[“앤디, 관심 있어요. 그냥 지금 너무 황당해서 그래요.”]>
[“그래요? 그럼, 말해 봐요.”]
<[“무슨 말이요?”]>
[“관심이 있다면서요. 관심이 있으면 궁금한 것도 있겠죠. 궁금한 거 질문해 봐요.”]
<[“… 영국 긴급 전화는 번호가 뭐예요?”]>
[“네?”]
<[“영국에도 아프거나 사고 났을 때 전화하는 번호가 있지요? 그 번호가 뭐예요? 119? 911?”]>
[“999.”]
<[“999? 오케이. 기억해 둘게요.”]>
[“그게 궁금해요?”]
<[“네, 지금 제일 알고 싶은 거였어요.”]>
혜진이 고개를 저으며 이마를 짚는 것을 보고 앤디는 웃었다.
짧은 회상에서 깨어난 앤디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보았다. 슬슬 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앤디는 패드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해야 혜진이 먼저 이쪽을 보게 할 수 있을까, 색연필을 들어 하나씩 번호를 확인하는 혜진을 보며 앤디는 생각했다.
혜진의 목이 뻣뻣했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분홍 장미는 살아있는 듯 생기롭게 종이 위에 피어났다. 초록 줄기와 가시까지 칠하기엔 피곤했다. 근육을 풀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혜진, ‘트라하마 블루’에 가본 적 있어요?”]>
기다렸다는 듯 앤디가 물었다. 트라하마 블루는 한 유명한 세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는 전 세계 주요 도시에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네. 싱가포르에 갔을 때 갔었어요.”]
<[“그래요? 어땠어요?”]>
[“좋았어요. 맛있었어요.”]
<[“뭘 먹었어요?”]>
[“피자요.”]
<[“피자?”]>
앤디의 말투는 왜 그런 걸 먹었냐는 뜻이었다. 혜진이 그를 보고 웃었다.
[“너무 복잡한 음식은 이제 잘 못 먹어요. 위가 안 좋아요. 가장 익숙한 걸 주문했어요. 그리고 정말 맛있었어요.”]
<[“한국에도 ‘트라하마 블루’가 있나요?”]>
[“네.”]
<[“가봤어요?”]>
[“아니요.”]
<[“왜요?”]>
[“음… 저는 한국에선 한국 음식을 먹어요.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음식을 먹지만요. 그 나라 음식이 그곳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해요.”]
<[“음…그러면 영국 음식은 어떤가요? 좋아하나요?”]>
[“그럼요. 저는 음식 불평은 하지 않아요. 제 위가 허락하는 한.”]
<[“좋은 태도군요. 그럼, 저도 오늘 피자를 주문해 봐야겠네요.”]>
[“조금 있다가 가신다는 레스토랑이 ‘트라하마 블루’ 에요?”]
<[“네.”]>
[“멋지군요.”]
앤디가 기지개를 켰다.
<“아이고…”>
혜진이 화면 속 앤디를 바라보았다.
[“지금 ‘아이고’라고 했어요?”]
<[“네. 아이고.”]>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어요?”]
<[“혜진한테서 배웠어요. 아이고, 아이고…”]>
[“하하하하.”]
<[“가끔 혼잣말로 한국말을 하길래, 무슨 소릴 하나 열심히 들었죠.”]>
[“그래요? 제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주로, 아이고, 아이고. 그리고 -다. -다.”]>
[“다?”]
<[“몰라요. ‘다’라고 끝나는 말을 주로 해요.”]>
[“아…하하하하”]
뿌드득
또 혜진의 의자에서 소리가 났다.
[“이거, 의자예요.”]
<[“네?”]>
[“저 아니에요.”]
<[“뭐가요?”]>
[“아니에요.”]
혜진이 입을 다물었다. 앤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전 가야겠어요. 혜진은 잘 거죠?”]>
[“네. 저는 이제 잘 시간이에요.”]
<[“네, 굳나잇. 자러 가세요, 미세스 체어.(Go to bed, Mrs. Chair).”]>
[“……”]
<[“내일 이 시간에 만나요.”]>
앤디가 화면을 껐다. 혜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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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음, 방송음 등의 기계에서 나오는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