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2
[“여기, 커피와 빵 있습니다.”]
편의점 로고가 그려진 캡 모자를 쓴 나이 든 점원이 앤디가 주문한 블랙커피를 카운터 위에 올렸다.
[“고맙습니다.”]
[“비가 오네요.”]
앤디가 편의점 창문 밖을 보았다. 계속 흐리더니 결국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시는 건가요?”]
[“네.”]
[“오랜만에 고향에서 즐겁게 지내셨나요?”]
[“그럼요.”]
[“다행이군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코넬 씨.”]
[“저도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앤디가 편의점에서 나왔다. 이곳은 잉글랜드 햄프셔주 남동부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이곳에도 드디어 작년에 편의점이 생겼다. 덕분에 아침 일찍 커피를 살 수 있었다. 앤디는 편의점 앞에 세워 둔 자동차에 서둘러 탔다. 열국의 바다처럼 파란 애스턴 마틴 DB 5였다. 운전석에 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그가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곳에도 비가 오는군…’]
한국은 며칠째 비가 내리는 모양이었다. 여름 전 짧은 우기라고 했던 것 같다. 지구 반대편에도 똑같이 비가 내리고 있다니, 재미있는 일이었다. 앤디가 혜진이 올린 사진을 하나씩 보았다.
[“하하...”]
앤디는 한 사진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깨끗한 식탁 위에 수북이 있던, 이름 모를 초록색 풀 다발 사진이었다. 도저히 어떤 과일이나 채소라고 보기 힘든 이 식물 사진은, 마치 앤디를 노린 함정 같았다. 앤디가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글을 적었다.
<[맛있겠어요.]>
곧 답장이 왔다.
<[맛있어 보여요?]>
<[네]>
<[좀 드릴까요?]>
<[네. 부디.]>
<[주소 알려주세요.]>
앤디가 런던 저택의 주소를 메시지로 보냈다.
“으이구, 농담은…”
주소를 보고 혜진이 웃었다. 그것은 식탁 위에 산처럼 쌓아놓은, 아직 손질하기 전의 열무 다발 사진이었다. 여름 김치를 담그러 준비하던 참이었다.
<[전 지금 런던으로 출발해요. 여기도 비가 와요.]>
<[운전 조심하세요, 앤디.]>
앤디가 가만히 휴대폰을 보았다. 메시지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네, 나중에 봐요.]>
<[네.]>
앤디가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여기서 런던까지는 차로 2시간 정도였다. 멀지 않은 거리지만 윔블던 주변은 차가 밀려서 서두르는 게 나았다. 앤디의 자동차가 출발했다. 아직 새벽 기운이 가시지 않은 작은 동네는 조용했다. 이곳은 앤디의 할머니가 살던 곳이었다. 어릴 적 앤디는 이곳에 자주 놀러 왔었다. 도로 건너편 주택 뒤로 뾰족한 하얀 지붕이 보였다. 그가 여기 올 때마다 열심히 다니던 교회였다.
교회의 아이들 방에는 책과 장난감이 많았다. 벽에 붙은 커다란 예수(JESUS) 글자타일은 앤디도 같이 칠했었다. 앤디는 가죽이 다 갈라져 부드럽다 못해 까슬해진 4인용 갈색 소파의 맨 왼쪽에 앉는 것을 좋아했다. 그 자리에선 창문 너머 푸른 들판이 보였다. 과자를 먹다가 옷에 흘리면 창문 밖으로 쓱 버려 버리기에도 좋았다. 할머니는 앤디가 어릴 적 돌아가셨다. 앤디가 티브이에 나오는 것을 보고 좋아하셨다는 이야기는 전해 들었지만, 그 모습을 본 기억은 없었다. 그 후 앤디의 삶은 빠른 제트스키 같았다. 그 어떤 것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기분이 안 좋아? 괜찮아. 긴장돼서 그런 거야. 열심히 해. 알았지?’]
[‘걱정하지 마. 당연히 잘될 거야. 너는 재능이 있어. 다들 눈뜬장님이 아니야. 보는 눈이 있어서 너를 선택한 거라고.’]
[‘여기 들어간 투자가 얼마인데, 정신 차려!’]
성공의 껍데기 속 알맹이는 너무나 썼다. 칭찬과 박수, 위로, 격려, 협박, 질타를 내리는 비처럼 온몸으로 맞던 앤디는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몇 년간 비어 있던 할머니 집으로 앤디는 몰래 도망쳤다. 창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부엌 옆 문의 걸쇠가 약하다는 것을 앤디는 알고 있었다. 커튼이 쳐진 어두운 거실로 앤디가 걸어 들어갔다. 모든 물건이 그대로인 것이 이상했다. 그는 침실로 갔다. 그 많은 담요 사이, 자신이 좋아하던 노란색 자동차가 그려진 자그만 담요가 아직도 있었다. 앤디는 먼지 쌓인 침대 위에서 꼬박 이틀 동안 잠만 잤다. 해가 질 무렵, 그는 창고에서 자전거를 꺼냈다. 비어 있던 집에 도둑이 든 줄 알고, 한 손에 하키 스틱을 들고 찾아온 레베카를 만난 것이 그때였다.
영국에 돌아온 앤디는 할머니의 집을 팔기로 결정했다.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집 안에 있던 살림들을 살펴보기 위해 이곳에 왔지만, 딱히 대단한 물건은 없었다. 집과 함께 이 잡동사니들도 갖고 가 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신기하게도 그 반지가 화장실 거울 함에 있었다. 진짜도 아닌 이 반지를, 레베카는 즐겨 끼고 다녔다.
[‘괜찮아. 가짜란 건 나만 아니까. 다들 진짠 줄 알잖아. 그리고 앤디, 신기한 게 뭐냐면, 절대로 안 잊어버려. 실수로 어디에 흘려도, 어떻게든 다시 나를 찾아와. 마법의 반지야.’]
비가 계속 내렸다. 도로 위 하늘이 회색빛이었다. 앤디가 라디오를 켰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
흥겨운 부기 리듬의 피아노 연주였다. 앤디의 어깨가 가벼워졌다.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쭉 뻗은 회색 도로를, 잘생긴 바닷빛 자동차가 시원하게 달렸다.
[“응. 가고 있어. 자네는 어때?”]
앤디는 달리는 차 안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세련된 정장 차림이었다. 영화 프리미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런던의 레스터 스퀘어로 가는 중이었다.
<[“전 괜찮아요.”]>
[“닥터 아시프는 만났지?”]
<[“매일 만나고 있어요.”]>
조쉬의 지겨워하는 목소리를 듣고 앤디는 안심했다.
<[“죄송해요. 제가 같이 가야 했는데. 그래도 사람들한테 다 말해두었으니 괜찮을 거예요.”]>
[“걱정 마.”]
자동차가 속도를 줄였다. 앤디가 창 밖을 보았다.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래. 잘 쉬고, 난 지금 가야 해. 나중에 연락하세.”]
<[“네. 나중에 만나요.”]>
운전기사가 레드카펫 입구에서 차를 세웠다.
[“아직 대기하시랍니다.”]
[“그래요.”]
앞서 도착한 차에서 유명인들이 내릴 때마다, 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졌다. 직원, 관광객, 구경꾼 할 것 없이 휴대폰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사람들 전부가 파파라치가 된 세상이었다. 갑자기 함성이 커졌다.
[“오, 세상에, 너무 아름다워요.”]
[“와우! 이쪽을 봐주세요!”]
[“줄리아! 줄리아!”]
줄리아가 기자들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키가 크고 날씬한 그녀는 청록색의 실크 바지정장을 입고 있었다. 품이 넉넉한 옷이 몸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길게 늘어트린 금발 머리가 바람에 나부꼈다. 그녀가 레드 카펫 위를 천천히 걸어갔다.
[“……”]
자주 본 것도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앤디는 저 사람이 줄리아인지 아닌지 금방 알아본 적이 없었다. 옷차림이야 매일 바뀌지만, 오늘 저 머리 색만 해도, 지난번에도 저 색이었는지, 원래 머리 색이 무엇인지 앤디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밖에서 경호원이 차 문을 살짝 두드렸다. 운전기사가 앤디에게 말했다.
[“코넬 씨,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가실 때 뵙겠습니다.”]
[“고마워요.”]
경호원이 문을 열어주자, 앤디가 차에서 내렸다.
[“오! 코넬 씨!”]
[“코넬 씨! 반가워요!”]
기자들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앤디는 편안한 미소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앤디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걸어가 손을 흔들었다. 종이를 들고 있던 이들에겐 사인을 해 주고, 손을 내미는 사람과는 악수를 했다. 같이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사진을 찍어주었다. 한 기자가 그를 불렀다.
[“앤디, 안녕하세요!”]
[“오, 반가워요.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나요?”]
[“네. 오랜만이에요.”]
앤디는 기자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그는 조쉬와 특별히 친해 앤디도 자주 본 적이 있었다.
[“최근에 아시아 국가에 또 다녀오셨다면서요?”]
[“네, 다녀왔어요. 한국의 아름다운 관광지에 관한 홍보 영상을 촬영했어요.”]
[“어떠셨나요?”]
[“매우 좋았어요. 새로운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그가 사진을 찍자, 앤디가 미소를 지어주었다. 찍은 사진을 확인하는 그에게 앤디가 물었다.
[“조쉬 소식은… 들었죠?”]
[“네? 무슨?”]
[“……”]
기자가 앤디를 쳐다보았다. 앤디는 입을 다물었다. 조쉬가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우와와와!!!!”]
[“세상에!!”]
레드카펫 안쪽에서 큰 함성이 들렸다. 모든 사람이 그쪽을 쳐다보았다.
[“오, 무슨 일이지? 앤디, 나중에 봐요.”]
기자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뛰어갔다. 구경꾼들도 직원들도 그쪽을 향해 움직였다. 앤디는 혼자 남겨졌다. 그는 멀어지는 사람들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그도 안쪽으로 갈 수 있었지만, 가장 붐비는 곳에 선뜻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이럴 때 항상 조쉬가 있었지…’]
굳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필요가, 앤디는 없었다. 행사장 뒤 혹은 복도 구석에서, 정확히 언제,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조쉬는 미리 귀띔해 주었었다. 수없이 참석했던 이런 간단한 행사에서도, 앤디는 조쉬의 빈자리를 느꼈다.
[“앤디.”]
[“오, 안녕하세요.”]
앤디의 옆에 한 남성이 멈춰 섰다. 그는 나이가 여든을 향해 가는 영국인 남자 배우였다. 전성기에는 연극 무대에서 왕 역할을 주로 맡았던 그는 이제 지팡이를 짚고 걷는 노인이 되었다.
[“잘 지내셨나요?”]
[“응. 자네는?”]
[“저는 잘 지냈습니다.”]
[“아프다더니?”]
[“네?”]
[“암이라면서?”]
[“아, 제가 아니라 조쉬입니다.”]
[“조쉬가? 그 어린 사람이 어쩌다가…”]
노인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자넨 줄 알고…”]
[“걱정하셨나요?”]
[“좋아했지.”]
[“네?”]
[“내가 그 앤디 코넬을 하나는 이겼구나 싶어서 좋아했지. 평생 지고만 살았는데 말이야.”]
[“……”]
[“내 역할을 다 빼앗아 가더니, 나중엔 내 미국 진출까지 낚아채 간, 예쁜 조무래기, 앤디 코넬.”]
앤디는 웃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 노배우는 그 옛날 앤디에게 친절했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오늘은 머리를 단정히 빗고 고급 정장도 입었지만, 왕년의 그는 괴물이 할퀴고 간 듯 마구 찢어진 청바지에, 때때로 상의 따위는 걸치지도 않고 거리를 활보했었다. 남자도 귀걸이를 달고 화장을 한다는 것을, 앤디는 그를 보고 처음 알았다. 품위 있는 역할을 그렇게나 많이 하면서도 평소 차림새는 완전히 다르다는 게,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사람들을 미치게 했다. 다양한 욕을 가르쳐준 것도 바로 그였다. 자신의 트레일러에 앤디를 불러놓고 그는 큰 소리로 욕을 하곤 했다. 연기 연습을 하자고 했으면서 대본에도 없는 욕을 하는 그가 앤디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망할 애새끼!’]
[‘말을 못 알아들어? 멍청한 놈!’]
창문 밖으로 그의 상스러운 말들이 고스란히 퍼져나갔다. 그는 앤디에게 이 정도 목소리를 써야 표현이 된다고 했고, 앤디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고 보니 그런 날엔 사람들이 앤디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위암이라길래, 내가 더 센 거라서. 난 전립선이거든.”]
[“……”]
[“전이도 되었다고. 어때?”]
[“세상에, 정말…”]
앤디의 얼굴이 빨개졌다. 슬프고 안타까웠다.
[“괜찮으세요?”]
[“아니.”]
[“같이 가요.”]
[“싫어.”]
지팡이를 짚은 노배우는 손을 휘휘 저어 앤디를 물리쳤다. 앤디는 그 옆에서 천천히 함께 걸어갔다. 그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 로비를 가로질렀다. 정장 차림의 직원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자리로 안내해 드릴게요.”]
둘은 젊은 직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가 데려간 좌석을 본 앤디는 당황했다. 늘 앉던 자리가 아니었다. 이 자리는 구석일 뿐 아니라, 벽에 튀어나온 장식 때문에 무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이 자리가 맞나요?”]
[“화장실을 가야겠는데.”]
[“잠시만요, 잠시만요. 제가 같이 가드릴게요.”]
[“됐어, 앤디. 나는 어린애가 아니야.”]
노배우는 휘청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직원이 휴대폰으로 검색을 했다.
[“이 자리가 맞습니다.”]
[“하지만 조쉬가 말하기론…”]
[“누구요?”]
[“조쉬 말입니다. 저의 비서. 조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 코넬 씨, 코넬 씨 비서의 이름까지 제가 알지는 못합니다.”]
[“……”]
[“자리가 불편하시면 바꿔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드릴까요?”]
앤디가 자신이 원래 앉던 자리를 보았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젊은 배우들이 시끌벅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네. 알겠습니다.”]
앤디가 자리에 앉았다. 그가 휴대폰을 꺼냈다. 이 행사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실시간으로 뉴스가 되어 뜨고 있었다. 신기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난데, 이곳 소식은 지구 반대편 사람들이 더 빨리 알았다. 아까 레드카펫에서 소란이 났던 것은 익명의 누군가가 남자 배우에게 컵케이크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이 나쁜 자식!’]
그 배우는 최근 소셜미디어에 어떤 글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고 하는데, 앤디는 잘 모르는 이야기였다. 인심 좋은 사람처럼 예쁜 바구니에 컵케이크를 가득 구워 온 어떤 이가, 그 배우를 보자마자 야구공 던지듯 팔을 힘차게 휘둘러 케이크를 던졌다.
[‘세상에!’]
남자 배우는 고개를 돌려 얼굴은 구했지만, 나머지는 어쩔 수 없었다. 퍽퍽 소리를 내며 그의 몸에 맞고 떨어진 컵케이크들이 레드카펫 위를 굴러다녔다. 사람들이 놀라 그 인물을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도망치는 남자 배우를 향한 그의 흔들림 없는 제구력이 대단했다. 그때, 남자 배우 옆에 서 있던 줄리아가 바닥에 떨어진 케이크 하나를 주웠다. 그녀는 케이크를 손에 들고 보란 듯 한 입 베어 먹었다.
[‘음~ 맛이 좋네요. 저 이한테 과분한 케이크예요. 헤이, 좋은 날이잖아요. 이렇게 망치지 말아요.’]
줄리아는 컵케이크 투수에게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분노에 차 양손에 케이크를 들고 있던 그는 멋쩍어했다. 그 장면의 영상과 사진이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올라오고 있었다.
[“화장실이 빌어먹게도 멀구먼.”]
노배우가 자리로 돌아왔다.
[“제길, 마실 것을 가져와야 하는데.”]
[“제가 가져올게요.”]
앤디는 자리에서 일어나 음료 바 로 갔다. 마실 것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옆에 장식된 소책자들을 보았다. 기부를 기다리는 단체들이 놓고 간 소책자들이었다. 에베레스트산을 보호하는 단체, 나무를 심는 단체, 위기에 빠진 해양 동물을 구조해 주는 단체들이 있었다. 어린이의 노동착취를 막고 교육을 제공하는 단체, 영재를 후원하는 단체도 보였다. 앤디가 한 소책자를 꺼내 들었다. 희귀병에 걸린 아이들을 돕는 단체였다. 표지에서 아이들을 안고 있는 사람은 헬렌이었다. 앤디가 소책자를 읽었다.
[“내가 비건으로 준비하랬지!”]
[“죄송해요.”]
[“그런 크림을 먹으면 얼굴에 뭐가 올라온단 말이야!”]
커튼이 쳐진 구석에서 누군가가 어린 직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흘끗 보니 청록색 옷차림이 줄리아였다. 앤디는 몸을 천천히 돌린 후, 들고 있던 소책자로 얼굴을 가렸다. 음료가 나오기만을 그가 조용히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줄리아가 갑자기 앤디에게 와서 말을 걸었다. 앤디는 깜짝 놀랐다.
[“줄 서신 건가요, 앤디?”]
[“아닙니다. 주문하세요. 저는 했습니다. 오, 지금 나왔네요. 저는 가보겠습니다.”]
앤디는 소책자를 제자리에 꽂아두고 바텐더가 주는 음료를 받아 자리로 갔다. 사람들이 좌석에 앉자, 홀의 불이 꺼졌다. 시간이 지났다. 영화 상영이 끝났다. 꽤 재미있는 영화였다. 좀비 영화를 좋아한 적이 없는데, 이 영화는 앤디의 마음에 들었다. 주연 배우들이 무대에 올라 단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노배우가 눈을 비볐다.
[“젠장, 피곤해 죽겠네.”]
[“시간이 늦었죠.”]
[“빨리 가야겠어.”]
갑자기 주변이 밝아졌다. 카메라와 조명이 앤디와 노배우 옆으로 온 것이었다.
[“앤디, 와주셔서 감사해요.”]
줄리아가 인사했다. 앤디도 미소를 지었다.
[“영화가 어땠나요?”]
[“재미있었어요. 멋졌습니다.”]
[“앤디의 취향은 아니겠죠?”]
[“고백하자면… 제 취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네요. 너무나 좋은 영화였습니다.”]
[“하하, 감사해요. 그럼, 주변에 추천해 주실 건가요?”]
[“물론이죠.”]
[“특별히 누구에게 추천해 주고 싶으신가요?”]
[“손녀에게요. 분명 아주 좋아할 거예요.”]
[“감사해요. 앤디. 늘 친절하시군요.”]
줄리아가 앤디를 가볍게 안았다. 그녀가 앤디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엿 먹어요, 앤디.”]
[“……”]
줄리아는 아름답게 미소 지으며 다른 자리로 걸어갔다. 눈부신 조명과 카메라도 그녀를 따라갔다.
저택에 도착하니 시간은 자정이 가까웠다. 다른 사람들은 애프터 파티를 즐기러 갔지만, 앤디는 망설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앤디는 옷을 벗어 의자에 대충 걸쳐두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프리미어 행사 기사는 앤디의 관심 밖이었다. 전화번호 목록을 보았지만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조쉬는 자고 있을 것이었다. 앤디가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잘 준비를 모두 마친 앤디가 휴대폰을 보았다. 그가 드로잉스타에 들어갔다.
<좋은 아침>
사진은 방금 올린 것이었다. 강 위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앤디가 피식 웃었다.
[‘부지런하기도 하지…’]
앤디가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가 침대에 누웠다.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
<[시장에 가나요?]>
금방 답장이 왔다.
<[어제 다녀와서 안 갔어요. 오늘은 산책만 했어요.]>
<[벌써요?]>
혜진이 식탁 사진을 보냈다. 식탁 위 그 풀 사진이었다. 그런데 오전과는 다르게 채소는 깨끗이 씻고 다듬어져 있었다. 푸릇한 상큼함이 느껴졌다. 샐러드를 만드는 모양이 났다.
<[오늘 하루 잘 보냈나요, 앤디?]>
혜진의 메시지를 보고, 앤디는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자신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런던으로 와 빠르게 준비한 후, 약속된 행사에 참석했다. 그런 행사들이 늘 그렇듯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이 화려하고 강렬하고 번쩍거렸다. 윤이 나도록 잘 다듬은 사람들은 인사도 대화도 웃음도 실망도 모두 시끄러웠다. 물론, 즐겁고 반가웠다. 앤디도 그곳에 속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예전 같지 않았다. 익숙한 것보다 낯선 것이 더 많았다. 소란 속을 헤매던 그는 무방비 상태로 모욕까지 당한 후, 밤늦게 귀가했다. 이제야 앤디는 오늘 하루가 전쟁 같았음을 깨달았다.
[‘……’]
생각해 보니 자신이 무사히 돌아온 것이 새삼 놀라웠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대체 어떻게 이렇게 살아왔던 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창밖에 작고 동그란 달이 떠 있었다. 앤디는 혜진을 생각했다. 그가 기괴한 서커스 같은 하루를 보내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부엌에서 조용히 채소를 다듬고 정갈한 침대 위에서 편안히 숙면한 후, 아침 해 아래 강가를 산책했다. 앤디는 기분이 이상했다.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네, 좋았어요.]>
메시지를 보내며 앤디는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말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꾹 참고 삼키었다.
<[다행이에요. 오늘 많은 일을 했으니, 피곤하겠어요.]>
<[네. 조금 피곤하네요.]>
<[불쌍해라, 얼른 자요.]>
앤디는 지금 이 작은 방에 혼자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네, 이제 잘게요. 혜진은 제가 잘 동안 뭐 할 거예요?]>
<[뭐 하긴요. 매일 똑같이, 열심히 살아야지요.]>
그 말이 좋았다.
<[네. 그럼, 내일 또 만나요.]>
<[좋아요. 잘 자요. 앤디, 좋은 꿈 꾸세요.]>
앤디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앤디는 혜진을 생각했다. 혜진은 정말 자신이 잠든 동안 열심히 살 것이다. 지구 반대편 그녀의 나라에 해가 뜨면, 그녀는 그 ‘지루한 쳇바퀴’를 또 시작할 것이다. 앤디가 자신의 방 커튼을 보았다. 아침이 와 저 도톰한 천을 잡아 열 때, 가끔은 그 손을 놓고 다시 침대 속으로 돌아가 사라져 버리고 싶은 날도 있었다. 과거와 미래가 보내는 환상의 최면 없이 외로운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전혀 상쾌하지도 보람차지도 않았다. 누군가는 ‘지금’이 ‘선물’이라 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에 만족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는 삶은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한가? 여태 덮고 있던 달콤한 눈가리개를 풀고 찬 바람이 부는 빈 거리를 직시하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놀라워…’]
그렇기에 혜진은 비범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일구고 성취하고 상실하는 모든 과정을 오롯이 견뎌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조용한 방 안에서 평화로운 부식을 택하는 대신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남을 선택할 때, 분명 매 순간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매일 해냈다. 세상에,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한결같이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쳇바퀴를 묵묵히 돌아내고야 마는 이를, 앤디는 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그런 사람이니까.’]
혜진은 낮을 해처럼 밤을 달처럼 사는 사람이었다. 태양 아래 궂은일을 한 후 노을을 보며 위안을 얻고, 어두운 밤으로부터 편안한 잠을 선물로 받는 사람. 달이 주는 고요한 휴식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앤디는 혜진이 시장에서 장을 보는 상상을 했다. 그녀 옆에서 물건을 구경하는 자신도 그려보았다. 앤디는 그런 것을 연기로만 했지, 실제로는 정말 오랫동안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같은 그의 연기와 가짜 같은 그의 인생. 하지만 그녀는 진짜 인생을 살고 있었다. 매일, 씩씩하게. 그녀가 그런 사람이었기에, 앤디는 그녀의 말이 그 어떤 사람들의 말보다 믿음직했다. 앤디는 혜진의 이름이라면 언제든 믿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악몽에 빠지더라도, 그녀라면 미로 속에서 헤매는 그를 금방 찾아내 가뿐히 건져내 줄 것 같았다. 이 소중한 위안을 잃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나중에 또 그곳에 가게 되면…’]
앤디는 놀이동산에 가고 싶은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나중에 그곳에 가면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중’이란 언제일까? 지금이 바로 그들에게 나중이자, 유일한 시간이자, 마지막 장면이었다.
*한국어 대화와 영어 대화를 구분하기 위해 영어 대화는 [ ] 기호로 표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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