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2
파랗던 하늘 끝에 노을이 시작되고 있었다. 혜진이 잔디밭 한가운데 작은 돗자리를 폈다.
[“여기 앉아요.”]
앤디가 돗자리에 앉았다. 혜진이 그 옆에 앉았다. 둘은 면바지에 편안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모자도 선글라스도 없이 등에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서울 거리를 걸었지만,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도 알아보지도 못했다. 앤디는 밝은 태양 아래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배웠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가, 이렇게 또 하나 생겼다.
[“다리가 아파요.”]
[“그 정도 걸어 놓고 다리가 아파요?”]
[“한국 사람들은 정말 많이 걷는군요.”]
혜진이 웃었다. 번화가를 조금 구경하다 지하철을 타고 와서 계단을 올라 여기 온 것뿐인데도, 앤디는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저 긴 다리가 무색했다. 그가 다리를 두드렸다. 두드리는 데도 한참 걸릴 일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갈 때는 택시로 데려다줄 테니.”]
[“고마워요.”]
혜진이 웃었다.
[“이곳은 어떤 곳이죠?”]
[“공연을 하는 곳이에요.”]
[“어쩐지,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혜진이 앤디가 보는 곳을 보았다.
[“저 건물의 지붕도 아름다워요.”]
[“네. 특이하죠.”]
[“한국의 건물들은 지붕이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렇네요.”]
혜진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라, 그녀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는 오늘 공연을 보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그런 셈은 뭐지요?”]
[“비밀이에요. 기다려봐요.”]
그들 옆에 다른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다들 가져온 작은 돗자리 위에 혹은, 돗자리 없이도 잔디 위에 편히 앉았다.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부터 사람들 사이를 뛰어다니는 튼튼한 꼬마까지, 보는 이들의 마음을 녹이는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벨 소리가 들렸다. 정면에 있던 큰 연못에서 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호?”]
음악 소리와 함께 수십 개도 넘는 높은 물줄기가 동시에 솟아올랐다. 맑은 물이 하늘 높은 곳까지 날아갔다. 사람들의 탄성이 들렸다.
[“와우, 춤을 추네요.”]
음악을 따라 물줄기들이 춤을 추었다. 왼쪽, 오른쪽으로 살며시 움직이다가 갑자기 하늘로 높이 솟았다. 한쪽이 낮아지면 다른 한쪽이 높아졌다. 서로 엇갈리며 멋진 무늬를 만들기도 했다. 즐거운 음악이 넓은 광장을 채웠다. 사람들의 박수와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가득했다. 앤디는 음악 분수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가 혜진을 보았다. 혜진도 분수를 감상하고 있었다. 반대편을 보고 있었지만, 그는 혜진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햇살에 잘 익은 동그란 두 볼이 귀엽게 올라가 있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분홍 꽃잎이 혜진의 검은 머리 위에 붙어 있었다. 앤디가 꽃잎을 떼어 주었다.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혜진의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혜진이 앤디를 보았다. 그녀가 부끄럽게 웃었다. 앤디는 바닥을 짚고 있던 혜진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로, 둘은 손을 꼭 잡았다. 이 손을 잡는데, 지구 반 바퀴가 걸렸다. 지금, 정말로 둘은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진정으로, 살아있었다.
분수를 보던 앤디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는 분수가 아닌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이 잔디밭 가득, 앤디가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를 모르고, 그가 모르는 사람들. 그 속에서 앤디는 동질감을 느꼈다. 이 순간,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서로의 마음은 알 수 있었다. 여기 있는 모두가 이 분수와, 이 음악과, 저 노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시간이 소중하고, 이 장면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워요.”]
앤디가 말하자 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앤디가 혜진에게 말했다.
“아룸, 다워요.”
혜진이 앤디를 보았다. 그녀가 밝게 웃었다. 혜진과 앤디는 분수를 보며 잔디밭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혜진은 생각했다. 이렇게 예쁜 분수가 바로 여기 있었는데, 왜 몰랐을까?
‘관심을 꺼버렸으니까…’
이렇게 아름답고 감사할 것들이 많은 세상에 다시 관심을 켜고 난 후에는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혜진, 저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뭐예요?”]
[“시장에 가고 싶어요.”]
[“시장에요?”]
[“네, 혜진이 매일 가는 그 시장이요.”]
[“사고 싶은 게 있어요?”]
앤디는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그 발판을 더 사고 싶어요. 혜진이 저에게 보내주었던.”]
[“아, 그 대나무 지압기요?”]
[“네.”]
혜진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혜진, 왜요?”]
[“... 네?”]
[“혜진, 혹시… 설마…”]
앤디가 혜진을 바라보았다. 파란 눈동자가 맑은 호수처럼 일렁였다.
[“그거, 만든 거예요?”]
[“네?”]
[“그거, 혜진이 만든 거였어요?”]
[“네? 아니요!”]
혜진이 앤디를 보았다. 풉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하하!”
생각해 보니 정말 웃겼다. 혜진이 큰 소리로 웃었다. 앤디도 덩달아 웃었다
[“시장에 팔아요. 가서 살 수 있어요.”]
[“하하, 전 또…그럼, 혜진도 시장에서 샀어요?”]
[“… 아니요.”]
[“……?”]
[“저는 백화점에서 샀어요.”]
[“네?”]
[“좋은 거로 보내주고 싶었거든요.”]
앤디가 의심과 장난이 섞인 눈으로 혜진을 보았다.
[“앤디, 정말이에요. 장인이 만든 거였어요. 상자에 상표가 적혀 있었는데, 검색 안 해봤어요?”]
[“……”]
앤디가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이것저것 눌러보던 그가 깜짝 놀랐다. 혜진이 웃었다.
[“앤디, 시장에 가고 싶어요?”]
[“…네.”]
[“오래 걸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요?”]
[“당연하죠. 할 수 있어요.”]
[“그래요? 좋아요. 내일 다리 위에서 만나요.”]
[“좋아요.”]
앤디는 혜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혜진은 알면 알수록 신기했다. 진지하면서도 엉뚱한 이 여인은, 매일 봐도 끊임없이 새로운 면이 나왔다. 그런데 그 새로운 면이 전부 착하고 다정해, 그녀와 함께 있는 것 자체로 맑은 물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혜진의 눈이 커졌다. 그녀가 손을 들어 분수를 가리켰다.
[“앤디! 저거 봐요!”]
분수 너머 흐릿한 무지개가 보였다. 경쾌한 음악 소리가 둘을 감쌌다. 혜진은 행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녀는 앤디에게, 오래전 그녀가 그를 본 적이 있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만의 추억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친구들에게 온 추억이었다. 지금 그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그녀에게 날아온 작은 새 같은 선물이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남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세상 한복판을 향해 걷는 것은, 설레면서도 무서웠다. 하지만 그녀는 쉰 번의 사계절을 충실히 보낸 사람이었다. 걱정이 많은 것이지, 겁쟁이는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 훗날, 오래된 성에 홀로 남아 커다란 창 너머 하얀 길 위에 그가 떠나고 남긴 자국만 보게 되는 날이 또 올지라도, 그녀는 그때는 빌지 않고 마음 깊이 감사하겠노라 다짐했다. 앤디가 있어, 혜진은 살아서 이 세상에 더 굳건히 존재할 수 있게 되었기에.
춤추는 분수 앞에서, 혜진과 앤디는 함께 행복했다. 손을 꼭 잡고 작은 무지개를 향해 둘이 나란히 앉은 모습이, 한 편의 짧은 시처럼 아름다웠다.
공연장 건물에서 멋지게 차려입은 부인 두 명이 나왔다.
“와, 분수 예쁘다.”
“공연보다 낫네.”
“잘 봐놓고 왜 그런데?”
“그냥 하는 소리지 뭐, 호호호.”
“어, 저기… 내가 아는 사람인가?”
“어디? 누구?
한 사람이 분수 앞 잔디밭을 열심히 보았다.
“나 왔어.”
건물 안에서 하얀 투피스 정장을 입은 여인이 나왔다. 명품 가방을 든 고운 손 위로 고급 스톤으로 예쁘게 장식한 손톱이 빛났다. 화려하고 우아한 이 사모님은 방지애 여사였다.
“가요.”
“아니, 저기…”
“왜?”
여성이 가리키는 곳을 방지애가 보았다.
“왜 그래?”
“아니야. 없네.”
“누가 있었어?”
“아니, 몰라. 잘못 봤나 봐.”
“빨리 가요. 저녁 예약해 뒀잖아.”
“네, 갑시다.”
여인 셋이 건물 밖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갔다. 춤추는 분수 위로 때 이른 달이 보였다. 하얗고 동그란 달이 모든 이들을 비추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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