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마지막 회> 헬로 (Hello)

헬로, 앤디 2

by SY전서주
Unsplash의Stephanie Harvey.jpg Unsplash의 Stephanie Harvey




띠리링 띠띠 띠리링


혜진이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

<“찐아~.”>



혜진이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우리 미희.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신가? 잘 지내지?”

<“아, 못 지낸다. 망했다.”>

“하하하하. 왜? 무슨 일 있어?”

<“내 비서 됐다.”>

“비서?

<“행정비서. 영화제 행정비서다.”>

“그게 뭐야?”

<“위원장 바로 밑에서 시키는 거 다 하고, 아래에서 뭐 하는지 다 들이다 봐야 하는 거.”>

“우와! 위원장 바로 밑이야? 너 대단하다. 높은 사람 되었네?”

<“높은 사람은 무슨. 힘들어서 미치겠다.”>



영화제 위원장에 조 용 감독이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미희는 그런가 보다 했다. 그 조 용이 자신을 위원장실에 불렀을 땐, 미희는 신나고 반가운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위원장실에 들어간 지 5분도 안 되어서 바뀌었다.



“제가 위원장이 되자마자 박미희 씨 생각이 났습니다. 딱 적합하신 분이라 생각했어요.”

“……”

“오랫동안 영화제 준비에 참여하신 풍부한 경험.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모든 사람과 상황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아량. 행정을 잘 아시고, 적용해서 바로 결과를 만들어내는 실무 능력. 안에서 싸우던 밖에서 뭐라 하던 신경 쓰지 않으시고, 이 영화제를 꾸준히 이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핵심을 보는 통찰력까지 두루두루 갖추신 분이니까요.”



미희는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박미희 씨가 행정비서에 적합하다고 추천하니, 이사장님, 사무국장님은 물론이고 시장님께서도 흔쾌히 수락하시며, 앞으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다 박미희 씨 덕분입니다.”



미희는 이번엔 속으로 저 말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을 욕했다.



“함께 일해봅시다. 박미희 씨가 잘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네에.”



미희는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혜진도 미희의 이야기를 듣고 웃었다.



“이야, 멋지다, 박미희. 능력 좋네.”

<“아, 죽겠다…”>

“역시, 성실하다니까. 다들 알아보는구먼.”

<“내가 어디가?”>

“너는 항상 네 일도 잘하지, 가족도 잘 챙기지, 나랑 주연이도 너 없으면 못살잖아.”

<“아이고, 됐그든? 참말로…”>



미희가 웃었다.



<“그래, 좋네.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진짜 좋은 것 같기도 하네.”>

“잘해. 건강 잘 챙기고.”

<“알겠다. 니는 잘 지내지?>

“어, 잘 지내”

<“알았다. 잘자래이.”>

“응.”



혜진이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침대에 누웠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Unsplash의Leo Okuyama.jpg Unsplash의 Leo Okuyama



혜진이 출근했다. 깨끗한 대리석 계단을 내려가 정면에 보이는 폐백실로 그녀가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직원이 반갑게 혜진을 맞았다. 책상에 앉아 있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후, 벌써 태가 나네. 앉아요, 앉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혜진이 창고로 들어가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마루 위로 걸어 나오며, 그녀는 구석구석에 놓인 물건들의 위치를 바로잡고 콩알만 한 쓰레기를 보이는 대로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셋째라 그런가? 배가 빨리 나오네. 아직 그렇게 안 됐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직원이 둥글게 부른 배를 쓰다듬었다.



“어때요, 몸은 괜찮아요?

“컨디션은 괜찮은데, 병원 검사에선 좀 조심하라고 나와요. 나이도 있고, 매일 바쁘니까요.”

“아후, 그렇겠네. 언제부터 휴직 들어가요?”

“다음 달에 가려고 했는데, 이번 달에 가야 할 거 같아요. 병원에서 안정을 취해야 한대요.”

“그래. 시키는 대로 해야죠. 애들은요?”

“남편이 휴직했어요. 나중엔 저희 엄마, 아빠가 올라오실 거고요.”

“다들 총출동이네.”

“네. 그렇게 되었어요.”



직원이 웃었다.



“오늘, 저 병원 가야 해서, 좀 일찍 나가도 될까요?”

“아후, 그럼요. 예약 손님도 없는데요. 지금 가요. 그냥.”

“하하하하, 그럼 안되죠. 아, 여사님 오시니까 너무 좋다.”



혜진이 웃었다. 혜진은 폐백실 문 앞의 탁자와 의자를 정리했다. 손걸레로 먼지를 닦고 날짜 지난 안내문과 오래된 잡지를 분류해 한쪽에 쌓아두었다. 그다음 혜진은 창고로 들어갔다. 그녀가 없는 사이, 창고는 잔뜩 지저분해져 있었다. 혜진은 청소도구함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냈다. 구석부터 바닥을 쓱쓱 쓸어냈다. 먼지가 피어올랐지만, 혜진은 개의치 않았다. 큰 봉지를 꺼내 쓰레기를 담고, 페트병과 캔은 작은 종이 상자에 따로 모았다. 한참 후, 물걸레용 청소 포로 바닥을 싹 닦아내자, 청소가 끝났다. 물건은 제 자리를 찾았고, 모든 것이 깔끔했다. 혜진의 머리와 어깨엔 먼지가 묻어 있었다. 그녀가 사용한 도구와 버릴 것을 들고 창고 밖으로 나왔다.



“저, 쓰레기 버리고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세상에, 앤디 코넬이 한국에 여자 친구가 있대요.”

“네?”

“인터넷에 기사가 떴어요. 왜, 작년에 앤디 코넬이 부산국제영화제 심사 위원장 하면서 한국에 왔었잖아요? 그러면서 우리 공항에도 잠깐 왔고요.”

“…네.”

“그리고 몰래 한국에 또 몇 번 왔더래요. 그게, 여기 여자 친구가 있어서 그랬대요.”



혜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쓰레기를 보았다.



“가만 보면, 외국인 남자들은 나이 들면 꼭 아시아 나라에서 여자 친구를 만들더라고요.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이해가 안 되네. 하긴, 그건 남자만 그런 게 아니죠. 만나는 여자도 다 똑같지…으휴, 이 사람도 생긴 건 그렇게 안 생겨서...”



혜진이 폐백실을 나왔다. 그녀는 건물 주차장 구석에 있는 재활용장에 갔다. 가까이 가기만 해도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커다란 쓰레기통에 혜진은 들고 있던 쓰레기 봉지를 휙 던져 넣었다. 옆에 있던 재활용품 모으는 곳에는 종이와 페트병과 캔을 넣었다. 임시로 쓴 종이 상자는 테이프를 떼어내고 발로 밟아 납작하게 접었다.


퍽퍽


이미 납작해진 상자를 그녀는 몇 번 더 밟았다. 혜진은 이번엔 청소 도구를 가지고 화장실로 갔다. 청소 칸에서 그녀는 쓰레받기에 묻어 있던 먼지를 털어내고 물로 헹궜다. 갖고 온 손걸레는 낡은 대야에 물을 받아 담근 후 빨랫비누를 묻혀 박박 문질렀다. 혜진이 걸레를 이리 비비고 저리 비볐다. 옆에 고무장갑이 걸려 있었지만 그녀는 맨손으로 걸레를 빨았다. 손등이 아팠다. 찬물에 걸레를 헹구자 검은 구정물이 나왔다. 손걸레는 다시 깨끗해졌다.



‘잘 안 지네…’



예전부터 있던 얼룩인데도 당장 지워야 하는 것처럼, 혜진은 다시 손걸레에 비누를 묻혀 한참을 비볐다. 괜히 부아가 났다. 그렇게 몇 번을 하니 묵은 얼룩은 정말로 조금 깨끗해졌다. 그녀는 걸레를 꼭 짰다. 그녀의 손은 벌겋게 부어있었다. 물기가 마른 쓰레받기와 손걸레를 챙겨, 혜진은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것들을 들고 폐백실로 돌아오는 복도가 유난히 길었다.



‘마음이 왜 이럴까?’



혜진의 손가락엔 쓰레받기가 달린 줄이 아슬아슬 걸려 있었다.



‘왜 아픈 걸까? 무엇인 줄 알고? 대체, 무엇이 되고 싶었기에?’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그녀의 마음은 흰 종이 같았다. 원래부터 하얀 종이가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생긴 알록달록한 그림을 지우려 꾸덕한 흰 물감을 잔뜩 부어 무거워진 그런 종이였다. 혜진이 폐백실 창고로 들어갔다. 도구함에 청소 도구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그녀가 거울을 보았다.



“……”



혜진은 억지로 웃어보았다. 웃으니 또 웃음이 나왔다. 마음이 힘들 때, 혜진은 이렇게 거울을 보고 힘을 내곤 했다. 낯설고 어렵고 복잡한 것 속에서 헤맬 때 나를 보면, 이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혜진이 가슴에 달린 이름표를 바르게 했다.


HJ KIM


영어로 머릿소리만 적어 둔 이 이름은, 그녀의 완전한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알파벳이 뭐라 하던, 그녀는 그녀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슬기롭고 보배로운 존재였다. 누군가는 그녀를 지니어스라고 불러주기도 했었다. 진짜 천재는 아니었지만 그런 척이라도 해서, 하나뿐인 아들의 기를 살려주고자 낮이고 밤이고 혼자 식탁에 앉아 문제집을 펼쳐놓고, 막막한 숫자들을 연습장에 끄적이던 사람이 혜진이었다.


그녀는 모든 소명에 최선을 다했다. 누군가의 딸이자 친구이자 학생이자 연인이자 동료이자 아내이자 엄마였던 그녀는, 그녀의 이름을 걸고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왔다. 신은 아니었기에 전부 다 백 점 짜리는 아니었지만, 인간으로서, 못난이 김혜진으로서 부끄러운 짓은 한 적이 없었다.


거울 속에 내가 있었다. 가슴에 나의 이름을 단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두 개의 눈동자. 지난 50년을 함께 해 준, 고맙고 소중한, 저 ‘나’.



‘저 이가 나를 응원해 준다면, 괜찮아.’



혜진은 이번에도 자신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녀가 휴대폰을 열었다. 그의 기사를 검색했다. 화려한 행사장에서 멋진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줄줄이 나왔다. 그와 그의 동료들을 찬양하는 기사들 사이, 아시아 여성들과 함께 웃으며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들이었다. 혜진은 쓴웃음이 나왔다. 창고에서 나오며 혜진은 문을 꼭 닫았다. 닫는 것, 자르는 것, 멈추는 것, 잊는 것은 그녀가 제일 잘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곧 차분해졌다. 혜진은 원래의 혜진으로 돌아갔다. 시간이 흘렀다. 직원은 먼저 퇴근했고, 혜진은 혼자 폐백실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컴퓨터 앞에 휴대폰을 세워 놓고, 찍은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옆에는 그녀가 요즘 즐겨 쓰는 색연필이 있었다.



“……”



하지만 눈앞의 종이는 계속 백지였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그녀가 폐백실 바깥에 달린 작은 유리 등의 불을 껐다. 휴대폰은 책상 위에 그대로 둔 채, 혜진은 옷을 갈아입으러 창고로 들어갔다. 까맣던 그녀의 휴대폰 화면에 불이 켜졌다. 새로운 소식이 연달아 들어왔다.



<[HOT: 익명의 기부자를 파헤치다.]>

<[줄리아,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결국엔, 다시!]>


띠리링 띠띠 띠리링, 띠리링 띠띠 띠리링


혜진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13. 타르 모루스탈.jpg



바람이 부는 모래벌판 한가운데,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머리를 감싼 하얀 스카프 아래로 금발 머리가 보였다. 무슨 용기인지, 이 뜨거운 사막을 홀로 걸어 어딘가로 가는 이 사람의 뒤엔 발자국만이 길게 남았다. 아름다운 천막으로 둘러싼 한 건물 앞에 그녀가 멈췄다. 앞에 서 있던 안내원이 그녀에게 걸어왔다.



[“누구시죠?”]



직원이 묻자, 그녀가 웃었다.



[“누구신지…”]

[“그만, 괜찮아. 우리는 그녀를 알아.”]



안에서 나온 다른 직원이 그녀에게 걸어왔다.



[“우리 모두 당신을 알지요. 안으로 들어가세요.”]



그녀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저 안쪽 작은 오아시스 옆 나무 아래,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모래밭 속 작은 휴식처였다. 그곳에 앉아 있던 헬렌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스카프를 두른 여인은 헬렌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헬렌의 마른 몸이 떨렸다. 헬렌은 줄리아가 무서웠다. 그녀는 헬렌을 살고 싶게도 또 죽고 싶게도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헬렌이 애써 가꾼 평화로운 정원에 떨어지는, 수백 개의 불붙은 유성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헬렌은 줄리아에게서 도망칠 수도, 그녀를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줄리아는 헬렌이 사랑하는, 헬렌의 운명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사람이 사막에서 재회했다. 그 모습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나갔다. 모든 이들이 파파라치가 된 세상에, 사막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둘의 기사가 모든 곳을 덮었다. 앤디 코넬의 기사 따위는 이미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없었다.







11. 아파트.jpg



혜진이 불 꺼진 폐백실에서 나왔다. 문이 잘 잠긴 것을 확인한 그녀가 계단으로 걸어갔다. 어떤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였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혜진이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보았다. 바깥에 달린 조명 덕에 그 모습은 검은 실루엣이 전부였지만, 혜진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계단을 내려와 혜진 앞에 섰다. 혜진이 그를 보았다.



“헬로, 앤디.”

“헬로, 혜진.”



하늘로 향하는 대리석 계단 아래에서, 둘은 서로를 보고 인사를 나누었다. 다정한 미소와 눈빛도 함께였다. 앤디가 손을 내밀었다. 혜진이 천천히 그 손을 잡았다. 무언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오직 이 순간에만 펼쳐질, 중요한 무엇이었다. 다른 곳에 가는 순간 흔적도 없이 지워지더라도, 잠시나마 그들을 살게 할, 그런 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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