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 앤디 2
밤이 되었다. 경주의 유적지마다 조명이 켜졌다. 낮 동안 잠들어 있던 오래된 건물들이 색색의 빛 옷을 입고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혜진은 택시를 타고 있었다. 달리는 차 창밖에 월정교가 보였다. 월정교에도 불이 들어왔다. 남천에 비춘 월정교의 모습은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다리 위를 건너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1500년 전에 이곳에 살던 사람들도, 지금 이곳에 사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시간은 쏜 살이었다. 하천 위 다리 하나만큼도 살지 못했다. 그러니 옛날 그들과 지금 우리가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 그들이 기뻐하고 슬퍼했던 것과, 우리가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 혜진은 자신이 지금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이곳이 아닌 아주 먼 곳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의 국보가 불타서 망가져 버린 것 보셨지요? 세상에.’]
언젠가 혜진은 가족과 여행을 가던 중,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관광객은 한국에 여행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 관광객은 불탄 숭례문을 찍은 사진을 혜진에게 보여주었다.
[‘너무 충격적인 일입니다.’]
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숭례문 방화 사건은 충격적인 일이 맞았다.
[‘이런 소중한 문화재가 불타서 사라져 버렸으니, 한국인들의 상심이 크겠습니다.’]
[‘…네.’]
사진은 여러 장이었다. 그 관광객의 표정은 꽤 심각해 보였다. 남의 나라 문화재가 훼손된 것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이 사람은 분명 착한 사람인 것 같아, 혜진은 열심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동시에 혜진은, ‘그것 때문에 내가 크게 상심했나?’하는 의문도 들었다. 곧 자신의 얕은 애국심을 반성하며, 관광객을 위로하고자 혜진이 말했다.
[‘그런데… 고칠 거예요.’]
[‘그래야죠.’]
[‘다시 만들 거니까 괜찮아요.’]
혜진이 부러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이어폰을 집어 들었다.
[‘네. 물론 그렇겠지만, 고쳐도 예전 그 숭례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혜진이 이어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건 이미 사라져 버린 거죠.’]
[‘아, 그런가요? 네. 그렇죠.’]
[‘다시 만들어도 예전 선조들이 만든 그 건물이 아니지 않습니까?’]
[‘네……’]
[‘결코 같을 순 없을 거예요…’]
[‘네, 음… 그렇긴 한데… 괜찮아요. 결국 똑같거든요.’]
[‘네?’]
[‘왜냐하면 숭례문을 만든 사람들도, 아마 조선시대일 테니 길어야 아마 600년 전 사람들일 텐데, 그때 여기 살던 사람들도 한국인이고, 지금 우리도 한국인이라서요. 우리가 지금 고쳐서 또 한 5,600년 지나면 또 똑같아지는 거죠. 그래서 괜찮아요.’]
그 관광객은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혜진은 순간 자신이 무언가 잘못 말했나 싶었다. 혜진이 서둘러 덧붙였다.
[‘하지만! 굉장히, 신중히, 잘, 복원해야겠지요. 조상들이 남긴 문화재는 소중히 관리해야 하니까요. 걱정하시는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대단합니다. 감사해요.’]
혜진은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이어폰을 끼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때 옆자리에 있던 그 관광객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오래된 유적지가 가득한 경주 시내를 택시를 타고 달리며, 혜진은 자신이 그때 했던 말이, 어쩌면 너무나 슬픈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가 동궁과 월지 앞에 도착했다. 그녀가 택시에서 내렸다. 정문 옆 주차장에 차가 가득했다.
‘수학여행을 온 건가?’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학생들이 꽤 많았다. 여러 학교에서 온 모양이었다. 학생들이 줄 서서 정문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여기로 수학여행을 오는구나.’
경주 수학여행이라니, 세상에, 정말 지겹다. 이제는 더 멋진 곳도 많을 텐데. 하지만 어쩌면 그래서 경주 수학여행은 의미가 있었다. 나와 내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내 아이들도 이곳에 와서, 같은 곳에서 같은 자세로 사진을 찍을 것이기 때문에. 혜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생들도 많았지만, 가족, 친구와 온 사람들도 많았다. 어르신, 청년, 어린아이도 야경을 보러 이곳을 찾았다.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한 곳을 향해 걸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빛나는 오래된 건물의 지붕이 보였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곳에 오고 갔을까?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런 곳에 오면 혜진은 옛사람들이 대단한 것을 만들었다는 것에 감동하면서도, 그 사람들이 지금은 아무도 없다는 것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포로 로마노도, 만리장성도, 마추픽추도, 혜진은 그래서 슬펐다.
‘유적지 오면 기분이 이상하다니까…아휴, 이런 기분이 들면 안 되는데.’
이 나이엔 이런 기분만으로도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진 듯 몸이 무거워졌다. 앞으로는 유적지 말고 휴양지만 가리라, 그리고 오늘은 그 돈을 벌겠다고 혜진은 결심했다. 혜진이 가방에서 모자를 꺼냈다. 위에 달린 노란 꽃을 잘 편 뒤, 그녀가 모자를 썼다.
‘가만있자… 왔나? 안 왔나?’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누군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야! 저것 좀 봐!”
그녀 앞으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우르르 뛰어갔다. 혜진도 자연스럽게 그들을 따라갔다. 주차장 한쪽에 열 명은 족히 넘는 학생들이 까만 그림자 덩어리처럼 뭉쳐 웅성대며 서 있었다. 그들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자동차의 실루엣도 보였다. 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굉장해!”
“사진 찍어야지.”
사람들이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혜진도 그곳으로 걸어갔다. 안을 보려 했지만, 키 크고 건장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가 까치발을 들고 사람들 어깨너머로 겨우 안을 보았다.
‘그 자동차다!’
앤디와 조쉬가 타고 왔던 그 하얀 컨버터블이었다.
‘아… 안돼…’
이 여행은 비공개로 조용히 진행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있다간 비공개는커녕 또 뉴스에 대문짝만 하게 나올 것 같았다.
‘이미, 할머니 손수레에 쓰레기를 넣은 쓰레기가 될 뻔했잖아!’
혜진이 깡충깡충 뛰었다.
“잠깐만요! 사진 찍지 마시고, 길 좀 비켜 주세요!”
혜진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혜진이 사람들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다. 그때 뒤에서 온 손 하나가 혜진의 팔을 잡고 그녀를 밖으로 끌어냈다.
[“혜진!”]
[“어? 앤디?”]
[“혜진, 이리 오세요.”]
앤디가 혜진의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걸어갔다. 한가한 곳에서 그가 혜진의 손을 놓았다. 혜진이 앤디를 보았다. 그는 낮과는 달리 검은 바지에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어두운 밤, 밝은 것은 그의 옅은 갈색 머리와 푸른 눈동자뿐이었다.
[“사람이 많네요, 그렇죠?”]
[“네… 사람이 많네요. 근데…저 사람들은 뭐 하는 거예요? 사진을 찍고 있던데.”]
[“제 차 사진을 찍고 있어요.”]
[“아…”]
[“제가 아니라, 차가 스타예요.”]
[“하하하. 그랬군요.”]
[“아이들이 많아요. 학생들인 것 같던데.”]
[“중고등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왔나 봐요. 경주로 수학여행을 많이 와요.”]
[“오, 그렇군요.”]
둘은 주차장 반대편에서 앤디의 자동차를 둘러싼 학생들을 우두커니 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수가 줄었다.
[“이제 다 안으로 들어갔나 봐요. 우리도 가야 할 것 같아요. 조쉬는 어디 있죠?”]
[“조쉬는 안 왔어요.”]
[“왜요?”]
[“…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어요.”]
[“그래요?”]
혜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문제가 되나요?”]
[“아, 아니요… 아니에요. 그럼, 정문으로 갑시다.”]
[“네.”]
둘은 주차장을 지나 정문에 도착했다. 혜진은 앤디를 기다리게 하고 매표소로 혼자 총총총 걸어갔다. 줄이 길었지만, 그녀는 입장권을 금방 사 왔다.
[“이곳은 어떤 곳이죠?”]
[“ ‘동궁과 월지’라고 불러요. ‘동궁’은 동쪽에 있는 궁, ‘월지’는 달 연못이란 의미예요. 이곳은 잔치나 연회를 하던 곳이에요. 1500년 전에 만들었대요.”]
[“잔치하던 곳이라니, 좋네요.”]
혜진과 앤디는 정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광장처럼 넓은 공간이 등장했다. 가로등 몇 개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그리 밝지 않았다. 신이 난 학생들은 앞이 잘 보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을 치며 뛰어갔다. 혜진과 앤디는 그들을 피해 키 큰 나무 아래를 천천히 걸었다. 연못 한가운데, 빛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건물이 보였다. 앤디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혜진도 주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름다워요.”]
앤디가 감탄했다.
[“제가 찍어드릴까요?”]
혜진은 앤디의 휴대폰을 건네받아 빛나는 건물을 배경으로 그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사진을 확인한 앤디는 만족스러워했다.
[“당신도 찍겠어요?”]
[“아니요, 괜찮아요. 찍었어요.”]
[“당신은 당신 사진은 찍지 않는군요.”]
[“아, 네.”]
[“당신의 드로잉스타 계정엔 그림과 풍경만 있었어요.”]
[“…네, 맞아요.”]
[“그리고… 음,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혜진?”]
[“네.”]
[“이 사진들은 뭔가요?”]
앤디가 휴대폰으로 초록 시금치 사진을 찾아 보여주었다. 혜진의 계정에 있던 사진이었다.
[“이것이 시금치인 건 알겠는데, 왜 이런 채소 사진을 이렇게 계속 찍었죠? 날짜를 보면 벌써 몇 년째 찍고 있던데…”]
[“그냥 찍은 거예요.”]
[“그냥요?”]
[“아… 그게… 음… 기억하려고요.”]
[“쇼핑리스트였나요?”]
[“하하, 그렇기도 하지만, 음… 나중에 사진을 보면서, 제가 그날 그걸 사러 멀리 걸어갔다가 돌아왔다는 것을 기억하려고요. 시장이 저희 집에서 좀 멀어요. 걸어서 한두 시간 걸리는데…”]
[“시장을 가는데 걸어서 한두 시간이나 걸리나요?”]
[“일부러 걷는 거예요. 운동하려고요.”]
[“아하…”]
[“그 길을 거의 매일 혼자 걷거든요. 혼자 걸으면 좋은 점도 있지만, 가끔은 심심하기도 하고…”]
앤디의 표정이 조금 복잡해졌다. 하지만 혜진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저 혼자 그 길을 기억할 겸, 또, 저희 애한테 엄마가 어디 잘 갔다가 왔다고 알릴 겸, 시장 다녀온 사진을 올린 거예요.”]
앤디는 채소 사진들을 다시 보았다. 시장에 다녀온 사진이라고 했지만, 배경은 시장이 아니라 너른 강이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다리 위였다. 앤디의 눈에 그전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보였다. 그 다리를 건너 시장에 다녀오는 혜진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혜진과 앤디 옆을 지나갔다. 학생들, 연인들도 많았다. 가족들도 있었다. 어린아이와 함께 걷는 부모, 할머니, 할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걷는 청년들도 있었다. 앤디의 머릿속에 한 공원이 스쳐 갔다. 꿈에서 수십 번도 넘게 보았던 그곳은, 떠올릴 때마다 앤디의 마음을 행복하게 또, 불행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저녁엔 야경을 보러 간다고 했죠?’]
호텔에서 점심을 먹을 때, 조쉬가 물었다.
[‘밤 산책이라. 다른 곳에선 잘 못하는 경험이네요. 재밌겠어요. 잘 다녀오세요.’]
[‘안 가려고?’]
[‘좀 피곤해요.’]
앤디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앤디, 간다고 해도 안 좋아하셨을 거 다 아는데, 안 간다는데 그 표정은 뭐예요? 즐거운 모습을 보고 싶군요. 친절한 혜진과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오세요. 제가 못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줘요.’]
연못에 비춘 달을 바라보는 앤디의 마음은 깊게 가라앉았다. 누군가가 그의 곁을 또 떠날지 모른다. 레베카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수십 년을 애썼는데, 이번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을 견뎌야 할까? 따뜻한 집보다 조용한 무덤에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면, 그는 진정 어느 세상에 속해 있는 걸까? 그가 살고 있는 곳이 조용한 집이 아니라 따뜻한 무덤 같다면, 이 여행 끝에 그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 그곳은 왜 그렇게 밝고 아름다웠을까요?”]
[“네?”]
[“아까 우리가 갔던 곳이요. 그곳은 묘지였죠?”]
[“아, 네.”]
[“그런데 그곳은 하나도 묘지 같지 않았어요. 아름다운 공원 같았죠.”]
[“맞아요.”]
[“혜진, 그 왕은 왜 무덤을 집처럼 만들었을까요?”]
[“천마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곳은 잘 만든 방 같았어요. 안전하고 아늑해 보였어요.”]
[“맞아요. 온갖 물건들과 귀한 보물이 가득 있었죠.”]
[“사체를 처리하기 위함이라면 그렇게 대단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을 텐데,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마치,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집처럼 말이에요. 죽은 사람이 그곳에서 살고 있기라도 할 것처럼.”]
[“음… 왕이라서? 높은 사람이라서 그렇게 했던 걸까요?”]
앤디는 생각에 잠겼다. 왜 그랬을까? 위대한 이를 기리려고? 기념하며, 오래 기억하려고? 앤디의 가슴이 찌릿하게 아팠다. 물 위에 떠 있던 달이 울렁거렸다. 잠시 후, 앤디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잊으려고… 잊으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사랑하던 이가 입던 옷, 꽂던 장식, 매일 쓰던 물건, 부르던 노래, 즐겨 가던 곳, 그곳에 있을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 그것들을 보면 슬픔에서 헤어 나올 수 없어서, 모두 모아 한 곳에 숨겨 두어야 했다. 그래야 그나마 남은 시간을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사람과 함께 하던 곳이 천국이었고, 그 사람이 없으면 더 이상 천국이 아니었다. 앤디가 연못 위에 홀로 서 있던 건물을 보았다. 빛에 휩싸인 그곳은 꿈처럼 아름다웠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웃고, 사진을 찍고, 이야기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보였다.
[‘저렇게…’]
그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곳에 내가 도착했을 때, 비로소 그곳이 다시 천국이 될 것이다. 건물을 바라보던 앤디의 눈이 시렸다. 그가 눈을 감았다. 옛 기억들이 잠시 스쳐 갔다. 어린 그가 뛰어놀던 그 푸른 들판에서부터 이곳까지, 참으로 긴 길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앤디의 마음은 한결 편안했다.
[“혜진,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네, 그럼요.”]
[“비밀을 지켜줄 수 있나요?”]
[“물론이죠.”]
혜진이 검지와 엄지로 제 입이 굳게 닫혔다는 손짓을 했다. 앤디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아픕니다. 아주 많이요…”]
혜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무 걱정돼요. 그가 부디 잘 이겨내야 할 텐데… 생각하면 가슴이 부서질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저는 혼란스러워요. 저도 이제 나이가 많아요. 저 또한 그렇게 아플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떠나는 게 무섭고, 제가 떠나야 하는 게 두렵습니다. 젊을 땐 저도 몰랐어요, 이런 기분을. 그런데 지금은 저 끝이 너무 선명해요. 이럴 땐 어쩌면 좋을까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이 눈에 보일 때에는 말이에요. 대체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혜진이 앤디를 보았다. 그가 한없이 불쌍해 보였다.
‘누가 누구보고 불쌍하대…’
스스로가 한심해 실소가 나오는 것을 꾹 참았지만, 혜진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 수밖에 없는 곳에 그녀도 와 있었다. 혜진과 앤디는 계속 걸었다. 월지 둘레길을, 그들은 다른 이들과 함께 걸었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마음이 가라앉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둘레길을 반쯤 걸어왔을 때, 나무 사이로 작은 벤치가 보였다.
[“앤디, 저기 잠시 앉을까요?”]
혜진이 가리키는 곳을 앤디도 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길에서 내려가 벤치에 앉았다. 연못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아까 제가 너무 어두운 이야기를 했죠? 미안합니다.”]
앤디가 사과했다.
[“혜진에게도 안 좋은 기억이 있는데,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러니… 제가 한 이야기는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다시 미안합니다.”]
[“앤디, 그런 말씀 마세요. 정말 괜찮아요. 걱정이 많이 되겠어요. 무섭고 슬프죠. 충분히 이해해요.”]
혜진이 한숨을 폭 쉬었다. 입고 있던 조끼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녀가 말했다.
[“그런 생각을 저도 한답니다. 이젠, 그럴 때가 됐나 봐요. 저는요, 어쩔 땐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도 싫다는 생각을 해요. 그렇게 친해지면, 그 인연이 다 할 때 또 얼마나 아플까 싶어서요. 외로운 건 괴로운데, 헤어짐이 무섭거든요. 저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아픔을 주는 존재가 될 것 같아 자꾸 숨고 싶어요. 쳇바퀴 돌듯, 매일 똑같이 살아요.”]
[“……”]
[“앤디, 이건 나아질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그저 매일 견디는 거예요. 좀 덜 아프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면서요.”]
[“예를 들면?”]
혜진은 키위를 떠올렸다.
[“강아지를 키운다던가…”]
[“… 싫어요.”]
[“뭔가를 배운다던가.”]
[“오, 노.”]
[“못 가본 곳에 가보고.”]
[“그런 곳이 없어요.”]
[“안 해본 것을 해보고.”]
[“안 해본 것은, 애초에 하기 싫은 것들이에요.”]
[“……”]
[“… 하하.”]
혜진이 이 사람이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앤디를 보았다. 앤디는 계속 미소를 지었다.
[“… 옛날에 어떤 사람은 나무를 심었대요. 사람들이 좋아할 나무를요.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도 있대요.”]
[“환경 단체엔 매년 기부를 하고 있어요.”]
[“그게 아니라, 직접 해보란 거예요.”]
[“직접 하기엔, 정원이 좁은데…그러면 집을 새로 사야 해요.”]
혜진이 그를 흘깃 째려보았다.
[“지금 저는 노력하고 있어요. 도우려고요.”]
[“잘하고 있어요.”]
[“......”]
[“더 노력해 주세요.”]
혜진이 어이없어하자, 앤디가 더 크게 웃었다.
[“좀 더 역동적인 것 없을까요, 혜진?”]
[“어떤 역동적인 거요? 운동? 모험? 에베레스트 등산 같은 거?”]
[“하하하, 일론 머스크와 함께하는 우주여행 같은?”]
[“그런 거 좋아해요?”]
[“아뇨. 저도 싫고, 제 혈압도 별로 안 좋아할 거예요.”]
[“……”]
[“너무 극단적이지 않으면서도, 즐겁고 활기차게 만들어 주는 것. 적어도 그런 기분인 듯 저를 속일 수 있는, 그런 것 말이에요.”]
[“앤디, 저는 그런 종류는 잘 몰라요.”]
[“왜요?”]
[“저는 지루한 사람이거든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 아닐 텐데요?”]
[“……?”]
[“혜진은 적극적인 사람이잖아요? 당신은 낯선 나라에서 자신의 사랑을 쟁취해 냈죠.”]
혜진이 조금 놀랐다. 앤디가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때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도 혜진은 잊고 있었다. 구슬 같은 동그란 물방울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던 것이 생각났다. 그 분수였다. 눈앞에 고요한 연못을 두고도, 그녀는 그날의 분수를 떠올렸다. 햇빛 아래 찬란히 빛나던 하얀 대리석 분수를, 그녀는 왜 좋아했을까? 혜진이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았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저는 분수를 좋아해요.”]
[“알아요.”]
[“연못보다 분수가 좋아요. 저기 있는 연못이나 분수나 똑같이 물인데, 왜 분수를 더 좋아하냐면, 저는… 위에서 떨어지는 것, 정해진 대로 흐르는 것 말고, 하늘로 솟아오르는 그 모습이 좋아요.”]
아주 짧은 높이라도 좋았다. 중력을 조금이라도 거슬러 올라가는 그 모습이 아름다웠다. 얼마 가지도 못하고 알알이 흩어져 찬란히 부서지더라도, 한 번은 높게 날기 위해 뛰어오르는 그 시도를, 혜진은 존경하고 있었다.
어두운 밤, 고요한 연못을 바라보며 혜진은 생각했다. 지금 그녀는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이곳에 있지만 이미 떠나버린 것처럼, 초연하게, 조용히, 고여서 증발해 버린 듯 살고 있었다. 그렇게 살고자 했다. 이 나이에는 그게 옳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어린 혜진이 지금 혜진을 본다면 얼마나 놀랄까?
‘난 여전히… 나에게 가혹하구나…’
혜진이 씁쓸히 웃었다. 그녀가 앤디를 보고 말했다.
[“앤디, 제가 한 이야기는 다 잊으세요. 앤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세요. 신나고 밝은 일들을 많이 하세요.”]
둘레길이 꽉 차도록 사람들이 지나갔다. 밤길에 흥겨움이 있었다.
[“슬픔을 이기려면 잔치를 하는 게 맞아요. 그래서 밤에 잔치를 하나 봐요. 힘든 일은 밝은 낮에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묘지는 밝아야 했고, 잔치는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면서까지 열어야 했다. 어쩌면 천국의 시간은 낮도 밤도 아닌, 노을이 질 때일까?
[“잔치요?”]
[“네. 앤디의 친구들과 멋진 잔치를 하세요. 당신을 위해, 친구를 위해, 평소보다 더 즐겁게요.”]
오늘, 내가 쏘아 올릴 수 있는 고작 한 뼘 높이의 물줄기와, 언젠가 누군가가 매일 심고자 했던 작은 사과나무 묘목처럼. 밤이 찾아오는 것은 결국 막을 수 없으니, 기둥에 등불을 매달아 밝히고, 모르는 사람도 불러 모아 함께 하는 잔치를.
[“혜진은 잔치를 좋아하나요?”]
[“아니요.”]
[“안 좋아하세요?”]
[“안 좋아해요.”]
앤디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혜진을 보았다. 혜진이 쿡쿡 웃었다.
[“왜 안 좋아해요?”]
[“어쩌다가 몇 번은 참석할지 몰라도, 결국 저는 잔치에 어울리는 사람은 아니에요. 저는 정말 지루한 사람이에요. 저는 지루하게 태어나서, 지루하게 살고 있어요. 그래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향락에 빠져서 광란의 잔치를 벌이지도, 아니면 극단적으로 모든 걸 다 놓고 산속에 들어가 기도만 하면서 살지도 못해요.”]
[“… 왜요?”]
[“……?”]
[“혜진, 왜 그런 잔치를 못 하죠? 당신은 잔치를 즐길 만큼 충분히 나이 들었어요. 이제는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미친 척하고 지금까지 못 해본 황당한 일들을 하면서 남은 인생을 쓰면 안 되나요?”]
[“저는… 음… 위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앤디의 푸른 눈이 바다처럼 울렁거렸다.
[“그 사람이 제가 그러면 싫어할 거예요. 나중에 혼나지 않으려면, 그런 건 안 하려고요. 칭찬받을 일은 못 한다고 해도, 혼날 짓은……앤디, 왜 그래요?”]
앤디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허리를 구부려 무릎 위에 팔꿈치를 기댔다.
[“앤디, 어디 아파요?”]
[“… 아니에요. 괜찮아요.]
[“……”]
앤디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혜진이 앤디의 등을 바라보았다. 검은 옷을 입은 그의 등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를 토닥이려 혜진이 한 손을 들었다가 곧 내려놓았다. 혜진도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조금 뒤, 앤디가 상체를 일으켜 바르게 앉았다. 그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앤디, 피곤해요? 졸려요?”]
[“……”]
[“이 시간이, 우리 나이 대 사람들이 졸릴 만한 시간이긴 해요.”]
앤디가 혜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네. 피곤해요.”]
[“그럼, 이제 갑시다.”]
혜진이 일어서자, 앤디가 따라 일어났다. 둘은 사람들에 섞여 연못 반 바퀴를 돌아 다시 정문으로 왔다.
[“잠깐만 있어봐요.”]
혜진이 앤디를 두고 안내소로 뛰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동궁과 월지 안내 책자예요. 안에 기념엽서가 들어있어요.”]
[“고마워요.”]
앤디가 책자를 훑어보았다.
[“무료인가요?”]
[“아니요.”]
[“당신이 샀나요?”]
[“아니에요. 무료는 아닌데 그냥 받았어요. 이 정도는 그냥 줘요.”]
[“아, 제가 왔기 때문에요?”]
앤디가 장난 섞인 미소를 지었다. 혜진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아니요. 앤디가 아니라, 제가 와서 무료로 받은 거예요. 가이드는 가끔 안내 책자를 샘플로 받아요.”]
[“아하.”]
[“그래서 이 모자도 계속 쓰고 다녔던 거예요. 앤디가 저를 찾기 쉽게 하려는 것도 있지만, 입장권을 빨리 살 수 있고, 할인도 받고요.”]
[“그랬군요. 저는 혜진이 그 모자를 좋아해서 쓰는 줄 알았어요.”]
[“이 꽃모자요? 음, 그런가? 하하하. 맞아요. 아주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앤디도 웃었다. 혜진이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녀가 작은 비닐봉지를 앤디에게 건넸다.
[“그 책자랑 이거 조쉬에게 전해주세요.”]
비닐봉지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탕이 들어 있었다.
[“꼭 먹을 필요는 없다고, 그냥 기분이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해주세요.”]
사탕이 든 봉지를 들고 앤디가 혜진을 바라보았다. 혜진이 미소를 지었다.
[“갑시다, 앤디. 밤이 늦었어요.”]
[“……”]
[“차로 데려다 줄게요. 가요.”]
혜진과 앤디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 많던 사람들이 이젠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앤디의 차도 덩그러니 혼자 앤디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 옆에 선 앤디가 혜진을 보았다.
[“혜진, 고마워요. 너무 즐거웠어요.”]
[“저도요. 코넬 씨’”]
[“좋은 시간이었어요. 감사해요. 한국에 좋은 친구가 생겨서 기뻐요. 이곳을…다른 사람들에게도 소개해주고 싶어요. 특별한 곳이라고. 제 친구 혜진이 있어서 더 그렇다고요.”]
앤디는 영화제에서 만났던 심사위원들 생각을 했다. 부산에서 멀지도 않은 데, 그들도 와 보면 좋았을 것을. 역시, 모르면 영원히 모르지만, 일단 알게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찍은 싱싱한 시금치 사진처럼.
[“혜진을 만나면 다들 좋아할 거예요. 금방 친해질 거라고 확신해요. 그들도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거든요. 그래도, 혜진, 우리가 제일 먼저 친해졌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앤디가 윙크했다.
[“……”]
[“올해 영화제에도 작년에 참석했던 사람 중 몇몇은 올 거예요. 저의 새로운 친구 혜진을 그들에게 소개하면…”]
[“… 앤디?”]
[“네?”]
[“말씀은 고마워요. 하지만…”]
혜진이 손가락으로 모자 위 노란 꽃을 가리켰다.
[“저는… 가이드예요.”]
[“……?”]
[“친구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아요. 앤디도 알 거로 생각해요.”]
[“……”]
[“앤디 코넬은 친절한 사람이에요. 저도 알아요. 그리고 감사해요. 하지만 어떤 면에선 ‘너무’ 친절해요. 그래서 저를 친구라고 말해주는 거겠지만, 저는 앤디의 친구가 되기엔 부족한 사람이에요. 될 자신도 없고요.”]
[“……”]
앤디는 말문이 막혔다. 그가 차 유리창에 비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앤디 코넬이었다. 전 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스타였다. 스타 앤디에게 친구란, 인사말만 건네면 만들 수 있는 것, 기념품처럼 전 세계 어디를 가든 구해서 간직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누구든 이토록 친절한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그 또한, 타인의 호감을 거절하지 않았다. 앤디의 휴대폰에는 사람들이 바치는 우정이 늘 차고 넘쳤다. 런던 저택의 중정 구석엔 먼지 묻은 오래된 기념품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우리 친구로 지내기로 했잖아요. 친구로서 부탁하는 거예요. 앤디와의 우정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때, 에바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앤디가 거절하지 않을 마지막 제안을 하는 그녀는 정말, 그렇게 하고도, 앤디가 자신과 친구로 남아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앤디는 자신이 혜진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혜진은 친구로서, 아니면 친구가 되고자 앤디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친구를 사귀고 싶지 않다고도 했다. 진짜 친구라면, 저런 모자를 쓰고 그의 앞을 걸었을까? 그렇다고 그녀가 앤디의 하인인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자리에 있었다. 그녀가 있던 곳에 갑자기 들이닥친 것도, 그녀의 드로잉스타를 찾아낸 것도, 이곳에 그녀를 부른 것도 모두 앤디였다. 그녀는 그를 만나는 내내 주어진 일을 하고 있었다. 약속된 장소에서 정해진 복장을 하고, 가슴에 그녀의 이름을 달고, 우정이 아닌, 앤디를 안내하는 가이드의 역할로써. 혜진이 앤디에게 공손히 인사를 했다.
[“제가 하고자 한 일은, 오늘 하루를 잘 보내고, 제 임무를 잘 마치는 것이었어요. 이곳에서 잠시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그것으로 저도 기쁩니다. 앤디 코넬 씨, 조심히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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