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2
학교 수업이 끝났다. 하교하는 학생들로 복도가 붐볐다. 한 소녀가 게시판 앞에 서있었다. 가방엔 22SEOUL이라 적힌 달린 검은색 열쇠고리가 달려 있었다.
[“헤이, 소피.”]
[“하이, 레이.”]
[“뭐 보고 있었어?”]
[“아, 아니야. 아무것도.”]
소피가 당황했다. 레이의 표정이 묘해졌다. 소피는 키가 좀 큰 것 같았다. 분위기도 살짝 바뀐 것 같았다.
[“레이, 집에 가는 거야?”]
[“아니. 오케스트라 연습이 있어.”]
[“아~”]
소피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피, 겨울방학에 스키 타러 갈래?”]
[“스키? 어, 그럴까? 엄마한테 한번 물어볼게.”]
[“알았어. 내일 봐.”]
[“응, 안녕.”]
소피가 손을 흔들며 갔다. 레이는 그녀가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게시판에 달려있던 종이를 확인했다.
<[연극부 단원 모집]>
[“오호?”]
레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앤디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조쉬 앞에 있던 탁자에 올려놓았다. 병원 침대에 앉은 조쉬가 서류를 읽어 보았다.
[“이번 일정이야.”]
[“흠…”]
[“왜? 문제가 있나?”]
[“앤디, 요즘 누가 이렇게 서류를 인쇄해서 가져다주나요? 휴대폰으로 보내시면 되잖아요.”]
[“그래. 다음엔 그렇게 하지.”]
앤디는 조쉬를 보러 병원에 왔다. 조쉬는 피곤해 보였다. 살도 많이 빠졌다. 하지만 치료는 잘되고 있다고 들었다.
[“컨디션은 어때?”]
[“별로예요.”]
[“이런…”]
[“어지럽고 속이 매슥거려요.”]
[“닥터 아시프에게 이야기해 봤어?”]
[“좋아요.”]
[“응?”]
[“좋아요. 너무 좋아요.”]
병실 입구에 두 사람이 있었다. 휠체어를 탄 조그만 노인은 조쉬의 할머니였고, 그 휠체어를 미는 사람은 조쉬의 엄마였다. 둘 다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아가…”]
[“할머니! 산책을 어떻게 이렇게 빨리 다녀오셨어요?”]
조쉬의 할머니가 약한 다리로 휠체어에서 일어나려 애를 썼다.
[“엄마, 일어나지 마세요. 오랜만이에요, 콜린 씨.”]
["안녕하세요. 조심하세요."]
앤디가 조쉬의 엄마와 할머니에게 인사했다. 앤디가 가방에서 긴 상자를 꺼냈다.
["선물입니다."]
조쉬의 엄마가 상자를 받아 열었다. 안에는 반으로 자른, 팔뚝만 한 굵기의 대나무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죠?”]
["혈액순환을 돕는 거예요.”]
앤디가 대나무를 바닥에 놓았다. 앤디는 조쉬 엄마의 손을 잡고, 그녀가 맨발로 대나무를 밟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엇! 어! 세상에! 어머! 어머!"]
요상하게 아프지만 분명 시원한 기분이었다. 조쉬의 엄마가 웃었다. 보고 있던 조쉬도 웃었다.
["그런 건 어디서 났어요?"]
[“그게…”]
앤디의 휴대폰이 울렸다.
[“잠깐 통화 좀 하고 오겠네.”]
두 여인에게 인사하고 앤디가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앤디가 돌아왔을 때, 병실엔 조쉬 뿐이었다. 조쉬의 머리가 유달리 단정했다.
[“누군데 통화를 이렇게 오래 하세요? 평소엔 아무 전화도 안 받으시면서.”]
[“아리얀이 전화했어.”]
[“아, 네…”]
그분의 전화라면 받아야지 하고 조쉬도 생각했다.
[“무슨 일이에요?”]
[“영화제가 끝나면 인도에 있는 자신에 집으로 오라고 하네. 초대하겠대.”]
[“그래요? 재밌겠네요.”]
[“헬렌은 이미 가 있고, 조 용 감독과 김 영 대표님도 영화제가 끝나면 가기로 했다는군.”]
[“가실 거죠?”]
[“생각해 보고.”]
[“…?”]
[“… 모린과 소피가 무엇을 원할지 모르니까.”]
[“아, 그렇군요.”]
조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앤디는 주먹을 살짝 말아 쥐고 입을 막으며 헛기침을 했다.
싱가포르는 적도에 가까워 일 년 내내 덥고 습했다. 그래도 이렇게 9월쯤엔 산책하기에 좋았다. 앤디와 소피는 근처 공원을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
소피가 작은 목소리로 앤디를 불렀다. 앤디가 소피를 보았다.
[“비밀이에요”]
[“응?”]
[“제가 아까 한 이야기요. 비밀이에요.”]
[“그럼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렴.”]
앤디는 엄지와 검지로 자신의 입이 봉인되었다는 손짓을 했다. 소피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소피 왔니? 할아버지 오셨어요?”]
모린이 메이를 안고 나와 앤디와 소피를 반겼다.
[“산책은 즐거우셨나요?”]
[“응. 공원이 참 좋더구나. 같이 갈 걸 그랬나?”]
[“아니요. 메이 때문에 못 가요. 모기도 있고요.”]
[“그럼 안 되겠구나. 메이, 잘 놀고 있었니?”]
메이가 할아버지를 향해 함박웃음을 지었다.
[“데이빗은?”]
[“오는 중이에요.”]
[“좋구나.”]
[“저는 씻으러 갈게요.”]
[“그래, 씻고 식당으로 오렴.”]
[“네.”]
소피는 제 방으로 갔다. 모린은 주방으로, 앤디도 자신의 방으로 갔다. 저녁 식사 시간, 식당에 데이빗과 모린, 소피, 앤디가 모였다. 메이는 재클린과 함께 아기방에서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탁 위엔 화려한 음식들이 있었다. 거의 모든 음식에 해산물과 채소가 가득했다. 기름진 붉은색이 앤디에겐 조금 낯설었다.
[“이건 칠리크랩인데 좀 매워요. 새우는 덜 매울 거예요. 레몬 물 말고 다른 음료를 갖다 드릴까요?”]
데이빗이 앤디에게 물었다.
[“괜찮아. 다 맛있어 보이는구나.”]
[“새 가정부 분이 오시고 저희 식사가 좀 바뀌었어요. 예전엔 이런 음식은 외식할 때만 먹었는데, 이젠 집에서 자주 먹게 되었어요.”]
[“아빠한텐 좀 매울 수 있어요. 치킨라이스 어떠세요?”]
[“괜찮아. 그리고 이 나라에선 이 나라 음식이 제일 좋지. 너무나 훌륭하구나.”]
앤디가 앞접시에 새우와 치킨라이스를 덜었다. 아직 칠리크랩은 시도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소피가 소리 없이 웃었다.
[“데이빗, 자네 일은 어떤가?”]
[“괜찮아요. 바쁘지만 별문제 없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으니 더 힘들지?”]
[“제가 아니라 모린이 힘들죠.”]
데이빗이 모린을 보고 미소 지었다. 모린의 표정이 밝아졌다.
[“앤디, 와주셔서 감사해요. 오시니까 가족 잔치를 하는 것 같아 좋습니다.”]
[“자네도 지난겨울에 호주에 왔으면 좋았을 것을.”]
[“아마 이번 크리스마스엔 모두가 갈 수 있을 거예요.”]
[“와우, 그 집에 소피, 메이, 클라이브에 쌍둥이까지 다 모이면 정말 대단하겠어요.”]
모린이 말하자 소피가 웃었다.
[“사실은, 다시 영국으로 갈 기회가 있었는데…”]
모린과 소피가 데이빗을 쳐다보았다.
[“메이가 너무 어려서 이사를 하기도 힘들고, 소피도 학교에 다니는 중이니 우선 거절했습니다.”]
모린과 소피가 다시 식사했다.
[“그랬군…”]
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쉬튼이 서운해하더라고요.”]
데이빗이 모린을 보고 말했지만, 모린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조금 더 대화를 나눈 후, 그들은 각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잘 준비를 마치고 복도를 지나가던 앤디는, 메이의 방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메이가 잠들었어요.”]
[“우리 예쁜 메이.”]
잠든 메이를 보고 모린과 소피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앤디가 들어가자, 소피가 손짓하며 할아버지를 불렀다.
[“이리 와서 보세요.”]
앤디도 침대 옆에 서서 잠든 메이를 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작고 예쁠 수 있을까? 이 방에 있는 어떤 인형보다 더 인형 같았다. 앤디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그러자 조그만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길고 둥근 속눈썹이 귀엽고 아름다웠다. 꼭 감은 눈 옆에 놓인 작은 손이 살짝 움직였다. 저 모습을 지키는 것이,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같았다.
앤디가 주변을 보았다. 아기용품이 잘 정리된 선반과 작은 스탠드, 푹신한 소파가 있었다. 소파에 앉으면 보이는 곳에 가족사진 여러 개가 있었다. 네 식구가 함께한 사진, 메이의 사진, 소피와 메이의 사진들이었다. 그리고 한 액자에 분수 그림이 있었다. 앤디가 모린에게 주었던 그 그림이었다. 앤디는 모린이 메이를 안고 저 소파에 앉아 그림을 보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앤디가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꺼내 모린에게 주었다.
[“이게 뭐예요?”]
[“반지. 엄마가 끼던 거야.”]
[“이런 게 있었어요?”]
작은 반지엔 손톱만 한 초록색 에메랄드가 달려 있었다. 에메랄드 주변을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빙 둘러싸고 있었다.
[“다이아몬드는 가짜고, 에메랄드는 좋은 게 아니야. 거의 가치가 없다고 봐야지.”]
[“아빠가 엄마한테 주신 거예요?”]
[“하하, 아니. 내 할머니가.”]
[“증조할머니가요?”]
[“응. 난 모르는 이야기야. 내가 없을 적에. 레베카는 여전히 그 동네에 살았으니까, 내 할머니한테서 받았다고 들었어.”]
[“아…”]
모린이 반지를 손에 꼈다. 그녀가 미소 지었다.
[“진짜는 아니지만, 엄마가 아끼던 거란다.”]
[“당연하죠. 증조할머니가 주신 건데.”]
[“이번에 집을 정리하면서 찾았는데, 네가 가지면 좋겠구나.”]
모린이 초록색 반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 음. 아빠, 저 말고, 소피에게 주면 어떨까요?”]
[“네? 저요?”]
옆에서 반지를 구경하던 소피가 엄마와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응. 네가 가지면 좋겠어. 그게 맞는 것 같아. 아빠, 어때요? 괜찮을까요?”]
[“그럼. 괜찮고말고.”]
모린이 반지를 빼서 소피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소피의 두 볼이 붉어졌다. 앤디가 소피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좋은 건 아니지만 간직해 주겠니?”]
[“좋은 건 엄마가 많이 사줄게. 이건 잘 간직해야 한다.”]
[“그럼요! 잘 간직할게요!”]
들뜬 목소리에 자던 메이가 움찔했다. 소피가 자신의 입을 얼른 틀어막았다. 소피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 갈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소피가 메이의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고 신이 났다. 낡은 반지는 오묘한 빛을 냈다. 신비한 힘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아주 강한 매듭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엄마와 소피뿐 아니라 그 위부터 저 아래까지 이어질, 절대 끊어지지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그런 매듭이었다. 소피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녀는 반지를 빼서 책상 위에 곱게 올려놓았다. 너무 아까워서 함부로 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볼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반지 옆에는 예쁜 액자 속에, 소피가 엄마와 함께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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